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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태옥 Dec 19. 2022

암만, 평생 여성농민회 해야제

1세대 여성농민운동가, 고송자

여부자 손이 썩다니 

    

어린 송자 할머니는 고향 신안군 하의도에서 여부자로 불렸다. 점잖은 양반 스타일이었던 할아버지와 혼인한 할머니는 영리하고 억척스러웠다. 그 시절 누구나 그랬듯이 친정도 가난했지만 시집와 보니, 신랑집 살림도 고만고만 비슷한 처지였다.  

할머니는 할아버지에게 글과 셈을 배웠다. 바지런하고 영리했던 섬마을 새댁은 어느덧 땅을 사고 염전을 한판, 두 판 사들이며 살림을 불려 나갔다. 할머니 뒤를 따라 걸을라치면 여부자 할머니 손이 셈으로 바삐 움직이는 것이 어린 송자의 눈에도 보였다. 그해 수확으로 벌어들인 나락과 소금값 셈이나, 지난봄 빌려줬던 아랫마을 김 씨네 이자 따위를 계산하는 손놀림이라고 짐작할 뿐이었다. 아들 여덟을 두었던 여부자 할머니는 시동생들까지 총 12채의 집을 지어 분가시켰고, 아들들에게는 염전 한판과 땔감을 위해 필요했던 산봉우리까지 떼어 주었다.

할머니의 억척과는 반대로 아들은 부모만 의지하고 받은 살림도 지켜내지 못했다. 

하의도 여장부였던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염을 하던 마을 어른이 “세상에 여부자 손이 썩다니”라고 내뱉은 혼잣말을 어린 송자는 알아들었을까?

“여자는 남의 집에 가서 살림을 일으켜 줘야 한다.”던 여부자 할머니의 당부를 듣자니 한 세상 호령한 여부자의 몸에 엄습해 온 가부장의 지독한 관습이 전해진다. 

결혼해서 살림을 일군다는 것은 내 살림 일으키는 것이나 진배없으니, 한 살림 일으키고픈 욕망을 할머니의 당부가 건드린 것은 아닐까?

“남편이 내 말만 들었어도 우린 땅부자 되얏을 것이여. 근디 아무래도 여자라서 남편 이겨 묵고 큰 결정하기는 고집 센 나도 힘들더만”이라고 고백하는 것을 보니, 추진력 갑인 고송자 회장도 남성 중심 농촌사회의 관습을 끝까지 이겨내기는 어려웠나 보다. 

여부자가 살림을 일으켰다면 고송자 회장은 여성농민운동을 일 떠 세웠으니 청출어람이다. 

아버지는 무기력했지만 부자 할머니를 둔 덕에 어린 송자는 호강스럽게 초등학교를 다닐 수 있었다. 빨간 가방을 울러 매고 아버지가 사준 크레파스는 일부러 손에 들고 다녔다. 

밤에 할머니에게 옛날이야기 듣기를 즐겼던 어린 송자는 글자를 익히면서 역사에 흥미가 생겼고 닥치는 대로 위인전이나 역사책을 읽었다. 책이 귀한 시절이니 가리고 말고 할 것이 있었겠냐 만은 역사책에 유독 구미가 당겼다. 

“어린 마음에도 역사책을 보면 조선시대에도 권력 가진 사람들이 나라를 망하게 하더라고, 인조 임금이 양반 권력자들에 둘러싸여 오랑캐에게 항복했던 것을 보면 분이 나더라니까. 지금이랑 똑같아”

어린 송자의 역사의식은 2022년 72살의 고송자 회장을 관통한다. 

초등학교 4학년 때는 넷째 동생을 낳은 어머니가 농사일에 매달리자 동생 업고 살림과 농사일을 도와야 했다.  “1년을 학교에 안 가다 가기도 어설프더라고. 근디 친구들이 우등상을 받는 것은 부럽대. 서러움에 책상에 엎어져 울었더니 선생님이 우등상을 만들어 주드만. 그때도 한 고집했나 봐”

1960년대 섬마을에서는 흔하디 흔한 일이어서 제 나이에 학교를 가고 졸업하는 일이 특히 여자 아이들에게 쉽지 않았지만 어린 송자의 자존심은 서운함에 앞섰다.  

“공부는 그다지 잘하지는 못했는데, 그래도 내가 야무졌나 봐. 5학년 때 졸업식 송사를 나한테 맡기는 거야. 나는 반장도 아니고 특출 나지도 않았거든.”

고송자 회장의 호소력 짙은 선동력은 ‘될성부른 떡잎’이었을 것이다. 

똑똑하고 잘난 사람을 상대해야 하는 날이면 저녁 내내 베개를 앞에 두고 대거리 연습을 하던 할머니를 떠올리며 선생님이 써준 송사를 연습한 덕에 졸업식장은 눈물바다가 되었다. 

상급학교 진학 길이 막혔던 터라 중학교 의무교육이 이뤄지기 전까지 초등학교 졸업식장은 자기 서러움이 더해 울음바다가 되기 일쑤였는데 송자의 송사가 기름을 부어 버린 것이다. 

다음 해 송자 역시 국민학교 졸업을 끝으로 학업을 이어가지 못하고 다른 집 여자아이들처럼 살림과 농사일에 투입된다. 

“벌어먹고살라고 할머니가 떼준 밭에 보리를 심었는데 엄마만 죽도록 일하고 아버지는 술만 드시니 참 밉더만”

3녀 4남의 장녀였던 어린 송자는 여부자 할머니를 닮지 않은 아버지가 받은 재산을 깎아 먹는 바람에 중학교 진학 앞에 멈춰 서고 말았다. 

이재명 대통령 후보가 “교복 입은 친구들이 부럽기도 하고 작업복 입은 자신이 부끄럽기도 해서 교복 입은 친구들을 피해 숨곤 했다”는 말에 백번 공감한다는 고송자 회장은 교복 친구들을 피해 나무나 담벼락에 숨곤 했다. 여자아이들은 한 반에서 서너 명 밖에 중학교에 진학하지 못하던 시절이었지만 ‘공부 못한’이란 네 글자가 어린 송자의 가슴에 남는다.  

“내가 있어서 베풀 때 잘하는 사람보다 힘들 때 돕는 사람이 진짜 나를 생각하는 사람이다.”는 여부자 할머니의 말은 고송자 회장이 오래도록 기억하는 인간관계의 지혜다. 

무기력한 아버지와 대가족에서 그저 좋은 사람, 순한 사람으로만 살던 엄마의 나약함이 싫었던 어린 송자는 할머니의 길을 택했다. 추진력 강하고 영향력 있는 여부자 같은 삶 말이다.      


하의도에서 무안으로      


송자네 마을에도 국민학교가 생기고 선생님들이 마을에서 살기 시작하면서 하숙 치는 집이 생겨났다. 한 달에 하숙비가 2천 원 할 때, 교사들 월급이 3만 원 하던 시절이었다. 

송자네 온 식구가 매달려 보리타작해봤자 손에 쥐는 것은 3만 원 남짓이고 한해 쌀농사 지어봤자 교사 월급 2달 치도 안 되는 현실을 보면서 어린 송자는 희망을 잃어갔다. 

동생들도 얼추 크고 18살이 되자 뭐라도 배워볼 요량으로 목포로 나와 편물을 배웠다. 1년 만에 졸업장을 들고 먹여주고 재워주는 조건으로 ‘기술이라도 익혀보자’ 싶어 서울로 올라갔다. 6개월 동안 열심히 편물을 밀어댔지만 1960년대 말이니 노동환경은 열악하고 일하는 사람들의 권리는 생각지도 못했던 시절이라 서울살이는 고향 하의도보다 못했다. 

편물을 들고 고향으로 내려온 송자는 집에서 스웨터도 짜고, 이것저것 장사에도 손대며 나락계를 부어 억척같이 돈을 모았다. 이자 몇 푼 더 받아볼 셈으로 사촌 언니 빌려준 목돈은 언니네 부도와 함께 날아가 버렸다. 

이럭저럭 나이가 차 노처녀 소리 듣는 24살이 되니 중매가 들어왔다. 

“신랑이라고 선을 보러 왔는데 새까맣고 쬐깐해서 맘에 차지 않더라고” 

당사자 간의 선을 본 것은 이미 양쪽 집안에서 혼담 성사 말미에 치르는 의식 같은 것이라 큰 애기 송자의 의견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송자 씨 눈이 높은 편이었거나 사진빨이 좋거나... 여튼 선남선녀다.

“내 혼사도 내 맘대로 못하니 부에가 나서 3일간 밥을 안 먹고 나름 저항 했제.” 신랑 자리에게는 육촌 형수이고 송자에게는 사촌인 중매쟁이 언니가 송자를 설득하기 시작했다. ‘신랑이 꼼꼼하고 부지런하니 제 식구들 잘 건사할 것’이라는 사촌언니 말에 마음이 돌아섰다. 

