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는 평생 하는 거라고?
이 글을 클릭해 들어왔다면 영어 공부에 관심이 있거나 영어를 잘하고 싶은 분이리라 생각한다.
앞선 여러 편의 글을 통해,
‘내가 영어를 정말로 잘하고 싶은 게 맞는지’ 점검해 볼 수 있는 여러 방법을 제시했다.
어디까지 갈 것인지 명확한 목표를 세우고
영어에 투자할 시간을 충분히 확보하고
내 안에서 우러나오는 간절함을 확인하고
세 가지가 오케이가 되고서 시작해야 한다고 했다.
오늘은 왜 영어를 적당히 할 바엔 시작하지 않기를 권하는지, 그럼에도 적당히 하고 싶다면 차선책은 무엇인지 나의 외국어에 대한 생각을 바탕으로 이야기해보려 한다.
지금까지 실질적인 영어 공부법은 이야기하지 않고 영어공부에 임하는 마음가짐만 길게 이야기한 이유는, 훌륭한 공부법들은 이미 시중에 너무 많이 나와 있기 때문이다.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양질의 자료를 구할 수 있다.
하지만 영어를 잘하고 싶은 건지 다시 한번 생각해 보라는 말은 어디에서도 듣기 어렵다.
영어공부 시작을 고민하라는 얘기는 이번을 끝으로 마무리하려 한다. 이 글을 다 읽고 나면 Go/Stop을 결정할 수 있을 것이다.
봉준호 감독의 통역을 담당한 샤론 최가 화제가 되었다. 그녀의 뛰어난 영어 실력은 물론이고 탁월한 언어 감각에 대한 극찬이 이어졌다.
영어를 잘하는 사람을 보면 늘 시샘에 가까운 부러움을 느꼈다. ‘저 사람은 대체 어디서 영어를 배웠길래?’라는 생각이 먼저 들곤 했다. 해외파라는 사실을 듣고 나면 ‘그럼 그렇지’라고 의미 없는 위안을 하기도 했다.
독학으로 영어를 정복한 국내파 영어 달인들에게서는 그 비결을 알기 위해 애썼다. ‘분명 특별한 비결이 있을 거야.’ 그렇게 몇 년을 찾아다니다가 진실을 깨달았다.
진실은 허무할 정도로 단순했다.
그들은 방법은 조금씩 다르지만 '어떻게 저렇게까지 할 수 있지' 싶을 정도로 열심히 그리고 꾸준히 공부했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그렇다면 그들의 영어 공부 방법이 핵심일까, 아니면 그 방법을 묵묵히 지속할 수 있게 한 열정이 핵심일까?
그만한 열정을 가지지 않은 사람이 그와 똑같은 방법으로만 영어를 공부한다면, 영어의 달인이 될 수 있을까?
"좋다는 방법을 다 따라 해 봤는데 늘지 않아요."
분명 잘할 수 있다고 했는데. 그들은 거짓말을 한 걸까. 사실은 그들에게 속은 게 아니다. 자기 자신에게 속은 거다. 좋다는 영어 공부법을 찾아다니고 좋다는 선생님을 찾아다녔지만 영어 실력이 실제로 늘지 않았다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나를 영어 잘하게 만들어 줄 그 누군가를 또다시 찾아 헤매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자기 자신에게 속고 있는 게 맞다.
강사는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실제로 강사 본인이 그 방법으로 공부해서 영어를 잘하게 되었고, 우리도 그 방법을 그대로 따라 하면 영어를 잘하게 될 가능성이 높다.
그런데 우리가 놓친 게 있다. 바로, 강사가 영어를 공부할 당시에 가졌던 그 ‘열정’과 ‘마음가짐’을 가진 채 라는 전제 하에서만 가능한 얘기라는 것. 그러한 열정을 가지지 않은 사람이 강사의 방법대로 한다고 해도 똑같은 효과를 볼 수 없다. 그 방법을 꾸준히 이어가기조차 어려울 것이다.
영어를 잘하게 된 사람은 특별한 방법이 있어서가 아니라, 특별한 열정이 있었기 때문이다.
외국어에 대한 나의 지론은 이렇다.
외국어는 제대로 할 거면 필사의 각오로 뛰어들어야 하고, 그렇지 않을 거라면 아예 안 하는 게 낫다. 왜냐 하면 언어엔 '적당히'라는 게 없기 때문이다.
어떤 언어를 할 줄 아는 것과 할 줄 모르는 것은 확실히 구분된다.
우리가 한국에 살면서 누가 더 완벽한 한국어를 구사하는지 따지진 않는다. (화술이나 스피치의 영역이 아닌, 의사소통의 영역만을 놓고 보면) 더 완벽한 한국어를 구사하려 굳이 공부하고 애쓰지 않는다.
한국사람이라면 대부분 한국어를 '할 줄 안다'. 의학적인 도움이 필요한 경우를 제외하면, 모두 한국어로 의사소통하고 일하고 생활하는 데 문제가 없다.
그러므로 의사소통 관점에서 한국어를 적당히 한다는 개념은 없다. 할 줄 알거나, 모르거나 둘 중 하나다.
영어도 마찬가지다. 가령 수능 영어독해 지문을 읽고 문제를 풀 수 있는 사람이, 공항 입국 심사대에서 펼쳐지는 간단한 영어 대화에도 당황하고 쩔쩔맨다면 그는 영어를 '적당히' 하는 게 아니다. 영어를 못하는 것이다.
