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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eather Jan 05. 2023

<여행의 이유> 여행, 누구나 가질 수 있는 영웅 서사

김영하의 '여행의 이유' 독서노트

공항이 활기를 띠기 시작하는 요즘, 김영하 작가의 에세이 ‘여행의 이유’가 다시금 와닿습니다. 팬데믹이 오기 전에 참 공감하며 읽었던 책인데, 그 때나 지금이나 여행이 개개인의 영웅 서서라는 것에는 변함이 없음을 느끼며 독서노트를 적어 보았습니다.




1. 전통적인 영웅 서사는 추구의 플롯을 따른다. 모험을 하는 오디세우스와 여행하는 우리는 이 점에서 다르지 않다. 영웅은 외면적 목표를 가지고 여행을 떠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내면적 목표를 달성하고 여행에서 귀환한다. 현대의 여행 또한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관광 명소를 보고 온다든가의 외면적 목표를 설정하고 타지로 떠난다. 크든 작든 우여곡절을 거치며 더 넓은 시야와 자립심 등의 성장을 겪는데, 이것이 내면적 목표이다. 여행의 내면적 목표는 의도치 않게 달성하게 될 수도 있고, 때로는 외면적 목표보다 가치 있기도 하다.



2. 우리 머릿속에는 각자의 '프로그램'이 있다. 이는 겉으로 드러나는 취향과는 다르다. 프로그램은 무의식 속에 자리 잡고 있다가 우리가 판단을 내리고 행동을 할 때 힘을 발휘한다. 인종차별이나 성차별 등 편견의 정서 또한 프로그램에서 비롯된다. 대부분의 편견은 학습에 따른 잘못된 축적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차별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머릿속 프로그램에 따라 생각하고, 그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모른다.

 여행은 이러한 프로그램을 깨주기도 한다. 작가의 '멀미약 이야기'는 중의적 의미를 가졌다. 멀미는 흔들리는 차 등에 타고 있을 때 눈에 보이는 것과 뇌의 인지의 부조화에 의해 생긴다고 한다. 여행을 통해 내가 그동안 굳게 믿어왔던 것과 현재 눈앞에 보이는 것 사이 괴리가 생길 때의 혼란은 멀미와 비슷하다. 그러나 이 혼란은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혼란은 통해 프로그램을 깨고 더 나은 생각을 하는 사람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때 필요한 멀미약은 '열린 마음'이다.



3. 우리는 여행에서 낯선 이의 호의를 경험하기도 한다. 나 또한 해외여행을 갔을 때 지하철역에서 헤매고 있자 지나가던 현지인이 먼저 다가와 도움을 주었던 기억이 있다. 이런 호의는 여행자에게 매우 큰 의미를 갖는다. 현지인, 그 땅의 주인은 손님을 환대하고, 여행자이자 손님은 그 상대를 신뢰할 수밖에 없는 구조이다. 책에서 작가는 여행에서 신뢰와 환대가 쌍을 이룬다고 말한다. 그리고 환대를 받은 여행자는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가 다른 손님에게 환대를 베푼다. 환대는 순환한다.



4. 달에서 찍은 푸른 지구의 사진을 보고, 시인 매클리시는 인간을 지구의 승객에 비유했다. 인간은 탄생함으로써 지구에 탑승하고, 삶이라는 여행을 하다 때가 되면 내리는 것이다. 인생은 여행과 닮아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지구상의 모든 동식물 또한 같은 승객이자 동료이다. 더 나아가면 인간이 지구의 주인인 양 여기는 인간중심주의적 관점과 반대된다고 볼 수 있겠다.

 인생을 여행에 비유한다면, 신생아는 여러 사람의 환대와 도움 속에 초행길을 걷는 여행자이다. 이 여행자는 환대를 필요로 하고, 이를 절대적으로 신뢰할 수밖에 없다. 때가 되면 그는 자라서 새로운 여행자를 환대한다. 환대의 순환은 인생, 즉 지구로의 여행에서도 해당되나 보다.



5. 누군가는 인간을 두고 '호모 비아토르'라고 표현했다. 여행하는 인간이라는 의미이다. 인간이 뛰어난 두뇌 말고도 지닌 것은 지구력이었다. 힘으로나 몸집으로나 다른 동물들에 비해 부족했던 인간은 움직이고 또 움직였다. 이동의 본능은 현대 인간의 DNA에도 새겨져 있다. 몇십 년 전부터 많은 매체들이 인터넷의 발달로 여행객의 수가 줄 것이라고 예측했지만 여행객은 계속해서 증가해 왔다. 여행은 낯선 곳으로 굳이 찾아가 위험을 감수하고 시간과 돈을 쓰는 행위인데, 사람들은 여행을 너무나 사랑한다. 나 또한 그렇다. 한 곳에 정착하고자 하는 문명적 욕구 사이에 원시적 이동의 욕구가 비집고 있는 것이 아닐까?



6. 요즘 여행과 관련된 예능 프로그램이 많다. 출연자가 여행을 하는 과정을 카메라에 담고 편집해서 시청자에게 내보인다. 김영하 작가가 참여한 <알쓸신잡>도 마찬가지이다. 유튜브에도 비슷한 콘텐츠가 많다. 시청자는 그 여행지에 가지 않고도 여행을 한 기분을 느끼고 정보와 감정을 얻어간다. 사람들이 먹방을 보며 느끼는 '대리만족'의 정서와도 비슷하다.

 옛날의 양반들이나 유럽 귀족들은 멀리까지 여행을 가서 산꼭대기나 관광지 등은 하인을 시켜 대신 보게 했다고 한다. 지금 보면 어이없는 일이지만 요즘 사람들이 좋아하는 대리만족과 크게 다른 것 같지 않다. 여행을 하지 않고도 여행을 하는 비여행과 탈여행이라는 점에서 일맥상통하다. 책에서는 '직접 발을 딛지 않음으로써 오히려 그 장소에 대해 객관적이고 전체적인 통찰을 얻을 수도 있다'는 누군가의 의견도 나온다. 서울에 와본 적 없지만 서울에 대한 책을 꼼꼼히 읽은 외국인이 서울에 사는 나보다 더 잘 알 수도 있는 법이다. 그런데 과연 배에서 내리지 않고 하인에게 대신 시킨 여행을 여행이라고 할 수 있을까? 사람마다 의견이 갈릴 것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감각기관을 활짝 열고 오감을 적극적으로 활용한 경험적 여정을 여행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7. 작가는 오래 산 집에는 상처가 벽지의 얼룩처럼 들러붙어 있다고 했다. 그래서 깨끗한 호텔방 침대에 처음으로 눕는 순간이 소중하다는 것이다. 호텔 방은 강박적일 정도로 깨끗하고, 전에 머물던 사람의 모든 흔적을 지우도록 한다. 그렇기에 그 독한 세제 향에서 안정을 느낄 수도 있는 것이다. 나는 이 구절이 너무나 와닿았다. 오래 산 집에 대한 감정을 여행에 대한 욕구로 확장하여 생각해보지 못했는데, 읽으며 참 공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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