“우리 아버지가 워낙 생활력이 없다 보니 착실하다는 한마디에 결혼하기로 마음먹어지더구먼” 7남매 장녀 송자 씨와 7형제 장남 흥상 씨는 1974년 결혼식을 올리고 무안군 현경면 수양촌 남편 동네에서 농민의 삶을 시작한다.      


조생종 양파갈아엎다     


지난 1월 말 사나흘 동안 남도 땅에 흐부지게 내렸던 눈 탓에 한 달이나 미뤄진 인터뷰이를 찾아 나선 2022년 2월 23일 해 질 녘 무안 바닷바람은 드셌다. 평택과 예산, 김제에서 내려온 성자, 영숙, 미영 언니와 만나 고송자 회장 집에 찾아드니 농촌 마을은 이미 사위가 어둑하다. 

무안군 현경면 수양촌 끄트머리라 찾아오기 어렵다며, 고향 마을에서 농사짓는 둘째 아들을 헷갈릴법한 길목에 세워둔 덕에 어둑한 논둑, 밭둑을 휘감아 막다른 길에 떡하니 자리 잡은 고송자 회장 집에 닿을 수 있었다. 

조생종 양파 정부 수매를 요구하며 양파생산자협회가 주최한 농민집회에 참여하고 고흥에서 출발한 고 회장 일정이 늦어지면서 일행은 마을 앞 바닷가를 서성이다 남도밥상으로 저녁을 먹고 나서야 막 집에 도착했다는 말에 부리나케 집으로 들이닥쳤다. 

양파 가격 폭락은 이미 지난해부터 예고됐었다. 코로나19 여파로 양파 소비가 줄어들기도 했지만 지난 2년 동안 정부가 소비자 물가를 잡겠다며 물량조정을 하지 않아 조생종 양파는 출하 전에 폐기되는 운명을 맞아야 했다. “고흥도 양파 농사를 많이 짓는디 무안보다 남쪽이니 조생종이 제일 먼저 나와. 그걸 갈아엎어 버렸제” 전국에서 모인 양파농가 200여 명이 고흥에 모여 ‘저장 양파 정부가 다 사들이라’는 농민집회를 열었던 모양이다. 30년 전이나 지금이나 ‘불안정한 농산물 가격’은 자본주의 체제에서는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이지 싶다. 무한경쟁과 무한 자본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기간산업으로서 농업이 우뚝 서야 함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다 지은 농산물을 갈아엎어야 하는 야만의 시대를 살아야 하니 옆에서 보는 이의 입맛도 쓰다.  

사랑방의 오랜 창문과 덧댄 창호엔 구수함이 배어 나온다

지난 2월 초 허리디스크 수술 후 집에서 정양 중이던 남편에게 최대한 피해를 주지 않으려 했지만 일정이 틀어지면서 졸지에 불청객 신세다.   

“어쩐디야? 우리 아저씨 저녁밥 차려줘야 쓰것는디...”

우리는 밥을 먹었으니 염려 마시고 함께 저녁 식사하시라 하고 방금 불을 넣어 보일러 호스 따라 따뜻해지기 시작한 사랑방에서 고송자 회장의 흔적을 살피기 시작했다. 

서랍 곳곳에서 이 집안사람들의 깊숙한 기록물들이 우리 손에 딸려 나온다. 50년 전 산수, 국어 공책과 반듯한 글씨까지... 

50년 전 노트를 펼치니 나무 탄내와 꾸릿한 메주 냄새 가득한 여부자 할머니 집 사랑방인 듯 온몸이 아련하다.    

  

저 야무진 여자는 누굴까?

     

1984년 한마을 사는 진우 삼촌이 “형수님 좋은 교육 있는데 안 가볼라요?”라는 이야기에 끌려 해남읍교회에서 열린 기독교농민회 주관 농민교육에 참석했다. 전두환 정권 시절이니 교육이나 활동은 비공식적으로 진행되던 때였다. “드러내고 하는 행사 같지는 않드만. 소 키우던 양반이 동생이 검사인데도 소싸움 했던 이야기가 귀에 박히더라고. 그리고 우리 옆 동네 여자라는데 교육을 하더라고. 농지세 투쟁 이야기인 것 같았는데. 여자가 야무지고 똑똑하대” 사거리 신촌마을 사는 이정옥 씨와 첫 만남 이야기다. 

같은 면 단위에 살아도 여자들 간의 교류가 거의 없었던 터라 후에 여성농민운동가로 성장하는 이정옥, 고송자의 만남은 무안이 아닌 뜻밖의 해남이었다. 

집으로 돌아와서도 여자가 얼마나 똑똑하면 다른 사람들 앞에서 교육할까 싶어 궁금증이 더해졌다. 

배종렬, 최병상, 이정옥 등 지역에서 신망 있는 농민운동가들은 여성농민 고송자의 우상이 되었다. 농민회 집회나, 교육에 참석하며 그간 몸으로 느껴왔던 농업문제의 불합리성을 알게 되었고, 여성농민들은 농촌에서 없어서는 안 될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그림자 취급하는 것 같아 맞지 않는 옷을 걸친 것처럼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첫 승리    

 

1989년 중학교에 진학한 아이들 광주에 방 얻어 줄 요량으로 욕심껏 심은 고추 가격이 시장에서 200원까지 떨어지자 송자 씨의 한숨도 짙어졌다. 겨우내 하우스 문을 열었다 닫았다 하며 키워낸 고추 모종에 한 개라도 더 따 보겠다고 비닐 터널까지 씌웠는데 생산비는커녕 600g 1근에 100원, 200원까지 떨어지니, 사겠다는 상인도 없었다. 말 그대로 고춧값이 똥값이다. 

농촌 분위기가 심상치 않자 정부가 2,000원에 수매를 약속했지만 지켜지지 않았다. 한여름 뙤약볕을 온전히 받아내며 따고 말려 좋은 것만 가려낸 고추를 내다 버리게 되었으니 여기저기서 복장 터지는 소리가 하늘을 찔렀다. 

“하루는 이웃 아줌마가 이장이 고추를 몰래 떠갖고 어딘가 싣고 가던 디, 아마도 농협에서 이장집 고추만 사주는 것 같다는 거여.”

“그래? 그럼 우리도 고추 폴러 갑시다” 

고송자 회장의 이 한마디가 고추 투쟁의 불씨를 댕긴다. 

“동네 엄마들이 이장은 미리 폴아 먹었응께 빼자고 하등만. 그래서 안된다고 했지. 마을 사람들끼리 갈등이 생기면 힘이 빠질 수 있으니 그런 이야기는 절대 하지 말고 같이 힘을 합쳐 싸우자고 했어”

‘갈라 치기’와 ‘혐오’는 대중운동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고송자 회장은 이미 알고 있었다.  

초가을에 접어든 10월 농촌은 부지깽이도 손을 거들 정도로 바쁜 날들이다. 농협에 고추 팔러 가자고 동네 부녀회에서 큰소리는 탕탕 쳤는데 막상 장날이 다가오니 준비가 막막하다. 의료보험, 수세 투쟁, 양파·마늘 제값 받기 투쟁은 농민회가 주최하면 참여만 했을 뿐 마을 투쟁을 하나부터 열까지 준비하려니 일 가닥이 추려지지 않는다. 마침 대학 졸업하고 집에 와있던 막내 시동생한테 도움을 요청했더니 ‘스스로 해보는 것이 중요하다’며 여성농민 고송자를 북돋웠지만, 더 막막해졌다. 

1988년 10월 25일 수양촌에서 현경 농협으로 고추 데모 간다는 소문이 났던지 경찰이 마을을 들쑤시고 다니자 화가 난 막내 시동생이 “우세(창피) 안 사게 도와줘야 쓰것다”며 성명서, 플래카드와 들고나갈 팻말도 몇 개 만들어줬다. 당시 수양촌에 60여 호가 살았는데 그중 45가구가 참여했다. 대부분 여성농민들이었다. “투쟁에 참여 안 하면 고추 폴아 먹을 생각 말라”고 했더니 한집에서 한 명씩은 나온 셈이다. 행사 준비를 마쳐놓고도 아무래도 내일 사회 볼 사람이 걱정된 고송자 씨는 옆 동네 야무진 여자에게 집회 사회를 부탁했다. 마늘농사가 주력 생산품이었던 이정옥 씨는 마늘 심으려고 놉(일꾼) 십여 명을 얻어 놓은 상태였지만 수양촌 여성농민들이 준비한 첫 고추 투쟁에서 기꺼이 사회를 봐주었다. 전날 시동생의 도움을 받아 쓴 성명서는 한글을 읽을 줄 안다는 이유로 임정심 씨를 무대에 세웠다. 머리띠 두르고 대중 앞에서 생전 처음 읽어보는 것이라 정심 씨의 떨림과 간절함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나한테 한바탕 연설을 하라고 하대. 그래서 우리가 1년 내내 얼마나 고추를 힘들지만 정성스럽게 키웠는데 가격이 똥 금 되고, 정부가 수매한다고 해서 기다렸지만, 또다시 농민들을 속여 고추를 못 팔아먹고 썩힌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놈의 세상 언제나 잘난 놈만 살아야 하고 못난 놈은 죽어야 되냐? 대한민국 국민은 다 똑같고 평등한데, 왜 우리는 이렇게 당하고 살아야 되냐고 소리쳤지” 

어디서 숨어있던 말들이 튀어나오는지 막힘없이 술술 터져 나오는 연설에 수양촌 여자들과 농민들의 박수와 함성이 커진다. 성공적인 데뷔전이었다. 