대부분 영어로 의사소통할 수 있길 기대하며 영어를 공부한다. 영어 방송이 들리고 영어로 대화하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하며 공부한다. 하지만 영어를 몇 년을 붙들고 있어도 계속 비슷한 정도에 머물러 있다면 한번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영어를 많이 잘하고 싶어 하는 사람 치고는 그동안 적당한 열정을 갖고 적당한 시간만 투자해 왔던 건 아닌지.
외국어 공부를 하고는 싶은데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이기 어렵다면, 다음의 예외를 참고하자.
적당한 외국어 실력도 의미가 있는 예외적 경우는 다음과 같다.
첫째, 원활한 의사소통까지는 바라지 않고 간단한 정보를 습득할 수 있는 수준을 목표로 하는 경우다. 대화를 자유로이 할 수는 없지만 짧은 글을 읽거나 기초적인 회화는 가능한 수준을 말한다. 대표적인 예가 여행에서 써먹을 목적으로 외국어를 배우는 경우다.
나는 어떤 나라로 여행을 가든 그 나라의 언어를 조금이라도 공부해 가곤 했다. 그렇게 벼락치기로 배운 약간의 외국어로 현지인과 떠듬떠듬 대화를 하는 게 그렇게 재미있을 수가 없었다. 대화는 몇 마디 이어지지 못했지만, 내 말을 알아듣는다는 사실만으로도 신기하고 재밌었다.
재작년에는 남미 여행에 앞서 스페인어를 몇 달간 공부했다. 그 결과, 기초적인 수준이었지만 여행 중에 식당, 숙소, 교통수단을 이용할 때 요긴하게 써먹었다. 처음부터 내겐 목표 수준이 정해져 있었다. 자유로운 대화를 목표로 했던 것이 아니다.
영어도 같은 관점으로 보면 된다. 여행을 편하게 다니기 위한 목적으로 영어를 공부하는 것이라면, 여행영어 위주로 내가 필요한 만큼 시간을 들여 공부하면 된다.
둘째, 외국어를 공부하는 행위 자체를 즐기는 경우다. 생뚱맞게 들릴 수 있지만 언어를 배울 때 재미가 동력이 되는 경우는 생각보다 많다. 우리는 무엇인가 새로운 걸 배울 때 재미를 느끼는데, 외국어는 기본적으로 낯설고 새롭기 때문에 즐거움을 느낄 만한 요소가 많다. 게다가 처음엔 실력이 금방 는다. 왕초보에서 초보로 올라섰을 때의 성취감은 이루 말할 수 없다. 하지만 거기에서 몇 단계를 더 나아가려면 그때부터는 고통스러운 과정이 기다리고 있다.
영어를 공부하는 사람들 대다수가 그 과정을 감내할 만큼의 각오는 가지지 못한다. 그럼에도 여전히 영어를 계속하는 이유는 재미있기 때문이다. 원어민이 쓰는 새로운 단어와 요새 유행한다는 쿨한 표현을 배우는 건 그 자체로 즐거움을 준다.
이처럼 영어를 배우는 활동 자체가 일상의 활력소가 된다면 영어를 계속하는 게 의미 없는 일은 아니다. 다만 한 가지는 분명히 알고 하자. 최소한 지금 수준의 영어 실력은 유지할 수 있을 테지만, 더 잘하고 싶다면 결코 즐겁지만은 않은 과정을 견뎌야 한다는 것을.
"영어는 어차피 평생 하는 거야."
이 말을 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 모두 오해하고 있는 부분이 있다.
영어를 평생 한다는 의미는, 평생 동안 조금씩 공부해야 한다는 뜻이 아니다. 일 년에 2%씩 실력을 키우면 10년 후엔 20% 더 잘하게 되리라 기대하면서 하는 게 아니다.
영어는 평생 하는 것이라는 말의 의미를 두 가지로 풀어 보았다.
첫째, 영어에서 새로운 단어와 표현은 끊임없이 생성되므로 이를 평생에 걸쳐 습득해야 한다는 뜻이다. 영어의 틀은 단시간 내에(아무리 길어도 일 년 내에) 완성시켜 놓아야 한다. 여기서 틀의 완성이란, 영어의 특성과 구조를 이해하고 머릿속에 심는다는 의미다. 영어 뇌가 하나 더 생기는 것이다. 이렇게 틀을 일단 만들어 놓고 평생 동안 새로 배우는 단어들을 그 안에 담아야 하는 것이다.
둘째, 영어를 평생 '쓴다'는 뜻이다. 평생 공부하는 게 아니다. 최대한 빠르게 영어를 공부해서 내 것으로 만들고 평생 써먹으며 사는 것이다. 영어를 평생 공부하겠다는 마음가짐으로 하면 평생 동안 늘지 않는다. 3개월이면 3개월, 6개월이면 6개월. 기간을 정하고 빨리 실력을 키워서 목표한 만큼 잘하게 된 다음에 그 실력으로 평생 쓰겠다는 마음가짐으로 해야 한다. 6개월만 공부하면 짧지 않냐고? 걱정할 필요 없다. 영어를 평생 사용한다면 영어 실력은 전진만 있을 뿐 후진은 없을 것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영어와 관련된 무언가를 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을 거라 생각한다.
앞에서 이야기한 내용을 바탕으로 자신이 영어를 잘하고 싶은 마음이 얼마나 절실한지 살펴보자.
많이 간절하지 않다면 위의 두 가지 예외적인 경우에 해당하는지도 생각해보자.
아무리 생각해도 해당사항이 없다면 고이 보내주자.
모두가 영어를 잘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영어가 아니라도 세상에 할 일은 많다.
만약 영어를 시작할 준비가 되었다면,
앞으로의 이야기를 참고해 보면 도움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