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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곰곰씨 Apr 05. 2021

당신은 산타클로스를 믿나요?

도서_01

크리스마스가 되어 산타클로스를 기다렸던 기억은 어린 시절의 가장 짜릿했던 기억 중 하나다. 크리스마스이브가 되면 네 살 위였던 오빠와 함께 나는 늘 밤을 새울 계획을 세웠다. 산타클로스를 만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눈꺼풀은 의지보다 한 백배쯤은 무거웠다. 언제나 나도 모르게 잠이 들어버렸고 이 계획은 한 번도 성공한 적이 없었다. 산타클로스를 만나지는 못한 아쉬움은 늘 컸고, 내 마음을 알아채기라도 한 듯 산타클로스는 늘 12월 25일 아침에 크고 작은 선물로 족적을 남겨주었다.

아홉 살 가을에 아파트로 이사를 온 뒤 12월이 되자 우리 남매는 불안해졌다. 아파트는 굴뚝이 없어서 산타할아버지가 공식적으로 들어오실 수 있는 통로가 없었던 것이다. 그즈음에 오빠는 친구들과 밖에서 산타할아버지의 유무에 대해 토론하다가 궁지에 몰려 거의 울 것 같은 표정으로 집에 들어온 날도 있었다. 엄마는 그런 오빠를 걱정스런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나는 산타할아버지에 대해 굳건한 믿음이 있었다. 때문에 산타클로스가 오지 못할 거란 생각은 추호도 해보지 않았다. 그러나 그해 크리스마스, 나는 태어난 이후 가장 불행한 아침을 맞이했다.

​아빠는 진지하게 말씀하셨다. 마침 아파트로 이사를 와서 산타할아버지가 오실 수 없는 상황이 만들어졌고 오빠도 중학교 입학을 앞두고 있으니 이제는 사실을 털어놓는다고. 산타클로스는 모두 꾸며낸 이야기이며 그동안의 크리스마스 선물은 모두 부모님이 준비한 것이었다는 당최 믿을 수 없는 이야기였다.

오빠는 이미 밖에서 산타클로스 논쟁을 몇 번 겪었던 터라 담담한 편이었지만 나는 아니었다. 나는 소리 내어 우는 스타일이 아니었는데 그날 대성통곡을 했다. 내 마음의 말랑말랑한 한 부분이 쓰윽- 잘려나가는 느낌이었다. 자연스럽지 않았고 때는 적절하지도 않았고 많이 슬펐다. 지금 되돌아보면 ‘나는 아직 어린이여야 하는데 왜 내 동심을 허락도 없이 빼앗아 가는 건가요’라고 말하고 싶었던 건 아니었을까?

시간이 오래 지난 뒤에, 내가 아이를 낳아 기르게 되니 나는 아이들에게 되도록 오랫동안 산타할아버지의 기억을 남겨주고 싶었다. 하지만 아이들은 선물 포장지가 문방구에 파는 것과 같다는 둥, 인터넷 쇼핑몰의 주소가 적혀있다는 둥 산타할아버지의 정체를 수시로 의심했다. 나중에 큰아이가 말하기를 '연예인 아빠가 자녀를 양육하는 예능 프로그램에서 아이를 속이려고 산타클로스 분장을 하는 개그맨 아빠를 보고 산타할아버지는 없다고 확신하게 되었다'라고 한다. 때마침 남편이 잘 보던 쇼미 더 머니에서는 한 래퍼가 아예 대놓고 '우찬아 괜찮아 울어도 돼. 사실 산타는 없거든'이라고 무시무시한 디스 랩을 뱉어놓기도 했다.

이미 여러 경로를 통해 본의든 아니든 다양한 정보를 수집하게 된 아이들은 산타할아버지가 있다고 우기는 나를 깔깔대며 비웃었다. 심지어 아이들은 산타클로스는 변신로봇 같은 장난감은 주면서, 실제로 자기가 꼭 가지고 싶은 휴대폰이나 닌텐도 같은 건 선물해주지 않는다고 시시하다고도 했다. 아이들은 이미 알고 있었는데 나만 짐짓 모르는 체, 꽤 오랫동안 12월이 되면 선물을 숨겨놓고, 크리스마스이브에는 제대로 잠들지도 못하고 새벽까지 깨서 아이들의 머리맡에 선물을 두었다. 누구를 위한 것인지 모를 이 수고로움은 온전히 내 몫이었다.