수양촌 여성농민들은 현경면 농협조합장과 상무를 불러내 “정부가 2,000원에 수매한다고 물량 조사를 해 가서 우리는 정부 믿고 팔지 않았는데 지금까지 아무 말이 없다. 고추를 두고 갈 테니 책임지고 팔아달라”고 집으로 와버렸다. 

다음날 마을 유지라는 사람이 자기 얼굴에 먹칠했다고 부인을 때려 얼굴이 멍들었다는 소문에 송자 씨는 기가 막혔다.  

며칠 후 무안에 22t의 고추수매 물량이 떨어진다. 전국 최고의 배당이었다. 그중 11t이 수양촌으로 배당되었다. 전국 최초의 여성농민 고추 투쟁 승리였다. 

그러나 뒷짐 지고 구경하거나 남편 우세시킨다고 부인을 뚜드려 팬 남자들이 공을 가로채듯 고추 물량 조사위원을 맡았고 부녀회장과 고송자 씨를 끼워 넣어 구색을 맞췄다. 고추 물량 조사와 배당이 시작되자 한 근이라도 더 팔아먹으려고 눈치싸움이 치열했다. 보다 못한 고송자 씨가 “참말로 가관이요. 고추 싸움은 누가 했는데 당신들이 생색을 내요?”라고 호통을 친 뒤 집집이 쟁여(쌓여) 있는 물량을 조사해서 비율(%) 별로 나누자고 제안했다. 남편 우세시킨다고 부인을 때렸던 남자가 한 근이라도 더 팔려고 고추 포대를 쑤석거려 부풀려 보았지만, 저울은 정확했고 꼼수는 들통났다. 

수양촌 첫 고추 투쟁으로 마을에 쟁여있던 고추 1/3을 2,000원에 팔 수 있었다. 

고추 투쟁 후 농협에 고추 팔러 나가보면 확연히 달라진 온도 차를 느낄 수 있었다. 저 여자가 수양촌 고추 투쟁 주동자라고 수군거리고 까다롭게 굴던 검수원들도 고송자 씨네 고추 포대에는 수월하게 1등 도장을 찍었다. “그때부터 우리 동네 여자들이 나를 달리 보기 시작한 것 같아. 여자들이 똘똘 뭉쳐 첫 투쟁 승리하고 고추 제값 받고, 제대로 대접받으니 살맛이 났제”

겨울은 다가오고 그래도 남아있는 고추들은 한숨 거리였다. 가을일도 끝났으니 이제 정부에 남은 고추를 팔아야겠다고 마음먹은 고송자 씨는 수양촌 여성농민들에게 외쳤다. 

“남은 고추들 닦달하씨요. 폴아 묵어야제”     


군청에 고추 폴러 갑시다     


수양촌 여성농민들은 무안군청을 접수하고 고추 전량수매를 요구했다. 사진은 신문에 실린 만평 _ 한국농정신문

“장관이었제. 몸빼에 하얀 수건 둘러 쓴 수양촌 엄마들이 고추 차대기(포대) 잔뜩 실은 경운기 100대에 나눠 타고 달달 거리며 군청까지 가던 행렬이 지금도 눈에 선해”

12월 5일 수양촌에서 고추 싣고 나간다는 소문이 돌자 정보과 경찰들은 마을을 염탐하고 정보를 캐더니 협박과 방해를 해댄다. “고추는 뭣 하러 저울에 단다요? 누가 사준다요. 뭔 쓰잘데기 없는 짓을 한다요”라며 마을 사람들 마음을 헤집어 놓았지만 투쟁과 승리를 경험한 수양촌 여성농민들은 “글먼 아자씨들이 내 고추 사줄라요? 아자씨들 월급 맹키로 저 고추가 우리들에게는 월급이란 말이요”라며 경찰과 대거리를 했다. 경찰 앞에서는 큰소리쳤지만, 속으로는 떨려서 죽는 줄 알았다고 고송자 씨에게 무용담을 들려주는 이들도 있었다.  

현경 농협 조합장은 "수양촌 고추는 1,500원에 사줄 테니 제발 고추 싣고 나가지 말라"며 사정했다. 

“우리는 농협에 안 폰다고 했어. 농협에서 우리 마을만 고추를 사줬네 하면 농민들끼리 갈라지고, 결국 농협 돈 풀어 고추 사주면 그 손해가 고스란히 농민들한테 돌아오니 우리는 정부에 폴아야 겠다고 했지.” 정부가 2,000원에 수매한다고 했는데 굳이 농협에 손해 갈 일을 하지 말자는 것이 고송자 씨와 수양촌 여성농민들의 생각이었다. 

현경 면장까지 쫓아와 “내 혀가 타들어 가는 것 안 보이요? 제발 군으로 가지 말고 농협에서 판매 봅시다”라고 사정했지만 ‘정부에 2,000원에 판다’는 입장은 더욱 또렷해졌다. 

고추는 풍년이고 가격은 똥값이라 고춧대에서 그대로 말라버린 고추들이 밭에 그대로 있었지만 힘들게 지은 농산물을 밭에서 썩게 둘 수 없었던 고송자 씨는 고추를 몽땅 따서 동네 고추건조기에 넣고 말렸다.  

“그랬더니 동네 사람들이 고송자가 고추를 따는 것을 봉께 뭔 수가 있는가 보다 함시롱 자기들도 고추를 따고 말리더라고”

수양촌에 사는 청년 농민운동가 박진우 씨가 맨 앞에서 경운기 대열을 이끌고 20근씩 묶은 고추 포대를 실은 경운기가 수양촌을 나서자 농민운동가들이 사는 몇 개 마을에서 합류한 경운기까지 100여 대가 줄을 이었다. 현경면에서 무안군청으로 이어진 행렬은 마을을 지날 때마다 “고추 데모하러 갑시다. 언능 오씨요”라며 신나게 외쳤다. 

일이 되려는지 군청 문은 활짝 열려 있었고 군청 앞마당에 경운기를 세운 농민들은 이정옥 씨의 사회로 고추 데모를 시작했다.

수양촌 데모의 주동자인 고송자 씨가 마이크를 잡았다. 가슴이 벌렁거리고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감도 안 잡혔지만 일단 마이크를 손에 쥐니 '생각이 말이 되어' 술술 나온다.

꾸물꾸물하던 하늘에서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앞뒤 가릴 것 없이 고추 포대를 군청 안으로 들여놓았다. 하늘이 도와 자연스럽게 고추 농성장이 꾸려졌다.  

“추우니까 우리 동네 엄마들이 군청 어느 사무실로 밀고 들어갔어. 나중에 보니 재무과더라고” “오메, 눈 맞으면 고추 베려버린당께”라며 밀고 들어간 50여 명의 수양촌 엄마들이나 떠밀려 나간 군청 직원들이나 경황이 없었던 터라 딱히 계획하지도 않았던 농성장이 군청 안에 마련되었다. 뒤늦게 상황의 심각성을 인식한 무안군은 전기를 끊었지만 집에 가서 내복과 옷, 덮을 것들을 챙겨 와 단단히 채비했다. 

“경찰 서장이 재무과에서 농성하는 우리한테 와서 지휘봉을 까딱까딱 하면서 아줌마들 잡아가둘라니까 집에 가라고 협박을 하더라고. 하는 짓이 꼭 역사책에서 본 일본 순사 같았지”

경찰서장의 협박하는 폼이 일본 순사 같아서 웃음이 난 고송자 씨가 “테레비 보면 일본 순사가 우리 독립운동가 잡아가고 농민들에게 큰소리 쾅쾅 치던데, 인자 봉께 서장이 영락없이 일본 순사 놈 같네”라고 하니 수양촌 엄마들의 웃음이 와르르 터진다. 얼굴이 벌게진 서장은 지휘봉을 뒤로 감춘 채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화덕을 들인다, 김장김치를 나른다, 된장국을 끓인다’ 하며 군청 마당에 솥단지를 걸고 식당까지 뚝딱 만들어 먹고, 자며 농성을 하니, 3일째 되던 날 정부의 전량 수매 지침이 내려왔다.  

