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와 나의 연결고리
사람들과 건강한 관계를 맺고 유지하기 위해서는 우선 사람을 올바르게 이해해야 합니다.
누군가를 볼 때 그의 성격이나 직업 같은 요소들이 편견으로 작용할 수 있고, 그러한 것들을 걷어내고 존재의 핵심인 감정에 시선을 맞추어야 한다고 이야기했습니다.
이번 글에서는 존재를 고스란히 받아들이기 어렵게 만드는 또 하나의 요인인 '관계'라는 부분을 짚어보려 합니다. 이는 한국 사회의 독특한 문화적 특성에 기인하는데, 정(情)으로 사는 한국인들의 관계주의입니다.
한국인에게는 조직보다 관계가 중요하다. 조직과 회사 같은 거대 시스템보다는 바로 내 앞과 옆에 앉아있는 동료와 상사, 부하직원과의 일대일 관계가 훨씬 더 중요한 것이다. 때로는 공적인 관계와 역할보다 사적관계가 우선한다. 한국 사회가 수직적이라고 하지만, 만약 조직적 수직체계만 중요시해왔다면 한국 사회는 그 역할에 맞는 행동만 하면 되는 훨씬 단순하고 살기 쉬운 사회가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한국은 '관계적' 수직사회이기 때문에 사회생활이 더 복잡하고 어렵다. 내가 조직에서 몇 위이고 어떤 위치에 있느냐보다, 내 지위가 저 사람보다 높은가 낮은가 하는 것이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일본 사람들은 의외로 일대일의 대인관계에서는 독립적이다. 가족이나 아주 친밀한 사이가 아니면 웬만해서 이름을 부르지 않고 깍듯하게 성을 부른다. 이들에게 조직은 있어도, 그 속의 개인들은 철저히 분리되어있다. 그에 반해 한국 사람들은 일대일의 개인적 관계를 가장 중요시하는 관계주의적 특성을 가지고 있다. 자신의 존재와 정체감은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규정되며, 따라서 누구와 있느냐에 따라 자신을 다른 사람으로 규정하는 맥락성과 역동성을 보여준다. 즉, 맥락에 따라, 특히 누구랑 있느냐에 따라 적절하게 바뀔 줄 아는 센스 있는 사람이 바로 한국인의 이상형이다.
심리학자 허태균 님의 저서 <어쩌다 한국인>의 한 대목입니다.
복잡한 관계망 속에서 사는 우리는 인간관계의 미묘한 부분을 감지하는 민감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민감성이 센스로 발휘되면 장점이 되지만, 관계에 기초해 사람을 대하기 때문에 그 이면에 있는 진짜를 보기 어렵게 만드는 단점이 있기도 합니다.
특히 가까운 사이일수록 관계를 벗겨내고 보기가 어렵습니다. 가족을 예로 들자면 부모님은 내가 태어날 때부터 나의 부모님이었기 때문에, 부모님으로서가 아닌 한 인간으로서 바라본다는 게 익숙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가족에게서 가장 큰 사랑을 받지만 가장 큰 상처를 받기도 합니다. 관계의 회복을 위해서 필요한 자세는 상대를 완벽한 타인으로 바라보는 것입니다.
부모님은 세상에 나올 때 나의 부모님으로 운명 지어지지 않았습니다. 나에게는 부모이지만 누군가의 자식이기도 합니다. 누군가의 형제자매이기도 하고요. 그리고 그 모든 것에 앞서, 그냥 그 사람 자체입니다. 사람이 철드는 순간이 언제일까 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은 ‘부모를 그 사람 자체로 볼 수 있을 때’라고 생각합니다.
부모는 나를 돌보기 위해 존재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걸 깨닫는 시점, 부모에게서 받기만을 기대하지 않고 나도 부모에게 무언가를 줄 수 있다는 걸 깨닫는 시점이 사람이 한층 성숙해지는 순간이라 생각합니다.
나의 부모, 나의 자식, 나의 형제라는 틀은 가족을 올바른 시선으로 바라보는 것을 방해합니다. 정해진 배역은 서로에게 마음의 빚을 지우고 지나친 기대를 하게 만듭니다.
