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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수민 Dec 15. 2023

제로의 날


 그냥 보았을 땐 내가 만난 모든 남자들에게서 비슷한 점은 찾을 수 없었다. 오래된 친구도 그런 말을 했다.

“사람들은 보통  만나는 스타일이 비슷한데 네가 만나는 남자들은 공통점이 하나도 없어”


 그랬다. 학력, 외모, 직업, 부의 정도, 지역에선 그러했다. 단 한 가지만 빼고,


둘째

라는 것!


 단 한 명도 장남은 없었다. 열 손가락으로 헤어릴 수 있는 정도의 남자친구들은 모두가 둘째 혹은 막내였다.


그건 나로서도 희한했다. 분명 의도한 건 아니었다고 생각했다. 그럼에도 신기했다.


 딸은 엄마팔자를 닮는다 했던가? 그 말은 모든 딸들에게 당연히 다르게 와닿겠지만 내겐 내 대에서 사그라져야 할 카르마나 업이라  여겨졌다. 절대로 내 딸에게 나의 노동량을 물려주고 싶지 않았다. 평행이론처럼 엄마는 내가 아는 한 학교를 졸업하신 이례로 마음 편히 쉰 날이 없었고 나 또한 수능을 치고 나서부터 아기를 낳기 전까지 가장 길게 쉬어본 것이 보름 남짓이었다. 이십 대 때는 투잡이 기본이었고 요가원을 시작한 후로는 12시간 이상 근무는 당연한 것이었다. 딱히 불평도 화도 나진 않았지만 아마도 인생의 인내심 총량을 다 쓰고 있었던 게 아닌가 싶다. 인내가 습관이 되어 때로는 내 짐을 키우는 것도 모자라 내 짐이 아닌 그네들의 짐들도 얹으려는 이들을 구별하지 못하기도 했다.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나서 더 이상 끌어다 쓸 인내심은 남아나지 않았고 펑하고 터져버린 풍선처럼 날아가버린 참을성을 찾을 수가 없어져버렸다.


그리고 그 시점 엄마도 더 이상 참지 못하는 것 같아 보였다. 종종 친정에 갈 때마다 그러한 갈등의 장면들을 마주해야 했다. 나인지 엄마인지 헷갈릴 정도로 비슷한 감정선을 타고 있었는데, 참지 않는 것은 기본이고 되려 역으로 상대가  나쁜의도로 그런 것이 아닌데도 과민반응으로 상대를 가해자로 규정짓거나 감정이 파도를 타기가 일쑤였다.


 다행인 것은 감정의 정도가 약해지고 있었고 빈도도 적어지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한번 논쟁이 일어난 일에 대해서는 다시 반복하지 않으려 촉을 세우고 깨어있으려 했다. 나도 내가 느끼기에 엄마도,


이번 친정행에서는 아무런 날 섬 없이 순풍처럼 보드라운 바람만이 가족을 감쌌다. 그리고 처음으로 마음 편히 다녀왔다고 생각했다. 오랜 기간 사랑으로 버텨온 아빠 덕분인지 얼굴도 마음도 동그란 신랑의 마음이 닮긴 계란덮밥 때문이었는지 모르겠지만 엄마 환갑을 맞은 날의 점심은 오랜만에 느껴보는 무해하고 행복한 분위기만 있었다.


그리고 서울로 돌아온 며칠이 지나 김치찌개를 하다 눈물에 쏟아졌다. 세상의 짐은 누구나가 무겁겠지만 장녀가 지니는 책임감을 오롯이 나의 몫으로 받아들여내야 했을 삶이 고맙고 애틋하고 대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장녀는 선택이 아니지만 책임을 다해야 하는 자리라 비록 물질로는 성에 찰만큼 해내지 못했을지라도 마음은 언제나 애를 쓰고 있는 것이다.


물론 둘째, 셋째, 막내들도 그들의 자리에서의 고충이 있을 것이고 경험해보지 못했다고 해서 가볍다 할 수 없을 것이다.


다만 소리 내어 울 수 있는 이들의 솔직함과 가지고 싶을 것을 가지고 싶다고 얘기하는 자연스러움과 손가락에 찔린 가시를 몽둥이 맞은 것 마냥 투정 부리는 허풍이 가끔은 부럽게도 했다.


지나친 고통에 익숙해져 있다는 건, 자신의 고통을 기준으로 상대의 고통도 가늠할 때에 불리한 위치에 있는 건 확실해 보였다.


남자친구들이 차남 혹은 막내였다는 건 무의식적으로  무거운 자리는 의도적으로 피한 게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신랑과 산 지 얼마 안 되었을 때 건조기에 돌려 작아져버린 그의 티를 내가 입게 되었는데 왜인지 모르겠지만 정말 너무너무 편했다. 편안하다는게 이런 거였나 하는 마음이 절로 올라왔다. 오늘은 나와 연결된 무언가 들이 모두 그러한 기분을 주고 있다. 오늘이 마이너에서 플러스로 가는 제로의 날이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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