소문은 무안군에 빠르게 퍼져 고추 포대를 실은 경운기들이 물밀듯이 군청으로 향했다. 이미 군청은 수양촌과 농민회원들 고추로 가득 찼던 터라 뒤늦게 합류한 고추 포대들은 근처 농협군지부, 교육청 앞마당으로 배치했다. 투쟁의 물꼬를 튼 고추농가부터 수매 보는 것을 원칙으로 했다. 

정부의 수매지시는 떨어졌으나 어디서, 어떻게, 수매할 것인지로 의견이 맞섰다. 무안군은 농협으로 옮겨서 수매하겠다고 하고 수양촌 농민들과 무안농민회는 고추를 옮기면서 포대들이 섞여 본인 것을 찾을 수 없으니 가져올 때 수량 체크한 것으로 수매할 것을 요구했다.

“검사원 이리로 오라고 해라. 검사원이 누구냐, 우리가 세금 내서 월급 준 놈이고 우리 농민 없으면 검사원이 무슨 필요가 있냐, 우리는 절대 고추를 못 가지고 간다고 버텼지”

실랑이가 끝이 없자 경찰이 백골단을 투입한다. 정부가 수매한다고 하니까 밥하러 간다고 집에 간 사람도 있었고 남자들은 죄다 바깥에 있던 상황에서 백골단이 쳐들어오니 수양촌 여자들은 가슴이 벌렁거렸다. 고송자 씨와 마을 여성들이 다치고 동네 아저씨가 경찰 방패에 맞아 피를 흘리니 “저놈들이 광주에서 저렇게 사람들 죽였구만”이라며 “오메오메 사람 죽이네. 오냐 나 죽여라”며 달겨들기 시작했고 젊은 농민회원들이 유리창을 깨고 들어와 백골단과 격렬하게 대치했다. 기세에 눌린 경찰은 움찔움찔 물러났고 여기저기 부상자가 나왔다. 

아침이 되자 수양촌 여성농민들은 경찰서장실로 쳐들어가 경찰서장 책상을 주먹으로 치며 “우리가 농사지은 것 느그들이 사줄 거냐? 경찰이 자궁을 차서 죽게 생겼다.”며 거칠게 항의하자 결국 경찰은 치료비와 보상을 약속했다. 다친 사람들은 병원으로 가고 국회의원도 내려오고, 언론도 타니 무안군은 농민들 요구대로 군청 마당에서 고추수매를 시작했다. 고추 싣고 나간 지 5일 만에 수양촌 농민들은 고추를 모두 팔고 집으로 돌아오고 14일까지 합류한 고추들은 농민회 주관으로 정부와 수매를 이어갔다. 

14일 이후 후발대로 들어온 농민들은 이장단협의회가 주도해서 수매를 보기로 했으나 경찰과 협상 후 대책위원장이 도망가버려 지휘체계가 무너졌다. 낮에는 꽹과리 치고 집회를 하다가 오후에는 사람들이 없어지더니 술 마시고 싸움이 잦자 농협은 농민회에 마지막 수매까지 맡아달라며 도움을 요청했다. 그 후 10여 일 동안 수매가 더 진행되었다.  

    

고추 투쟁, 전국으로 번지다     


1988년 고추값 똥값과 고추 투쟁은 단순히 고추가 풍년 이어서만은 아니었다. 정부가 잎담배 수입을 시작하면서 농촌지도소에서 잎담배 농가에 고추를 심으라고 교육하고 권장했다. 공급과 수요를 조정해야 하는 정부가 오히려 과잉 공급 여건을 만들었고 피해는 고스란히 농민들에게 떠넘겨진 것을 무안군 현경면 수양촌 여성농민들이 죽기 살기로 막아선 것이다. 

수양촌 고추 투쟁은 전라남도를 넘어 전국으로 번졌고 1989년 2월 13일 수세 폐지와 고추 전량 수매를 위한 전국농민대회로 이어졌다. 일제 강점기 대표적인 농민 수탈의 상징이었던 수세 폐지 투쟁과 고추 투쟁이 전국화 되면서 전국에서 2만 5천여 명의 농민들이 여의도에 모여 대규모 집회를 열었다. 가톨릭농민회와 기독교농민회에서 자주적 농민회로 조직적 진화를 이뤄가던 농민운동은 2.13 여의도 집회로 전국에서 농민운동가들이 연행·구속되며 탄압도 받았지만 농업·농민문제가 전면에 떠오르면서 전국 농민조직과 여성농민조직 강화에 박차를 가하는 계기가 되었다.  

무안 고추 투쟁이 막바지를 향하고 있던 12월 말 사고가 터졌다. 고추 집회에 참여하려 오던 농민이 교통사고로 사망했고 농민회가 농민장을 치르겠다고 하자 시신 탈취를 위해 경찰은 12월 27일 또다시 백골단을 투입한다. 집회 사회를 맡았던 이정옥 씨와 남편 김용주 씨를 비롯한 농민회원 22명이 연행되었다. 무안 고추 투쟁이 전국화 될 것을 우려한 경찰은 무안 인근 지역인 목포, 광주 지구대의 협조를 받아 대대적으로 투쟁을 막았고 22명의 무안 농민들은 무안경찰서가 아닌 광주 서부경찰서로 연행되어 조사를 받았다. 이정옥 씨도 이때 연행되었고 무안군 농민회의 타격도 컸다.  

고추 1근에 2,000원씩 팔았으니 200원씩 떼어 농민회 사무실 마련 기금으로 사용하자는 고송자 씨의 제안에 기금이 마련되었고 농민회 사무실을 마련했다. 다른 지역은 면단위에 농민회 사무실을 내기도 했다.       


여성농민대표 고송자  

    

고추 투쟁의 기세를 몰아 1989년 1월 24일 ‘무안여성농민회준비위원회’를 결성한데 이어 2월 1일 무안 ‘현경면 여성농민회’를 창립했다. 의료보험 투쟁, 수세 투쟁, 마늘·고추 제값 받기 투쟁을 연이어 승리하고 나니, 농민들도 뭉치면 사람대접받을 수 있다는 희망이 솟았다. 고추 투쟁에서 보여줬던 수양촌 여성농민들의 조직력은 무안군 여성농민회를 만드는 자양분이 됐다. 현장 여성농민의 리더십으로 투쟁을 경험하고 조직을 만들어가는 무안의 사례는 여성농민 독자 조직화를 고민하던 다른 지역에 좋은 사례가 되었고 열망도 커졌다. 

고송자 씨가 초대회장을 맡은 무안여성농민회준비위원회는 경찰의 방해 공작을 따돌리며 무안군청을 빌려 1989년 12월 5일 ‘고추 투쟁 1주기 기념대회’를 꽹과리와 북을 치며 성대히 치렀다. 1989년 12월 18일 출범한 전국여성농민위원회(이하 전여농) 초대회장에 같은 지역 여성농민운동가 이정옥 씨가 선출되었다. 

1991년 3월 9일 전남대 대강당에서 370여 명의 전남지역 여성농민들이 참가한 가운데 전남여성농민회(이하 전남여농)가 출범했고 고송자 씨는 1992년 3월 13일 해제면 용학교회에서 열린 무안군 여성농민회 창립식에서 초대회장으로 선출된다. 이후 1994년 전국여성농민회 전남연합회 회장을 맡아 2년간 전남 여성농민운동을 이끌었다. 

‘공부가 짧아 어떻게 하겠냐’며 고송자 회장은 극구 사양했지만, 누구보다 농촌 현실을 뼛속 깊이 알고 대중에게 쉽게 전달하는 탁월한 선동 능력은 전국 최고였기에 여성농민 대표 자리에 적임자임은 재론의 여지가 없었다. 

누가 대신 일을 해주는 것도, 월급이 나오는 자리도 아니었지만 농업정책에서 여성농민의 목소리가 빠지면 하나 마나 한 정책이 될 것이 뻔하니 고송자 회장은 ‘주경야농’하듯 밝을 때는 논밭에서 일하고 밤에는 여성농민운동 밭을 갈았다. 

농촌지역의 가부장성을 뚫고 세상밖으로 나온 여성농민들의 리더십은 거침없고 당당했다

1997년 전국여성농민회총연합 4대 회장에 선출된 고송자 회장은 더 바삐 움직여야 했다. 여성농민의 이해와 요구를 대변해야 하는 자리니 집회는 물론이고 토론회 자리도 불려 나갔다. 

