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내라는 말보다 더 힘나게 해 주고 싶다면
관계에 대한 글을 마무리하는 시점에 이르러, 전체 내용을 포괄하는 하나의 단어가 있을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오래 걸리지 않고 찾아낸 답은 사랑입니다.
글을 쓰면서 생각해 보니 줄곧 사랑에 관한 이야길 하고 있었다는 걸 알게 됐습니다.
공감하고 소통이 잘 될 때 우리 안에는 사랑이 피어납니다.
또한 공감하고 소통을 잘하기 위해서는 사랑하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사랑은 건강한 관계의 도착점인 동시에 출발점이기도 합니다.
사랑이라는 감정의 본질은 무엇일까요?
심리학자 John Lee는 사랑을 6가지 유형으로 나누어 설명했습니다.
스토게는 우애를 뜻합니다. 친밀감과 우정을 바탕으로 하는 편안하고 오래 지속되는 동반자적 사랑입니다.
에로스는 정욕이라는 단어와 대응되는데, 강렬하고 낭만적인 사랑을 뜻합니다.
루더스는 재미와 쾌락을 중요시하는 유희적 사랑입니다. 헌신하지 않고 깊게 몰입하지 않습니다.
프라그마는 이성에 근거한 현실적인 사랑을 말합니다. 조건을 따지고 계산하는 실용적인 사랑입니다.
마니아는 광적이고 중독된 사랑입니다. 상대를 소유하려 하며 집착하고 질투하게 됩니다.
아가페는 헌신입니다. 받는 것을 기대하지 않는 무조건적인 보살핌을 특징으로 합니다.
위의 분류에서 보듯이 사랑에는 다양한 모습이 있습니다.
우리는 가까운 사람들과 건강한 관계를 맺는 방법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가족을 사랑할 때, 친구를 사랑할 때 우리는 편안함, 따스함, 친밀감, 유대감을 느낍니다. 이런 느낌을 포괄하는 사랑은 위의 여섯 유형 중 스토게와 아가페를 합친 개념으로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번 글에서 다룰 사랑은 이 범주의 의미로 이해하면 되겠습니다.
“사랑해”라고 말을 해야만 사랑을 전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낯간지러워서 말하기 어렵다면 다른 방법으로도 사랑을 표현할 수 있습니다.
이 글에서는 사랑이 관계 안에서 구체적으로 어떤 모습으로 드러나는지, 사랑한다고 말하지 않고도 사랑을 전하는 방법은 무엇인지 얘기해보려 합니다.
몇 년 전, 한 모임에서 스피치 수업 과정을 들을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 수업은 조금 특별했는데, 여느 스피치 수업과 달리 발성이나 화술에 집중하지 않았습니다. 대신에 세상을 보는 관점, 타인을 보는 관점을 바꾸는 것에 초점을 맞췄습니다.
강사님 설명에 따르면 요지는 다음과 같습니다.
스피치를 잘하기 위해서는 타인을 사랑으로 바라볼 줄 알아야 하고, 여기서 말하는 사랑은 ‘상대방이 잘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라는 것.
그래서 수강생들이 서로에게 “당신이 정말 잘 됐으면 좋겠습니다.”라고 마음을 담아 말하는 연습을 반복하곤 했습니다.
가족이나 친구와 행복한 관계로 지내기 위해 우리가 가져야 할 마음이 바로 이런 마음이 아닐까 합니다. “당신이 잘 되기를 바라는 것.”
마음먹은 대로 일이 잘 풀리길, 원하는 바를 이뤄서 뿌듯해하길, 넘어져도 금방 툭툭 털고 일어나길, 사람에게 상처 받지 않길, 밥을 잘 먹고 잠도 편안히 잘 자길, 일상에서 기쁨과 즐거움을 많이 느끼길.
누군가를 사랑하고 아낀다면 당연히 바라게 되는 것들이 아닐까요.
인생에서 좋은 것만 경험하고, 나쁜 건 되도록 겪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
이런 사랑의 마음이 행동으로 나타날 때, ‘지지하기’의 형태로 표현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지지하는 것과 도와주는 것은 조금 차이가 있습니다.
에노모토 히데타케는 저서 <마법의 코칭>에서 'help'와 'support'의 차이에 대해 설명합니다.
구덩이에 빠진 사람이 도움을 요청했을 때 그를 잡아 올려 꺼내 주는 것, 즉 마이너스 상태(-)에서 제로 상태(0)로 만들어 주는 것은 '도와주기(help)'입니다.
사다리를 놓고 위로 올라가려는 사람을 위해 사다리를 잡아 주는 행동은 제로 상태(0)에서 플러스 상태(+)로 올려 주는 것이고, 이것은 '지지하기(support)'입니다.
두 경우 모두 상대를 ‘올라갈 수 있게끔’ 해 주었지만, 상대를 바라보는 관점에서 차이가 납니다.