가족은 이제까지 혼인과 주거를 함께하는 혈연 집단으로 정의되어왔다. 그리고 경제적 기능뿐만 아니라 자녀 양육과 노부모 봉양 등을 책임지는 기능적 역할을 해왔다. 하지만 현대로 오면서 이 모든 기능을 정부나 요양소, 탁아기관 등이 대신할 수 있게 됐다. 이제 새로운 가족의 정의가 필요하다. 기능적 역할이 축소된 가족은 이제 온전히 '관계'로 남게 되었다. 결혼이 사랑 이외에 다른 목적을 갖지 않듯이 가족 역시 권위와 역할이 아니라 정서적 결속감과 사랑이 더 중요하다. 그러기 위해서는 예전의 가족처럼 너와 나를 구분하지 않는 감정 합일이 아니라 너와 나를 타자로 구분하는 공감을 바탕으로 해야 한다.
<가족쇼크>라는 책의 한 구절입니다. 가족 안에서 부여된 ‘배역’이 아니라 그 사람의 ‘존재’에 집중할 때 비로소 우리는 가족이 어떤 사람인지 진정으로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가족을 타인으로 보는 시선, 그것은 건강한 가족을 만드는 토대가 됩니다.
사회에서의 인간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역할극을 하느라고 진짜 사람을 보지 못하는 일이 심심치 않게 일어납니다. 역할극의 배역은 어떻게 정해지는 것일까요?
한국어는 존대법이 발달한 언어입니다. 하지만 단순히 그 이유 때문만은 아닙니다. 영어나 일본어 등 다른 언어에도 반말과 존댓말이 있으니까요. 그런데 ‘말을 놓는다’는 개념은 우리나라 특유의 문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말을 놓는 순간 관계의 재설정이 이루어집니다. 그저 사용하는 언어만 바뀌는 것이 아닙니다. 말을 놓으면서 새로운 배역을 맡기로 모종의 협의가 이루어집니다.
저는 한의사니까 한의사를 예로 들어보면, A와 B 두 명의 원장이 있습니다. 원래 서로가 서로에게 ‘원장님’이었던 이 관계는 말을 놓자고 합의한 순간 ‘형’과 ‘동생’이라는 배역이 생기고, 그 시점부터 관계는 새로운 국면으로 전환됩니다.
형은 동생을 챙겨야 합니다. 밥도 사야 하고, 뭔가 교훈적인 얘기도 종종 해줘야 할 것만 같습니다. 그리고 동생이 먼저 연락하지 않으면 왠지 서운합니다. 동생은 형에게 기본적인 존중을 표해야 합니다. 식사 자리에서도 수저를 놓고 물을 따르는 건 특별한 일이 없으면 동생이 하게 됩니다.
관계는 상대적입니다. 형은 또 누군가의 동생이고, 동생은 다른 곳에서는 누군가의 형입니다. 두 명이 있으면 대개 둘 사이에 역할이 존재하고, 그에 따라 주어지는 행동지침이 있습니다. 역할이 10가지가 있으면 행동지침을 10가지 장착하고 있어야 하고, 상대에 따라 카멜레온처럼 언행을 적절히 변용할 수 있는 센스도 필요합니다. 언뜻 어려워 보이는 이 일을 우리는 척척 해냅니다. 어려서부터 그러한 방식으로 관계를 맺어 왔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렇게 역할에 따라 움직이는 관계는 진정한 본모습을 알기 어렵게 만드는 측면이 있습니다. ‘나와의 관계 속에 있는 그 사람’이라는 틀로 바라보면 일부분밖에 보지 못합니다. 물론 기대되는 역할을 무시하고 사회생활을 하기는 어렵습니다. 하지만 바라볼 때만큼은 상대방의 관계 밖 모습에 대한 흥미와 관심을 담아서 보면 좋지 않을까 합니다.
제가 존경하는 한 원장님이 다음과 같은 말씀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네가 한의원에 오는 환자를 환자로만 보고 환자로만 대하면, 그 사람은 계속 환자 역할을 해줘야 한다. 그 사람도 자신의 삶이 있고, ‘아픈 사람’이라는 모습 말고도 다른 모습이 있는데 너의 시선 때문에 환자로 살게 된다.”
생각을 전환시켜준 한마디였습니다. 자신이 ‘환자’로 인식되기를 원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 사람을 구성하는 정체성 중에 환자는 아주 일부분에 불과합니다. 저는 그 이후로 환자라는 이름표 이면에 있는 ‘사람’을 보기 위해 노력하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했을 때 또 다른 모습이 보이는 경험을 했습니다.
바라보는 것은 관계의 시작입니다. 본격적인 소통을 하기 전이라도, 내가 보내는 시선이 이미 관계를 쌓아 올리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래서 판단분별없이 사람의 내면을 바라보려는 의식적인 노력은 따뜻한 관계를 맺는데 매우 중요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