“처음에는 교수와 연구자 등 전문가들과 토론을 하려니 쫄리더라구. 근디 딱 들어보니 책상머리에서 농촌을 들여다본 것이 느껴지등만, 그래서 나는 어려운 말은 모르것고 농촌 현실에 기반해서 이야기를 했더니 먹히데” 

현장만 한 학교가 있을까? 현장만큼 든든한 뒷배가 있을까? 당자자만큼 절실할 수 있을까? 고송자 회장은 ‘당사자 신분’을 십분 발휘하며 정책간담회에서는 현장의 논리로, 투쟁현장에서는 거침없는 불도저 같은 선동으로 저력을 발휘했다. 

농가부채대책위원회 회의에서 전문가들이 정책대출에 대해 이야기만 할 때 일반대출에 대한 대책이 시급하다는 이야기는 전여농과 전농 회장에게서만 나왔다. 당시 전체 농가의 80% 이상이 일반대출이고 10~20%가 정책대출이었다. “전문가들이 자꾸 정책대출 해결방안만 이야기해서 내가 농촌 현실을 이야기했더니 농경 국장이 고 회장님 대체 대출이 얼마나 있냐고 하등만. 그래서 나는 빚 없고 부자로 산다고 해버렸지. 부에가 나서”

화가 날 만하다. 여성농민 대표로 정책토론을 하는데 개인 빚 탕감이나 하자고 토론한다는 발상 자체가 괘씸하다. 중국산 수입마늘 문제로 농림부에 들어간 적이 있는데, 고송자 회장이 한 소리 하니 계장이 “아주머니, 마늘 얼마나 있어요. 내가 다 사줄게” 하더란다. 여성농민 대표를 대하는 정부 관료들의 현주소였다.     


악착쟁이    

 

2000년 중국산 수입마늘로 국산 마늘 가격이 폭락하자 전여농과 전농 등 농민단체는 농민집회와 토론을 통해 마늘에 세이프가드 발동을 요청했고 정부는 중국 수입마늘 관세를 30%에서 315%로 올려 국내산 수입마늘 가격 폭락을 막았다. 그랬더니 중국이 핸드폰과 폴리에틸렌 수입을 규제하는 보복에 나서 당시 야당이었던 한나라당은 소탐대실했다고 농민단체와 정부를 연일 공격해댔다. 결국 김대중 정부가 세이프가드를 철회하고 정부가 국내산 마늘을 수매하는 것으로 일단락되었던 것을 두고 농민들 때문에 나라가 망한 것처럼 언론과 야당이 여론을 호도했다. 

“한 번은 수입마늘 반대 집회가 서울에서 열려 무안에서도 관광차 40대가 올라갔는데 열심히 농민들을 까대던 박희태 한나라당 국회의원이 마이크를 잡는 걸 보고는 무대로 뛰어 올라가 냅다 마이크를 잡아채서 발언을 막아버렸어” 고송자 회장은 농민들이 마늘 팔아먹으려고 나라 팔아먹은 것처럼 호도하고 소탐대실 운운하더니 감히 농민대회에서 마이크를 잡게 한다는 것이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았다. 대중들 사이에서 박수가 터져 나왔다. “그때 누군가 그러데,  에그 저 악착쟁이. 내가 악착 내기는 했제”

“전여농 회장 인께 농림부 장관이나 차관 혼도 내고 해봤지, 개인이면 가능했겠어?” 고송자 회장은 전여농의 정치력이 정치권에 가닿을 자리라면 논과 밭을 박차고 달려갔다. 

김대중 정부 시절 농림부에 여성정책담당관실이 생기면서 여성농민을 대표해서 김대중 대통령과 만난 자리에서도 거침없는 직설화법으로 농촌 현실을 직언했다. 

“값싼 중국산 수입농산물에 밀려 콩, 깨 농사를 하지 않니 밭이 놀게 된다. 논 직불제처럼 밭 직불제가 있어야 한다”고 건의했더니 김대중 대통령은 그 자리에서 당시 김영진 해양농수산부 장관을 불러 검토를 지시하기도 했다. 밭 직불금은 2012년 시작해 2015년 전제 밭작물로 확대됐다. 

“대통령님 1988년 고추를 2,000원에 수매했는데 2000년인 지금도 고추 한 근에 2,000원 합니다. 고추수매 가격이 10년 전 그대로라고 하니 김대중 대통령도 놀랐는지 바로 장관한테 지시해서 시세와 물가를 고려해서 수매 가격을 조정하라고 하더라고. 그래서 그때 6,000원이 되얐는디 문제는 지금도 고추수매 가격이 6,000원이라는 것이여. 농민들이 요구하지 않으면 절대로 그냥 바뀌는 법이 없당께” 고송자 회장은 농민운동의 힘이 더욱 세져야 농업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믿는다. 

열심히 일한 덕분(?)에 2년 임기를 채우고도 연임하게 된 고송자 회장은 1997년부터 2001년까지 총 4년간 전여농을 이끌었다.  

    

이장 고송자

     

수양촌 마을의 여성리더들

1988년 고추 투쟁 이후 고송자 회장은 다시 태어난 사람처럼 살았다. “농협에 농산물 판매 보러 가면 사람들이 수군대. 수양촌 부녀회장이디야? 누구 각시당가?” 농촌에서 여성의 이름을 기억하는 일은 거의 없다. 그 큰일을 해버렸으니 저 야무진 각시가 누군지 궁금했을 것이다. “나는 부녀회장도 아니고 남편도 당시 이름난 사람이 아니어서 나중에 흥상이 각시라고만 소문났지” 1989년부터 무안, 전남 여성농민회를 거쳐 1997~2001년까지 전여농 회장까지 마치고 마을로 돌아온 고송자 회장은 2003년 마을 이장에 선출된다. 

고송자 이장은 마을 회의를 거쳐 임원 전체를 여성으로 바꾼다. 부녀회장 외에는 남자들의 전유물이었던 개발위원장, 새마을지도자, 반장 등을 수양촌 여성농민 6명이 맡으면서 수양촌은 친환경, 정보화 마을로 거듭난다. 퇴비증산차를 구입해 노인들이 많은 주민들의 농업소득에 기여하고 재활용품 수거사업으로 마을기금을 만들었다. 마을공원을 조성하고 마을 펜션을 만들어 고향 사람들에게 쉼터를 제공했다. 펜션으로 인연이 된 도시 소비자와 튼 고향 농산물 직거래사업은 지금까지도 마을 주민 소득에 기여하고 있다. 여성 임원들의 파워는 전국으로 소문나 신문방송을 탔다. 전국 최초 마을 임원을 여성으로 채울 수 있었던 것은 1988년 고추 투쟁 당시 보여준 여성들의 리더십과 단결력을 경험한 마을 주민들의 신뢰였다.  

3년의 이장 임기를 마치자 2006년 민주노동당 도의원 비례대표 제안이 들어온다.      


정치인 고송자     


2002년 민주노동당 전라남도 비례대표는 노동자 출신 전종덕 의원이었다. 나주시 학교급식 조례를 처음 만든 전종덕 의원에 이은 2006년 두 번째 비례대표 후보는 여성과 농민으로 압축됐다. 마을 일부터 군, 도, 전국단위 활동을 경험한 고송자 회장이 적임자라고 여긴 당과 전여농은 고송자 회장을 설득했다. 선거철이 되자 마을 이장이 열린우리당 비례대표로 추천한다고 해서 펄쩍 뛴 일이 있는데 실제로 진보당인 민주노동당에서 제안이 오니 당황스러웠다. 

“공부를 못해서”라는 고송자 회장의 레퍼토리는 가족들의 지원사격에 묻혔다. 남편은 1대 민주노동당 비례대표인 전종덕 의원이 출마했을 때도 찍었으니 이미 고송자 회장의 든든한 후원자였다. 두 아들은 학력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농촌을 잘 아는 사람이 농민을 대변해야 하는데 농업 문제에 박사인 엄마가 최고의 실력자라며 응원을 아끼지 않았다.

가족과 전여농 조직의 응원을 받으며 민주노동당 도의원 비례대표로 출마한 고송자 회장은 비례대표 첫 TV토론에서 우려와는 달리 박사와 교수 출신 열린우리당, 민주당 여성 비례대표들과의 토론에서도 밀리지 않고 현장 농민의 뚝심을 발휘했다. “어려운 말은 모르겠고 알아들을 수 있는 말로 토론하자고 해버렸어. 준비해 간 자료도 필요 없고 농촌 현장 이야기를 했더니 사람들이 잘했다고 하더라고” 

농촌에서 농사짓는 ‘여성농민운동가’라는 경력은 정치인 고송자의 든든한 이력이었다.      


