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와 자식의 '갑을 관계'에 대하여 ㅡ
5살인 첫째는 요새 '엄마랑 안 놀아, 나 할머니랑 놀거야'와 같은 말을 자주 한다. 유치원 선생님에게 들으니 끼리끼리 모여 논다는 '또래 집단'을 만들 시기이고, 다른 친구도 '또래 집단'을 만들기 위해 지후에게 '지후랑 놀면 안되, 넌 나랑만 놀아야되' 같은 말을 많이 하게 되서 자연적으로 커가는 과정에서 습득한 말인 것 같았다. 그 날 저녁도 뭔가에 삐진 지후가 할머니에게 이렇게 말했다.
"할머니랑 안 놀아! 흥! 나 이제 엄마랑 놀거야"
"그래. 삐지면 네 손해지."
그 말을 듣고 깨달았다. 그 말이 내가 세상에서 제일 싫어하는 말이라는 것을. 엄마는 이 말을 자주 하셨었는데, 결혼하고 독립해서 살다보니 잊어버리고 있다가 다시 합가를 해서 듣고보니 떠오른 것이다. 그 말을 듣고 상처받았던 당시의 내 감정들과 기억들이 방울방울... 그래서 그 감정이 생각난 김에 내가 그 말을 왜 싫어하는지 좀 더 곱씹어보게 되었다. 이를 테면 이 글은 '삐지면 네 손해야'라는 문구에 대한 심층 분석 레포트인 셈이다.
'삐지면 네 손해야'라는 말은 7글자 밖에 되지 않지만, 여러 의미를 담고 있다.
1. 삐지면 네 손해이기 때문에, 삐져서는 안되고, 그러니 너의 감정을 참아.
뭔가 감정이 상하거나, 서운한 감정이 들어 표현해보겠다고 삐지려는 찰나, '삐지면 네 손해야'라는 말을 듣게 되면, 결국엔 그 감정을 드러내지 말고 고스란히 안에 담거나 아니면 나(부모)에게 보이지 말라는 뜻이 된다. 아이 입장에서는 서운한 감정을 말로 표현하는 것이 익숙하지 않고,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어려워서 최후의 수단으로 '삐지는' 것을 선택한 것인데, 삐지면 안 된다니 아이는 선택지가 없는 셈이 되고, 표출되지 못한 감정은 켜켜이 쌓이고 마는 것이다.
2. 삐지면 부모인 나는 너(아이)의 감정에 휘둘리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결국 네 손해야.
설령, 아이가 삐지는 방법을 선택했다 하더라도, 부모는 너의 감정에 휘둘리지 않고, 마이웨이를 가겠다는 뉘앙스도 된다. 삐져서 밥을 안 먹거나, 혼자 방에 가서 장난감을 가지고 놀더라도 부모인 나는 아이의 감정에 흔들리지 않는 자세를 취함으로써 우리 관계의 주도권은 부모인 나에게 전적으로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셈이다. 일종의 '무관심' 전략으로 아이의 주의는 끌 수 있겠지만, 낮아지는 아이의 자존감은 막을 수 없는 말이다.
3. 부모인 내가 화를 내는 것은 괜찮지만, 자식인 너가 화를 내는 것은 안 돼.
부모가 자식에게 훈육을 하거나, 꾸중을 하는 것은 부모의 위치에서 권위를 갖고 하는 행위이기 때문에 타당하고 필요한 것이지만, 거꾸로 아이가 화를 내는 것은 부모의 권위가 흔들릴 수 있으니 화냄을 애초에 차단시키는 것이다. 그래서 애초부터 이런 불편한 감정을 알아서 감당하고, 밖으로 표출시키지 않도록 메가톤급 7글자로 압축해서 표현한 것이 '삐지면 네 손해야' 멘트이다.
유투브에서 본 김미경 강사님께서 '부모의 나이가 2~30년 많은 것만으로도 아이에게는 이미 위협이다'라고 얘기하신 걸 보고 엄청 공감했었는데, 그렇기 때문에 부모는 아이에게 위협적인, 또는 갑을 관계가 발생할 수 있는 말들은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물론 앞뒤 조건이 아이가 '삐짐'을 표출해도 타당한, 또는 자연스러운 상황인지는 봐야겠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7글자가 아이에게 주는 압박감과 주늑듬은 아이가 감당하기에 너무 큰 무게이기 때문이다. 몇 차례 엄마가 지후에게 금단의 그 멘트를 하시는 걸 듣고, 며칠을 고민하다 저녁을 먹으며 얘기해봤다.
"엄마, 근데 나는 그 말이 정말 너무 너무 싫었어."
"(조금 민망하셨던지 웃으며) 그래? 근데 너가 왜 삐졌었는데?"
"그런 말을 들은 게 한두번이 아닌데 기억이 당연히 안 나지."
"나는 내가 그런 말을 자주 한 지도 몰랐네~~"
그렇다. 엄마는 본인이 그런 말을 하는지도 잘 모르셨고, 나도 그 멘트가 주는 불편한 감정들을 엄마에게 이야기해 본 적이 없기 때문에 그냥 별다른 뜻없이 쓰고 계셨던 거였다. 엄마는 그 뒤로 금단의 그 멘트를 더 이상 날리지 않으셨다. (나이쓰) 이 대화를 계기로 그간 표현하지 않았던 내 감정들을 조금씩이라도 꺼내보는 것이 우리의 합가생활에, 정확하게는 합가생활의 '평화'에 도움을 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쨌든 내가 이 글을 쓰는 이유는 지후에게 할머니와 엄마가 너에게 무심코 던지는 말 한마디에도 이렇게 심.혈.을. 기울여 너를 키웠다는 기록을 남기기 위해서다.
그니까 말 좀 들어라, 짜샤 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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