도와주기는 상대의 부족한 점을 내가 메꾸어준다는 관점이고, 지지하기는 이미 완전한 상대를 더 잘할 수 있게 만들어준다는 관점입니다. 물론 누군가를 도와줄 때 항상 그를 부족하게 여겨서 도와주는 건 아니지만, 둘의 미묘한 차이를 설명하기 위해 비교해 보았습니다.
상대의 부족한 점을 굳이 따지지 않고, 그저 더 잘할 수 있도록 힘을 보태 주는 마음.
그 마음이 지지하기의 핵심이라 생각합니다.
남태평양 파푸아 뉴기니에는 키리위나(Kiriwina)라는 섬이 있습니다. 예전에 방영된 EBS 다큐멘터리 <가족쇼크>에 소개된 키리위나는 마을 사람들이 한 가족처럼 생활하는 것이 특징입니다. 식량이 생기면 마을 중앙의 창고로 가져가 보관해 두고, 이렇게 보관해 둔 식량은 도움이 필요한 사람에게 나누어 줍니다. 그리고 부모가 아이를 돌보지 못할 상황이 되면 다른 사람들이 아이를 케어합니다.
동명의 책 <가족쇼크>에는 키리위나의 삶으로부터 배울 수 있는 교훈이 잘 나와있습니다.
키리위나 사람들은 아픈 사람이 있거나 홀로 사는 노인이 생기면 모두가 함께 돌본다. 이런 곳에서는 고독사도, 1인 가구도 없다. 소외된 사람도 없다. 사회적 약자를 보호하고 돌보는 문화가 대대손손 교육을 통해 이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은 이런 돌봄 문화가 건강한 사회를 이어가게 하는 힘이라 믿고 있다.
키리위나의 삶의 방식은 '서로 돌봄'이다. 조한혜정 교수에 따르면 이런 서로 돌봄은 인간이 살아가기 위해 꼭 필요한 자존감을 키워준다. 도움을 받고 그것에 감사하고 나중에 자신도 남에게 도움을 주는 사람이 될 거라고 생각하는 일은 자신의 존재 가치에 대한 확신으로 이어진다.
근대를 압축적으로 경험하고 고도의 글로벌 자본주의 체제에 포획된 우리나라는 '경제'가 모든 가치의 압도적 우위를 차지하면서 '돈'이 신뢰나 돌봄 같은 상호 호혜적 관계를 급격히 소멸시키고 있다. 하지만 인간의 생존에 소통과 나눔은 필수다.
<가족쇼크>에서 말하는 돌봄은 공동체적 관점에서의 돌봄입니다.
부족 공동체인 키리위나와 한국 사회의 현실은 차이가 있습니다. 돌봄의 정신을 우리 실상에 맞게 적용한다면 ‘지지하기’의 모습으로 나타날 것입니다.
지지하기의 힘은 진료실에서도 종종 경험합니다. 지지의 말이 침을 놓고 약을 쓰는 것보다 강력한 효과를 발휘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병이 너무 오래되면 가족들도 케어하다가 지치게 됩니다. 시험 준비를 오랫동안 하다 보면 어느새 나 혼자 멈춰 있는 기분이 듭니다. 내 사업을 시작해서 의욕적으로 해보려 하는데 응원받지 못하면 두려움과 외로움이 밀려옵니다.
“그래도 몸 생각해서 이렇게 열심히 치료하시니 좋아질 거예요. 저도 최선을 다해 도와드릴게요”
“쉽지 않은 결정이었을 텐데, 큰 맘먹고 시작한 용기가 대단해요. 잘 될 거예요. 응원할게요”
외로운 싸움을 하고 있다고 느끼는 사람에게는 지지가 절실히 필요합니다.
의사가 환자의 삶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전부 도와주긴 어려워도, 삶 전체를 지지하고 응원해 줄 수는 있습니다.
각자도생이 일상화된 오늘날, 지지하기의 중요성은 더욱 커지고 있습니다. 사람이 먹고사는 문제로 바빠지기 시작하면 타인에게 뻗친 손길부터 거두어들입니다. 자기 몸 하나 건사하기도 힘든데 남까지 돌볼 여력이 없는 것입니다.
삶의 템포는 점점 빨라지고 마음의 여유는 점점 줄어듭니다. 이러한 추세는 앞으로도 계속될 것으로 보입니다.
늘 그렇듯 변화는 우리 주변에서부터 시작됩니다. 가까운 사람들에게 지지하기를 실천한다면 서로 돌봄의 가치가 사회에 조금씩 퍼질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지지하는 것은 사랑을 전하는 것입니다.
지지하기는 방향성에 따라 두 가지로 나눠 볼 수 있습니다. 즉 누군가를 지지하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습니다. 각각의 의미를 이해하면 실천하는 데에 도움이 될 것입니다.
다음 글에서 살펴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