정치판에서 여성농민운동 했제     


“도의원이 되고 내가 아는 것은 농업문제니까 나는 무조건 농림수산위원회에 넣어 주라고 했어.” 임기 2년의 상임위를 배정하고 위원장을 뽑는데도 돈과 로비가 오가는 혼탁함을 경험한다. 고송자 의원에게도 머플러에 돈을 끼워 넣은 선물상자가 배달됐다. “돈을 발견하자마자 전화해서 거기서 있으라고 했제” 찾아가서 “어렵게 선거 치러서 여기까지 올라와서 이런 짓을 하냐?”며 “내가 나이가 들어서 이 정도에서 마무리할라니까 다시는 이런 짓 하지 말고 정정당당하게 정치하라”고 호통을 쳤다. 돈을 건넨 도의원은 그날 밤 잠을 한숨도 못 잤다고 후에 고 의원에게 고백했지만, 그 후로도 로비 정황은 끊이지 않았다. 

“나는 이런 돈 안 받고도 의정활동하면서 먹고살 수 있다며 돌려주곤 했더니 돈으로 안 되는 사람인 줄 알고 오히려 나한테 잘하더라고” 

2008년 쇠고기 수입에 대한 재협상을 요구하며 전남도의원들과 삭발투쟁과 농성을 벌였다. _ 사진 데일리안

고 의원의 고민은 2년에 한 번씩 바뀌는 상임위에서 농림수산위원을 고수하는 것이었다. 정치인 고 의원의 임무가 농업, 농민, 여성정책을 잘 만들어 내는 것이니 다른 상임위는 관심 밖이었다. 농민과 여성농민조직이 고 의원의 든든한 뒷배였다. 

남성 의원들 일색인 도의회는 민주당 일색이기도 했다. 민주노동당 비례대표 여성농민 고송자 의원은 농업과 여성농민 정책에 있어서는 물불 안 가렸다. 

“2006년 쌀 파동 당시 전남 도의원 51명이 국회를 방문해 박희태 사무총장 면담을 하는데 박희태 총장이 한마디 하니까 다 물러서 버리는 거야. 그래서 내가 농촌 현실을 이야기하면서 대들어서 이겨 먹었어. 그랬더니 우리는 고의원 1명만도 못하다면서 자기들끼리도 쓴웃음을 웃더라고” 

직능과 지역을 대표하라고 보낸 일꾼들이 정치적 이해관계를 두고 거래하는 것을 보고 느끼면서 고의원은 “나라도 잘해야겠다”는 다짐을 한다.  

‘여성농민 조례’와 ‘학교급식조례’ 등  농업·여성농민 정책을 만들기 시작했다. 

의정활동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은 ‘벼경영안전비’를 200억에서 500억 원으로 늘린 일이다. 8일간 단식농성 끝에 병원에 실려가기도 했다. 힘들게 만들어 놓은 예산을 자치단체장들이 생색내기용으로 사용하기 일쑤여서 전라남도는 농민들 통장으로 따박따박 들어갈 수 있게 해 두었다. 예산 증액을 위해 본회의장에서 싸우는 모습이 지역방송을 탔는지 의정활동 보고를 위해 마을을 돌면 어른들이 “고의원 뭣 땀시 그렇게 싸웠어”라고 물을 정도로 본회의장에서의 투쟁은 고의원의 상징이었다.

“지금도 통장에 벼경영안전자금이 들어오면 그렇게 든든해”     


오직 농민오직 농촌     


섬 주민들은 생활용품을 비싸게 사서 쓴다. 생활필수품을 육지 사람들과 같은 가격에 살 수 있도록 지원제도가 있는데 이 제도가 악용되고 있는 점을 발견한 고의원은 생필품 지원금 조사에 들어간다. 한 통에 5천 원씩 지원하는 가스 물류비 지원금이 가스 사업자들에게로 흘러가고 있었다. 주로 노령층이 사는 섬마을에서 할머니들이 가스 1통을 사면 몇 달을 사용하는데 넘겨받은 자료에는 한 명이 한 달에 2~3통 사용한 것으로 집계되었다. 게다가 가스 차 한 대에 주는 보조금까지 합치니 꽤 큰 금액이 새고 있었다. 신안군에 자료를 요청하고 친정동네 면사무소에서 받은 자료를 검토해 보니 더 기가 막혔다. 섬마을 할머니들한테 돌아가야 할 지원금 빼먹기가 섬마을 출신 고 의원에게 딱 걸린 것이다.  

“첫날 등원하니까 명패를 주는데 죄다 한자 투성이인 거여. 나는 한글로 바꿔 달라고 했지. 내 나라 도의회에서 한글 명패를 안 쓰는 것이 이상하지 않은가?” 고의원의 한글 명패는 나비효과라도 되는 듯 전남도의회 명패를 한글로 바꿔버렸다. "고령의 농민들이, 한자 세대가 아닌 젊은 지역주민들이 민원 때문에 고 의원을 만나러 왔는데 이리저리 헤매게 할 수 없다"는 게 고의원의 생각이었다.

“영암 F1 사업을 못 막은 것은 지금도 아쉬워” 농사지어야 할 땅을 매입해서 국제 자동차 경주장을 짓겠다는 발상 자체에 동의할 수 없었던 고의원은 민주당 일색 도의원들 대다수가 찬성하는 사업을 혼자 반대했다. 이후에 민주당 의원들도 고의원의 주장에 합류했지만 투표 결과 5표 차이로 지면서 영암 F1 사업은 추진됐다. “영암 F1 사업을 추진했던 사람들이 내 사무실에 와서 항의하고 난리도 아니었어. 왜 영암 발전을 막냐고. 지금 F1 사업은 적자투성이잖아. 농사지을 땅을 사행성 가득한 사업부지로 둔갑시켰으니 그 일은 애초부터 될 일이 아니었제. 4,300억 들여서 지었는데 지금도 1,000억이 넘는 적자에 세금 먹는 애물단지여”

정치인 고송자와 여성농민 고송자는 다르지 않았다.

2010년 지역구 선거에 나선 고의원은 지역을 훑었다. 농민과 어려운 사람을 위해 일할 사람은 고 의원뿐이라고 엄지 척하는 주민들은 많았지만 민주당의 벽을 넘기는 힘들었다. 198표 차의 석패였다. “아깝게 졌지만, 정치인 고송자를 지지했던 군민들에게 보답하는 일은 농민운동 열심히 하고 사는 것이라고 생각해”

도의원 하면서도 농사일을 멈출 수 없어 밤새워 일한 적도 있고 농사철에 치러야 하는 지방선거는 폐농을 각오해야 했지만 그래도 고 의원은 해볼 만한 도전이었다고 회고한다. 

“도의원 해봉께 공부 많이 한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얼마나 농민을 위한 사람인가가 중요하더라고” 

단식에, 삭발에, 투쟁에, 도의원으로 살면서도 정치인 고송자의 본질은 뼛속까지 여성농민이다.      


여성농업인센터장 고송자      


2019년부터 무안군여성농업인센터장을 맡고 있다. 지금도 밭농사 2만여 평 넘게 짓고 있는 고송자 센터장은 꼬리뼈 있는 곳에 혹이 나서 2019년 봄 전남대병원에서 수술을 받았다. 밭농사를 전담하는 여성농민들에게 고질병이고 재발을 잘한다고 하니 갑자기 서러움에 눈물이 터져 나왔다. 

다행히 수술은 잘 되었지만 칠십을 바라보는 나이에 더는 밭일에 매달리는 것이 무리였다. 당시 여성농업인센터장 자리가 비어있었고 이정옥 이사 등이 적극적으로 권유해 못 이기는 척 여성농업인센터장을 맡았다. 

“젊었을 때 애기들 델꼬 밭에 일하러 가면 깔따구가 온몸에 붙응께, 리어카에 눕혀놓고 숨도 못 쉬게 싸맨 채 일을 했제. 아이들만 어디 맡길 곳이 있었으면 훨씬 수월했을 것이여” 

여성농민들의 보육과 교육, 문화와 복지활동 지원을 위해 김대중 정부 농림부 여성정책담당관실이 추진한 여성농업인센터는 여성농민들에게 꼭 필요한 시설이라는 생각에 도정보고 차 무안군청에 온 박태영 전남도지사에게 손을 들고 질문과 제안을 동시에 했다. 

“도정 보고에 와보니 모두 남자들 인디 여자인 나도 말 쪼까 해봅시다. 도지사 후보 시절에 제가 여성농민대표로 질문도 했는데 기억하실지 모르것지만 두 가지만 이야기하겠다”라며 말문을 연 고송자 회장은 “목포에 중국 배가 다니면서 고춧가루, 깨 등을 중국 보따리상이 가져다 나르니 여성농민들이 힘들게 농사지은 깨, 고춧가루 가격이 똥값이 돼야부럿습니다. 배를 없애든가 단속을 강화해 달라”고 요청했다. 박 지사는 철저히 조사해 보겠다고 약속했다. 