그러다 우연히 이 책에서 나는 어린 시절의 산타클로스와 다시 만날 수 있었다. <나를 있게 한 모든 것들>에서 주인공 프랜시의 외할머니가 프랜시를 갓 낳은 프랜시의 엄마에게 해주었던 바로 이 말 때문이었다.

"아, 그리고 산타클로스를 잊으면 안 되지. 아이들은 최소한 여섯 살이 될 때까지는 산타클로스가 있다고 믿어야 해."

"엄마, 나는 산타클로스나 요정이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어요. 나 자신도 믿지 않는 걸 아이에게 왜 가르쳐야 하지요?"

"그건 저 아이에게 상상력이라는 놀라운 힘을 길러줘야 하기 때문이야. 저 아이는 눈으로 볼 수 없는 은밀한 세계를 가지고 있어야 해. 그러면 이 세상이 살기 어려울 정도로 추악해도 저 아이는 상상의 세계 속에 살아갈 수 있을 거야. 나 또한 지금 이 나이가 될 때까지 성자들의 놀라운 삶과 위대한 기적을 회상하며 살아가고 있단다. 그래서 나는 나에게 주어진 그 이상의 세계를 살아갈 수 있어." (79~80쪽)

이 부분을 읽는 순간 나는 내가 아홉 살 때 억울하게 잃어버린 게 무엇이었는지 선명하게 알게 되었다. 나는 크리스마스 선물을 잃은 것이 아니라 한 인간이 전 생애를 통해 아주 잠깐 동안 얻을 수 있는 은밀한 나만의 세계를 잃어버렸던 것이다. 그리고 책 속의 이 한 구절을 통해 내가 잃어버린 것은 누구도 뺏을 수 없었던 소중한 것이었다고 진심 어린 위로를 받았다. 무려 30년도 더 지난 후에야 잃어버렸던 나만의 산타클로스와 뒤늦게 다시 조우할 수 있었다.

이 책은 1943년에 나온 성장소설로 작가의 어린 시절 경험을 토대로 한 쓰여진 책이라고 한다. 주인공 프랜시는 평범하면서도 어떤 면으로는 빨간머리 앤이나 작은아씨들의 조, 키다리 아저씨의 주디를 떠올리게도 한다. 이 빈민가의 소녀는 크고 작은 고난과 시련을 통해, 주변의 다양한 인물들의 영향을 받으며, 또 자기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며 지혜롭고 현명하게 성장한다. 원제는 <브루클린에는 나무가 자란다 A Tree Groows in Brooklyn>라고 하는데 실제 브루클린에는 적당한 조건만 맞으면 아무리 잘라내도 어디에서나 뿌리를 내리고 쑥쑥 자라는 나무가 있다고 한다. (심지어 시멘트를 뚫고도 자란다고) 아마도 프랜시의, 아니 인간의 싱그러운 성장을 그 나무에 빗댄 제목이 아닌가 싶다.

이 책이 언제 어떤 경로를 거쳐 내게 오게 되었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하지만 이 책을 덮자마자 나는 단박에 인생책으로 손꼽기로 했다. 한 대목만 소개하긴 했지만 그 밖에도 이 책에는 밑줄 긋고 싶은 문장들이 여름 나무의 잎처럼 무성하다.

다시 크리스마스로 돌아오자면 이제 나는 크리스마스가 되어도 잘 잔다. 선물은 내가 해주고 싶은 것으로 아이들에게 미리 얘기해준 후에 크리스마스 당일에 준다. 새벽잠을 설치지 않으니 세상 그렇게 편한 것이 없다. 크리스마스의 산타클로스는 참 행복한 판타지다. 내가 경험한 산타클로스는 아이 입장이었을 때도, 누군가에게 선물을 주는 어른의 입장이 되었을 때도 모두 설레고 기뻤다. 앞으로도 크리스마스는 계속되고 산타클로스는 계속 우리 곁을 찾아올 것이다. 더 이상 나와는 상관없다고 하여도. 그래야만 한다. 아이들에게 상상력이라는 놀라운 힘을 길러줘야 하기 때문이다.

나를 있게 한 모든 것들 / 베티 스미스 글 / 아름드리미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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