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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욱정 Apr 09. 2020

영어모임을 운영하고 깨달은 것 [2]

가르친 것보다 배운 게 많았던 시간

역할을 고민하다


예전에 English Gym(영어로만 대화하는 모임)을 이끌면서 가장 많이 했던 고민은 '어떻게 하면 영어를 한 마디라도 더 하게끔 도울 수 있을까' 였다.


나의 역할은 motivator.

멤버들이 잘하고 싶은 마음이 들도록 동기 부여를 해 주고 잘할 수 있게 격려해 주는 사람이었다.


‘열심히만 해 주세요. 나는 무엇이든 줄 준비가 되어 있어요.’


진심이었다. 나는 두 팔 벌려 열정을 끌어안을 태세로 임했다.


하지만 맘처럼 잘 되지 않았다.

멤버들의 일상엔 영어 말고도 중요한 일들이 많았고 영어는 점점 후순위로 밀렸다.

안타까웠다. 나는 일종의 한계를 느꼈다.



이번에는 달랐다.

전날에 배운 표현까지 활용해서 문장을 만드시는 분도 계셨고 하루도 안 빠지고 매일 미션을 수행하신 분도 계셨다.

이제는 내가 보여줄 차례였다.

그들의 열정에 내가 화답할 차례였다.


학생이 선생의 열정을 못 따라가면 안타까움으로 그치지만, 선생이 학생의 열정을 못 따라간다면 직무유기다.


멤버들의 열정에 부응하려니 내 역할은 motivator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동기가 생긴 사람에게 그다음 필요한 건 뭘까?

실질적인 도움이다. 애초에 이 모임을 신청하면서 가졌던 기대를 충족시켜줘야 한다.


동기 부여보다는 가르치는 게 더 쉬울 거라고 막연히 생각했다. 동기 부여는 사람을 움직여야 하는 일이니까.

그게 아니었다. 알맹이를 줄 수 있으려면 내가 정말로 능력 있는 사람이어야 했다. 포장지로 감출 수 없는 진짜 실력이 비로소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모임이 중반쯤 되어 가니 멤버들의 참여율도 조금씩 변동을 보이기 시작했다. 사람이 뭔가를 오래 지속하려면 끈기가 필요하다. 스스로 끈기를 내기 어려울 땐 주변에서 도와줘야 한다.

나의 motivator로서의 역할이 다시금 중요해지는 시점이다.


모임을 운영하면서

아침에 일찍 일어나는 분들이 많다는 것

다들 바쁜 시간을 쪼개서 모임에 참여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는 진지한 마음으로 모임을 기획했고 준비에 정성을 쏟았다. 나의 진심에 대한 그들의 화답이 참 감사하다.


좋은 선생님의 자질이 뭘까.

한 가지는 확실히 깨달았다.

제일 열심히 하는 사람은 나여야 한다.

좋은 teacher가 되기 위해서는,

가장 열정적인 learner가 되어야 한다.




나를 되돌아보다


이젠 영어를 배우는 올바른 접근법을 깨우쳤지만, 입시 위주의 한국식 영어교육을 받으면서 내 안에 뿌리내린 잘못된 습관과 인식은 아직도 일부 남아있다.


문장 피드백을 하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멤버들의 문장을 고쳐 주는 작업을 계속하면, 내가 더 정확한 영어를 구사하는데도 도움이 되겠구나. 가만, 그런데 나는 지금 accuracy(정확성)보다는 fluency(유창성)를 키워야 할 때 아니었나?'


수능 영어로 다져진 내 영어의 강점은 accuracy다. 영어로 말하는 건 원활하지 않아도, 영어로 된 글을 읽거나 문법에 맞게 쓸 줄은 안다. 그래서 나는 상대적으로 부족한 fluency를 더 연습해야겠다는 생각을 늘 갖고 있었다.


그렇게 fluency의 필요성을 느끼던 내가,

한국의 전통적인 영어교육 방식에 반대하던 내가,

사람들에게 영어회화 패턴을 알려 주고 문장을 첨삭해 주고 있었다. 지극히 accuracy 위주의 활동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영어 표현을 배우는 게 분명 어떤 식으로든 도움은 될 것이라고 위안해 보지만, 묘한 괴리감을 떨쳐낼 수 없다.

내가 오랫동안 영어를 배운 방식, 실제로 영어 실력에 도움이 되지 않는 그 방식을 비판하면서도, 나도 아직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걸까.




턴어웨이 포인트


턴어웨이 포인트(Turn away point).

발길을 돌려야 하는 시점. 내가 만든 단어다.


어떤 서비스든 턴어웨이 포인트가 있다. 식당, 카페, 병원, 미용실 모두 마찬가지다.

자기 사업을 해 본 사람은 알 것이다. 처음에는 고객 한 명 한 명이 너무나 소중하다. 지극정성으로 그들을 맞이한다. 그러다가 점점 충성고객들이 늘어나면, 영원할 것 같았던 초심이 흔들리기 시작한다. 너무 바빠져서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서면 고객은 이제 귀찮은 존재가 된다.