“무안은 밭농사가 많아서 여성농민들이 겁나게 고생을 하는디 여성농민을 위한 여성농업인센터가 필요합니다.” 고송자 회장의 두 번째 건의에 박태영 도지사는 돌아간 뒤 9억 원의 예산을 무안군에 배정해 무안 여성농업인센터 건립은 고속열차를 탔다. 도정보고 자리에서 말 한자리했다고 정책자금이 배정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여성농민운동가, 정치인 고송자에 대한 신뢰가 아니고서는 설명할 길이 없다.

무안군은 현경면 용정리에 1만여 평의 땅을 사들여 3년여 동안 공사를 거쳐 2006년 무안군 여성농업인센터를 건립했다. 무안 여성농민회가 위탁을 받은 무안여성농업인센터는 연간 9,700만 원의 예산과 일정 비율의 자부담으로 운영됐다. 

“우리 시대에 공부 못한 것은 시대가 어려웠으니 창피한 일이 아닌디 시골 엄마들은 공부 못하고 한글 깨치지 못한 것으로 평생 기죽고 살았응께 한글 교육을 제일 먼저 했어. 80~90대 할머니들 24명이 주 2~3회씩 와서 공부를 했제” 한글 교실반 학생들이 시와 그림을 곁들여 ‘이젠 하나도 무섭지 않아. 글을 읽을 줄 아니까’라는 제목으로 엮어 책을 내기도 했다. 

고 센터장은 전여농 회장 시절 집회에서 연설해야 할 때 농산물 수입개방과 관련한 영문들에 막혔다. 영어를 접할 길도 공부할 시간도 없었던 터라 매번 실무자에게 한글로 써 달라고 부탁해야 했다. 어느 회장님은 실무자들이 써준 연설문을 읽다가 (FTA)를 ‘괄호 열고 에프티에이 괄호 닫고’로 읽어 실무자는 당황하고 대중들에게는 큰 웃음을 주는 해프닝이 벌어지기도 했다. 한글도 깨치기 어려운 시대를 살았으니 영어 알파벳은 먼 나라 말일뿐이었다. 고 센터장도 센터 영어반에서 알파벳 대문자까지는 어찌어찌 뗐는데 소문자에 들어가니 첩첩산중을 만난 느낌이란다.

장구교실, 요가교실, 줌바댄스, 스마트폰 교실과 뜨개질 등 취미교실 등을 운영하던 중 코로나19를 맞이하면서 수업이 전면 중단되었다.  

고송자 센터장은 무안여성농업인센터 애용자이기도 하다

“남편이 스마트폰 활용을 잘못해. 긍께 같이 댕기 잔께 안 다니드만 이런 것도 못하요? 라면서 내가 놀려먹지”

여성농업인들의 능력과 권익향상을 위한 여성농업인센터가 할 일이 많기는 한데 현실적인 한계도 분명하다고 고 센터장은 지적한다. 

농업 관련 교육을 하려고 해도 농사짓는 여성농민들 참여가 어렵다. 농사를 많이 짓는 사람들은 늦도록 들에서 일하다 보니 저녁 시간에 개설한 교육 참여조차 어렵고 힘들게 오더라도 피곤해서 졸기 일쑤다. 

초창기 여성농업인센터의 주요 기능이었던 보육프로그램도 농촌지역 인구감소로 아이들 모집이 어렵다 보니 정부에 건의해 주요 사업에서 빼야 했다. 

건립한 지 6~7년이 되니 여기저기 보수할 곳도 생긴다. 올해는 코로나가 웬만해질 것 같으니 ‘여성농민에 의한, 여성농민을 위한, 여성농민의’ 공간과 사업이 될 수 있도록 더 뛰어볼 생각이다.      


세상을 바꾼 여성농민운동     


72세의 고송자 회장은 평생 제일 잘한 일로 여성농민운동을 꼽는다. 

“우리가 세상을 많이 바꿨어. 의료보험 투쟁도 공무원들은 50%를 정부가 보조해주고 농민은 25%만 해준다니 얼마나 부에가 나. 그때 이정옥, 정수기랑 마을 엄마들 한티 의료보험증 가지고 의료조합으로 오라고 해서 한 명씩 반납하는 퍼포먼스를 하는데 속이 다 시원하더라고” 결국 의료보험 투쟁도 농민들에게 정부 보조금 50%가 적용되면서 농민투쟁이 승리했다. 

“1984년인가 마늘값 보상 대회한다고 무안군청 앞에 데모 구경 갔다가 처음 최루탄을 맞고 정신 못 차린 기억에 그 후에 어느 집회를 가도 최루탄만 쏘면 제일 먼저 냅다 도망갔더니 고송자 보라고 웃고 난리더만. 지랄탄은 왜 그렇게 지랄 맞게 사람을 쫓아오던지, 걸음아 나 살려라고 하고 도망 댕겼지”

삼십 대 후반이던 여성농민 고송자에게 해남읍교회 농민교육은 오늘의 고송자 회장을 있게 했다. 

의료보험뿐인가? 일본 잔재 수세도 없앴고, 쌀·밭직불제도 다 농민들이 싸워서 이뤄낸 성과들이다. “돌아보니 말하는 대로 된 것이 많아. 통장에 착착 꽂히는 돈들이 다 농민들이 싸워서 이뤄낸 것이지 거저가 어딨어? 그래서 나는 여성농민운동이 세상을 바꿨다고 생각해”

전여농 먹거리 사업인 ‘언니네텃밭’이 지난해 10억 원의 매출을 달성했다고 한다. 무안 여성농민회도 센터와 같이 꾸러미 사업을 한다. 

무안 여농이 여성농업인센터를 위탁 운영하는 것에 대한 시비도 많다. 여성농민회가 하니까 센터에 사람이 잘 안 온다는 유언비어도 퍼뜨리고 농민회나 여농이 회의나 행사라도 할라치면 눈 흘기며 불편해하는 사람도 있다. “농민회나 여성농민회원은 무안 군민 아니고, 무안 농민 아니간디? 다른 지역은 지자체에서 농민회 사무실 공간도 내주고 하던디 주민이 무안여성농업인센터 사용하는 것이 무슨 문제냐”며 대거리를 했지만 속이 상한다. 

농민운동가들이 고생하며 만들어 놓은 정책의 수혜는 다 누리면서 조금의 손해도 입지 않으려는 사람들을 보면 힘이 팽기기도 한다. 

현재 여성농업인센터는 예산 1억 4천여만 원에 3명의 상근직원을 두고 있다. 인건비와 사업비를 빼면 빠듯한 살림임에도 불구하고 지난해 관변단체가 위탁을 받으려고 달려들기도 했다. “그 단체 회장을 센터에 오라고 했지. 센터 건립과정, 운영내용, 예산 등을 이야기해주니까 당연히 여성농민회가 운영해야 한다면서 깨끗하게 포기하더라고”  

“여성농민운동이 데모만 한다는 이미지를 바꿔야 한다”는 고 회장은 아직도 바꿔야 할 세상이 많다.      


고 회장과 박 회장


고 회장의 든든한 내조자는 박 회장이다. “무안군농민회 회장을 했제. 남편은 도 회장도 할만한 인품과 재목 인디 둘이 미쳐서 농민운동한다고 다니면 살림이 되겠냐”며 박 회장은 고 회장의 적극적 지지자이자 내조자를 자처했다. 

무안 농민회장 할 때 집회 발언을 맡은 박 회장이 미리 써간 종이를 펼치자 비가 우두둑 내렸다. 수성펜으로 쓴 연설문 글씨들은 뭉개지고 당황한 박 회장은 “나 못하것소”하고 무대를 내려와 버린 일로 고 회장은 박 회장을 평생 놀려먹는다. ‘샤이’ 박 회장과 ‘불도저’ 고 회장은 천생연분이다. 

여성농민회 입문 초기 발언도 정리해주고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도 많이 나눴다. 지금도 박 회장 노트와 신문스크랩에는 고 회장 관련 일지와 기사들로 가득하다. 

가난한 집 7형제 장남으로 태어나 돌 뿐이었던 박토를 삽과 괭이로 옥토로 만들어 낸 박 회장은 동생과 조카들 일이라면 자식일 만큼이나 껌뻑 죽는다. 시동생에게 맡긴 소를 되돌려 받지 못해 고 회장에게 그렇게 지청구를 들어도 동생에게 말 한마디 않는다. 둘째 아들과 조카가 고향마을에 들어와 소를 키우고 농사지으며 제 식구들 늘려가는 모습을 보는 박 회장의 눈은 흐뭇하고 입에서는 “보기 좋지 않은가”라는 말이 노래처럼 흘러나온다. 

가족애가 남다른 남편 덕에 애태울 날도 많았지만 돌아보니 풍성한 인생이지 싶다.

“젊을 때 농민교육 가보면 꼭 땅을 사라고 하등만. 근디 박 회장이 꿈쩍도 안 하는 거여.” 55살에 막차 타고 신청한 전업농으로 그나마 농지를 살 수 있었다던 고 회장은 “내 말만 들었어도 땅부자 되얐을 것인디” 여부자의 후손을 몰라본 박 회장 안목이 아쉽다. 

김영삼 대통령 시절 하우스 농사 지원 막바지라 다들 융자금 1%짜리 정책자금 받으려고 난리였는데 “남편은 그 빚을 어떻게 갚으려고 하느냐”며 반대했다. 도저히 밭농사만으로는 일어설 수 없다고 판단한 고 회장이 막무가내로 1억 대출을 받아 하우스를 지으니 박 회장의 한숨도 깊어갔다. 고 회장은 알타리 농사로 수천만 원을 벌었고 수박과 무를 심어 그 해 1억 원의 수익을 냈다. 

하우스 농사 재미를 본 고 회장은 마을에도 하우스 예산을 따왔는데 정작 무안군에서 참여 농가가 없을 것이라고 반대했다. “하거나 말거나 마을 사람들한테 물어나 봅시다”며 수요조사를 했더니 대다수가 참여하겠다고 손을 들었다. “나 땜시 우리 마을이 하우스촌에, 빚투성이가 되었지”라며 웃는 고 회장은 농한기 없는 하우스 농사가 돈은 벌어도 몸은 고달픈 애증의 관계란다.  

나이 먹으니 박 회장도 여기저기 아프다. 몇 년을 참다가 고통을 더 이상 못 이기고 박 회장은 올해 2월 서울에서 디스크 수술을 받았다. 2주간 서울에서 병원 신세를 지는데 퇴원 삼 일 전에 농민집회가 잡혔다. 고 회장이 참석해야 하는 자리라 “어쩌께라우. 며칠 일찍 퇴원하면 안되겠소”라고 조심스레 묻는 고 회장에게 박 회장은 두말없이 대답한다. 

“그래야제”     


농사 멘토     


“젊은 시절, 참말로 가난했제. 결혼하고 3년 만에 시아버지가 돌아가시니 남겨주신 땅과 식구들 건사까지 모든 책임이 몰려오데” 

지금은 고구마가 고소득 작물이지만, 옛날에는 주정용 고구마로 가격이 싸서 그나마 썰어 말리면 돈이 되니까 노지에 고구마 썰은 것을 말리는데 비라도 오면 걷느라고 난리가 났다. 

힘들게 농사지으면서 오직 내 자식들은 나처럼 고생 안 시키겠다면서 “농사는 절대 짓지 말라”던 고 회장은 “농업, 농촌, 농민 없이 세상이 돌아나 갈까?” 싶어 누구 하나라도 농사를 지었으면 싶었다. 광주에서 대학을 나온 두 아들 중 막내아들이 몇 년 전부터 고향에 내려와 고구마 2만 평 농사를 짓더니 얼마 전 손자까지 안겼다. 큰아들은 농사지을 생각 말고 편하게 살라는 엄마 뜻대로 광주에서 착실히 직장에 다니고 있다.  

가난을 물려주고 싶지 않아서 아들 둘 낳고 말았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딸 하나라도 더 낳을 걸 후회가 된다. 그때는 너나 할 것 없이 어렵게 살던 시절이라 아이들 제대로 못 먹이고 몇 년을 입힐 요량으로 이불로 덮어도 될 정도로 큰 옷을 사서 입혔다. 큰아이는 새 옷을 입어보지만 작은 아이들은 매번 물려받은 헌 옷을 입어야 하니 입이 댓 발은 나왔다.

“한 번은 큰아이가 다쳐서 입원했는데 병문안 온 사람이 용돈을 쥐어 줬나 봐. 엄마한테 말도 안 하고 갖고 있다가 중학교 졸업식 때 새 운동화를 신고 나오더라고. 얼마나 새 신이 신고 싶었을까? 마음이 짠했어” 

농업노동은 보통 고된 일이 아니다. 지금은 기계화되고, 인력시장에서 일꾼을 구하는 시절이지만 노동강도는 다른 노동에 비할 바가 아니다. 그렇다고 가격이 안정된 것도 아니고 들쭉날쭉이니 영농 빚 없이 농사짓기는 더욱 어렵다. 

막내아들이 농사짓겠다고 하니 반갑기도 하면서 한편, 짠한 마음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자식이 농사를 짓는다는 것은 부모에게는 한 짐이여. 나이 묵어 활발하게 내 농사를 짓지 못해도 아들 농사짓는 것을 옆에서 보면 자연 거들게 돼. 잔소리라도 하게 되고” 

요즘은 외지에서 인부를 얻어서 농사 지으니 인건비 대기도 바쁘다. 농사 규모가 큰 만큼 빚도 덩달아 커진다.  농업에 뜻을 둔 ‘귀농인에 대한 대책이 중요하다’는 고 회장은 농촌공사에서 외지인들 땅을 지역 농민들에게 임대하는 일을 더 확대하라고 주장한다. 

여성농민 일감 갖기 사업의 일환으로 시작된 절임배추 사업이 식품가공 관련 법률이 강화되면서 소규모로 김치사업을 병행한 여성농민들은 재투자나 불안정한 판로 앞에서 대부분 포기하고 만다. 김치시장은 유명 연예인을 앞세우거나 기업들의 돈벌이가 되면서 중국산이나 싼 농산물로 농촌 일감과 국산 먹거리 이미지를 실추시키고 있다.

농사는 오랜 시간 축적된 경험이 전수되어야 한다. 땅과 물, 지형과 바람, 볕 등 자연의 변화를 읽고 느끼는 감수성이 필요하다. 한두 해 배워서 되는 일이 아니다. 고 회장은 농사 멘토 없이 젊은이들만 농사짓다가는 실패 보기 십상이란다. 농사는 대를 이어 전수해야 하는데 지금 농촌에는 전수자들이 절대적으로 없다. 농사 명인들은 하루가 다르게 운명을 달리하니 농사 대가 끊길 판이다.       


아픈 손가락     


같이 농사짓는 막내아들 의수(義手)를 볼 때마다 고 회장은 후회와 짠함이 밀려온다. 막내아들은 군 복무 중 농기계에 손이 끼여 오른손을 잃었다. 대학 다니다가 산업체 군복무지로 농촌현장을 택한 아들이 손을 다치자 고 회장 부부는 하늘이 무너진 것 같았다.  

고맙게도 몸과 마음을 잘 추스른 막내아들은 학업을 마친 뒤 평생직장으로 농촌과 고향을 택했다. 

“정신 차려 봉께 왜 농촌에서 일하다 다치면 산재(산업재해)가 적용 안 되는지 이상하더라고”

고 회장은 한덕수 당시 농림부 장관과 같은 당 국회의원이었던 권영길, 노회찬 의원 등에게 농업 산재에 대한 법률이 필요하다고 이야기했다. 지금은 농협에서 농작물 재해보험을 통해 농작물 재해에 대해서는 일정 정도 보상이 가능하지만 농사짓는 사람이 입은 재해에 대한 지원이 없다. 작물도 사람도 다치면 치료받고 재활할 수 있도록 국가가 도와야 하는데 말이다. “우리 아그덜 백일, 돌사진도 못 찍었어.” 사진첩을 들추다 환하게 웃고 있는 아이들 얼굴을 보는 고 회장 눈에 눈물이 쌓인다. 

“이때는 참 이뻤는디 정신없이 사느라 아이들 이삔 줄도 몰랐제...”      


농사짓는 한 데모는 해야제     


촌에서 농사짓는 한 여성농민운동은 죽을때까지 해야한다는 고송자 회장의 찰지고 우렁찬 목소리가 귓가를 울린다.

1994년 전남여성농민회 회장이었던 고송자 회장은 2022년 2월 현재도 전남여성농민회 회장이다. 

“여성농민운동이 침체기를 겪으면서 사람이 없어서 내가 다시 맡았어”라며 고송자 회장은 “여성농민 조직이 없어지면 안 돼. 농촌학교 병설유치원 설치, 여성농업인육성조례, 급식조례 운동, 의료보험 투쟁, 수세 반대, 농산물 제값 받기 운동, 밭직불제, 먹거리 운동 등 우리가 세상을 바꾸는 일을 얼마나 많이 했당가” 

초고령화되고 대농화, 상업농화 되어가는 농촌지역에서 새로운 여성농민운동가를 발견하고 키워내는 일은 참으로 지난한 일이긴 하다. 

개인보다 조직의 힘을 평생 경험한 고송자 회장은 오늘도 악착같이 현장을 살아낸다. 

“농사짓는 한 여성농민운동 할 것이여. 촌에서는 죽을 때까정 해야 해. 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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