서비스의 질은 낮아지고 실망한 고객은 늘어간다. 임계점에 도달한 것이다. 소문난 맛집을 찾아갔더니 불친절하더라는 후기가 많은 이유도 설명이 된다.

고객을 잃어도 아쉬울 것 하나 없다는 마인드는, 고객이 발길을 돌리게 만든다.


이번에 서비스를 제공하는 입장으로 나는 이를 경계했다. 꼭 장사가 잘 되는 집만 초심을 잃는 건 아니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부담될 정도로 일이 많아지는 상황을 피하기 위해 참여 인원을 제한했다. 그럼에도 모임을 시작할 때 마음 한 켠에는 '하다 보면 만사가 귀찮아지고 멤버들이 짐처럼 느껴지는 순간이 올까?' 라는 생각이 있었다.

나는 그러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그리고 내가 언제까지 미소 띤 얼굴을 유지할 수 있을지 시험해보기로 했다. 임계점의 위기에 가까이 다가가 봄으로써.



사람이 서운함을 느끼는 순간은 자신이 one of them으로 취급받는다고 느낄 때이다.

상당수의 고객 불만족이 이 지점에서 발생한다. 누구나 자신을 특별한 존재로 생각한다.

환자는 자신이 그저 병원을 찾은 수많은 환자들 중 한 명으로 대우받길 바라지 않는다.

이번 영어모임은 소규모이기도 하고 매일 1:1 대화가 오가는, 비교적 밀착적인 관계였다. 그래서 멤버들이 개별적으로 케어받는다는 느낌을 주기 위해 노력했다.




행복의 비밀을 발견하다


인간에게 가장 높은 수준의 행복을 선사해 주는 건 뭘까. 돈? 맛있는 음식? 취미활동? 여행?


일단 돈은 아닌 것 같다. 영어모임을 진행하면서 기쁘고 행복한 순간들이 있었는데, 분명 돈 때문은 아니었으니.


멤버 중 한 분이 고민을 털어놓았다. 영어 공부를 이것저것 하고 있는데 실력이 정체된 느낌이 들어서 힘들다고 이야기했다.

낯설었다. 여태껏 나는 주로 상담을 청하는 입장이었다. 지금도 기회만 있다면 내 영어 고민을 상담할 준비가 되어 있다.

여전히 안갯속을 헤매고 있는 내게 도움의 손길을 요청하다니. 감사하면서도 감격스러운 일이다. 아마 그분 또한 안갯속을 걷고 있고, 내가 조금 더 앞서 있다고 생각했으리라.


내 선에서 할 수 있는 조언을 해드렸다. 그분은 내게 “당신을 알게 돼서 감사해요” 라고 하셨다.

나는 그 말에 담긴 감정을 잘 안다. 내가 그 말을 여러 사람한테 해봤기 때문이다. 그래서 더욱 의미 있고 마음속에 간직하고픈 말이다.



모임은 소정의 비용을 받고 진행했다. 돈을 받을 수 있는 근거는 뭘까. 자문해본다.

내가 누군가에게 감사의 말을 들을 때, 내 능력의 금전적 가치에 대해서도 자신감을 갖게 된다.


사람이 일을 하다 지칠 때면 보상에 대해 생각한다. 일을 함으로써 얻는 보상. 대부분은 돈이다.

그럼 오직 돈 때문에 무언가를 지속할 수 있을까?

글쎄, 잘 모르겠다. 어마어마한 돈이라면 가능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하다.

칭찬과 인정의 힘으로 무언가를 지속할 순 있다. 심지어는 돈을 거의 벌지 못한다고 해도 말이다. 칭찬과 인정이 건드려주는 건 '자기효능감'이다. 누군가를 도와주면 칭찬과 인정을 얻고, 자기효능감은 춤을 춘다.

이것도 중독이다. 한 번 중독되면 다시 그 느낌을 맛보고 싶어서 계속해서 타인을 도와주게 된다.


타인을 도우며 느끼는 행복은 인간이 느낄 수 있는 가장 양질의 행복에 속한다.

‘성장하는 모습을 보는 것’ 그리고 ‘진심 어린 감사의 말을 듣는 것’은 행복을 이루는 두 축이다.




자기평가의 시간


모임이 끝나고 자기평가의 시간을 가져 보았다.

잘 기록해 두었다가 다음에 영어 모임을 하게 될 때 반영하고자 한다.


먼저 아쉬운 점부터.

카톡방에서 활발한 소통이 이루어지지 못했다.

이 프로그램은 1:1로 개별적으로 진행해도 된다. 그럼에도 단톡방을 만든 이유는 그 안에서 영어에 대한 고민과 질문을 나누고 소통하기 위해서였다.

질문은 언제든 편하게 하시라고 말씀드렸지만 단톡방에서 많은 대화가 이루어지지는 않았다. 무엇을 질문해야 할지 막연했을 수도 있고, 너무 바빠서 대화할 시간이 없었을 수도 있다.


모임 구성원들의 성장은 모임 전반에 흐르는 에너지에 좌우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리고 그 에너지는 활발한 대화에서 나온다. 열정이 전염되어 다 같이 으쌰으쌰하는 분위기가 형성되었으면 하고 바랐는데, 내가 동기 부여를 충분히 해드리지 못한 것 같다. 이 부분은 여전히 숙제로 남았다.



영어모임은 취지에 맞게 진행되었나?

이 프로그램은 영어 표현 20개를 알려 주는 게 목적이 아니었다. 매일 영어문장을 만들어 보는 연습을 함으로써 결국엔 습관으로 정착할 수 있게끔 돕는 것이 목적이었다. 그리고 문장 만들기를 독려하기 위한 장치로 피드백 시스템을 생각했다.

그런데 이 피드백이라는 게 문장에서 틀린 부분을 고치는 방식이다 보니 장단점이 명확했다.

정확한 영어를 구사하는 데는 도움이 되지만, 자유로운 소통에는 오히려 방해가 될 수 있다. 우리는 그동안의 영어공부 역사에서 이미 지적을 충분히 많이 받아왔다. 실수를 지적받는 것보다 지금 더 시급한 건, 영어를 내 마음대로 표현할 수 있는 자유다.

나는 하고 싶은 말을 영어로 표현할 수 있게끔 도와주는 사람이 되고 싶었는데, 정작 영어 실수를 콕 집어내는 사람이 되어버리지 않았나 반성해본다.



영어모임은 실제로 실력을 키울 수 있었던 게 맞나?

진짜배기를 만들고 싶었다. 화려한 광고로 수강생을 모아 놓고 막상 영어를 잘하게 만들어주진 못하는 시중의 많은 강의들을 보며 다짐했다. 뭔가 다른 걸 만들어보겠다고.

실제 효과는 어땠을까.

결론부터 말하면, 성에 차진 않는다.


모임을 기획할 때 주제와 형식을 정하기까지 오랫동안 고민했다.


멤버들이 실제로 영어를 잘하게 만들어줘야 한다

방향성은 모호하지 않고 명확해야 한다

참여 의욕을 높일 수 있는 장치가 포함돼야 한다

운영의 편의를 위해 루틴화된 시스템을 갖춰야 한다


여러 가지를 고려해서 모임을 만들었는데, 지금 돌이켜보니 실제로 영어를 잘하게 만들어 주는 데에 더 힘을 쏟았어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자격이 있을까?’라는 의문으로 시작했고

내가 정말로 도움 되었나?’라는 의문으로 끝을 맺었다.

시작할 땐 자격에 대해 생각했지만

끝날 무렵엔 본질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영어모임의 본질은 당연히, 영어 실력 향상이다.


루틴화된 시스템은 겉으로는 그럴듯해 보이지만 실속이 있는지는 별개의 문제다. 실력을 키우기 위해선 하루 3문장을 만들고 피드백을 받는 것 이상의 뭔가가 필요하다.

답은 계속 고민해봐야겠다. 고민하다 보면 뭔가 나오지 않을까 싶다.



언어 학습에서 가장 효과적인 도움은 '맞춤형 코칭'이다. 그룹 강의는 한계가 있다.

이유는

첫째, 학습자마다 수준과 성향이 다르고

둘째, 언어 학습은 결국 스스로 해야 하기 때문이다.


방향성을 함께 고민해 주고

옆에서 의지를 북돋워 주고

막힐 때 해답을 찾을 수 있게 도와주는 코치.


열정을 가진 학습자가 진심을 다하는 코치를 만난다면 영어 실력 향상을 보장할 수 있을 것이다.





나의 프로그램이 누군가에겐 할 만하고 누군가에겐 조금 어려웠을 것이다.

프로그램의 난이도는 차치하고, 꾸준히 무언가를 한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나도 영어 모임에 참여해봤어서 안다. 매일 과제를 하는 게 얼마나 귀찮은 일인지.

끝까지 최선을 다한 멤버들에게 진심으로 고맙다.



 



아래는 멤버들에게 마지막으로 당부한 이야기.


"틀려도 괜찮으니 무조건 많이 만들어보세요. 이미 여러분은 영어를 할 수 있는 능력이 충분해요. 하루 3문장을 꼼꼼히 만들고 피드백을 받는 것보다, 하루 30문장을 대충 만드는 게 영어실력이 더 빨리 늘어요. 글로 쓰지 않아도 되니 입으로 소리 내어 만들어 보시고, 그게 어려우면 마음속으로라도 해 보세요. 질보다 양으로 승부한다는 생각으로 시간 날 때마다 영어로 말해보세요. 언어의 본질은 소통이라는 사실을 꼭 기억하고 계시면 좋겠어요."


모임을 하면서 내 영어실력이 누군가를 도울 수 있을 만큼 쓸모가 있다는 걸 알았고, 한편으로는 부족함도 많이 느꼈다.

그래서 당분간은 영어 실력 키우기에 매진할 계획이다. 한국어로 정보를 소비/생산하는 일을 최소화하고 영어로 최대한 해보려 한다.

그 과정에서 배운 내용들은 후에 브런치에 공유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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