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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곰곰씨 Apr 14. 2021

우리 모두 무사히 할머니가 되길 바라

영화 _01

부끄러운 일인데 나는 정치를 잘 모른다. 장혜영 의원은 그런 내가 아는 거의 유일한 국회의원이다. 국회에 들어가기 직전, 장혜영은 국회의원 당선인이라는 신분으로 내가 즐겨 듣는 팟캐스트에 패널로 나와 책 이야기를 했다. 나보다 11살 아래인 그녀가 들려주는 책 이야기가 참 흥미로웠다. 그녀의 독서 스펙트럼은 상당히 넓었고, 세대가 다른 탓인지(핑계다, 핑계!) 그녀가 소개해주는 책 중에 내가 아는 책이 별로 없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나긋나긋했고 말은 조리가 있었으며 생각은 깊이가 있었다. 그때 나는 그녀에게 발달장애가 있는 한 살 아래 동생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는데, 그녀의 독서이야기에만 매료되어 그 부분은 무심히 듣고 지나쳤다.

최근 그녀와 연관된 성추행 사건이 화제가 되었는데 이때 나는 오랜만에 나의 레이더에 포착된 그녀에 대해 제대로 궁금해졌다. 그녀가 나온 세바시 강연을 찾아보고, 정치에 입문하기 전 운영했던 <생각 많은 둘째 언니> 유튜브도 보았다. (커트의 노란 염색, 그리고 뿔테 안경은 지금 생각해도 진짜 안 어울린다) 그리고 무언가에 홀린 듯 그녀가 만든 영화 <어른이 되면>을 바로 구매했다. 네이버에서 1200원 밖에 안 했다. (이렇게 좋은 영화가 1200원이라니. 말도 안 돼. 다 보고 난 뒤에 든 생각)


<어른이 되면>은 13살에 시설에 들어가 18년 동안 시설 안에서만 생활했던 중증 장애인이 사회로 다시 복귀해 살아가는 이야기를 담은 다큐멘터리다. 바로 그 중증장애인이자 영화의 주인공이 장혜영의 한 살 아래 동생 장혜정이었다. 나이는 서른한 살. 그러나 혜정은 밥을 할 줄도, 일을 할 줄도 모른다. 씻는 것조차 어린아이들에게 엄마들이 하는 것처럼 이리저리 봐줘야 한다.

결혼도 하지 않고 아이도 길러본 적이 없는 청년 장혜영이 또 다른 여러 청년들의 도움을 받으며 혜정이의 일상을 함께하고 있었다. 이 영화를 한 줄로 정의하자면 탈시설을 한 중증장애인의 사회적응 프로젝트. 그러나 이것은 개인의 노력 여하보다 사회 전체가 바뀌어야 성공할 수 있는 프로젝트다. 그래서 이 영화는 어쩌면 크레디트가 올라갈 때 비로소 진짜 시작되는 것일지도 모른다.

혜정이는 시설에서 무언가를 하려고 할 때 '어른이 되면 할 수 있어요'라든가 '어른이 되면 하세요'라는 말을 많이 들었다고 한다. 그래서 뭔가 마음대로 하지 못하는 일이 생길 때면 '어른이 되면...'이라는 말을 습관적으로 되풀이한다고. 하지만 시설에서는 혜정이가 어른이 될 수 있게 아무것도 도와주지 않았다. 되려 과잉행동으로 인해 통제가 어렵다는 이유로 독한 정신과 약을 하루에 한 움큼씩 네 번이나 먹게 했다.(지금은 의사의 처방에 따라 소량 복용 중이라고 한다) 신호등 보는 법을 익히게 도와준다거나 사소한 식사예절을 배울 기회도 주지 않았다.

학교도 감옥도 아닌 어정쩡한 건물에 혜정이는 '성인 여자 거주자'로 18년 동안 먹고 자는 일만 해왔던 듯했다. 중증장애인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물론 시설 쪽에서도 할 말은 많았다. 15명이나 되는 성인 장애인 여성들을 단 두 명의 사회복지사가 돌보아야 하는데 너무 고되고 어렵다고.

장혜영은 동명의 에세이집 <어른이 되면>에서 어렸을 때 외갓집 마당에서 흙장난을 하고 있는데 외할머니가 엄마에게 "저것(혜정이) 죽이고 나도 죽으련다. 그러면 네가 조금은 행복하게 살지 않겠니?"라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고 한다. 아마도 장혜영은 집안에 장애인이 한 명 있다는 사실이 온 가정 전체를 무너뜨릴 정도로 심각한 일이 될 수 있다는 현실을 그때 체득한 것 같다.

왜 장애인과 함께 산다는 이유만으로 일상이 붕괴되어야 하는 것일까? 누군가를 돌본다는 것이 왜 다른 누군가가 자신의 삶을 희생해야 하는 일이어야 할까? 영화는 시종일관 이런 화두를 던졌고, 나는 한 번도 진지하게 생각해보지 않은 것들 때문에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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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큐멘터리이긴 했지만 나는 꾸미지 않은 중증장애인의 일상을 실제로 처음 보았다. 불우이웃돕기 성금을 모금하기 위한 프로그램처럼 최대한의 동정과 연민을 끌어내려고 찍은 화면이 아니다. 이 영화에서 혜정이는 아무에게나 다가가 하고 싶은 말을 하고, 아무데서나 춤을 추기도 하지만, 때로는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아이스커피를 즐기는 평범한 사람이었다. 인어공주를 좋아하고 그림 그리기를 좋아하는 서른한 살 장혜정. 나와 똑같이 감정을 느끼고 살아가는, 인간 장혜정의 모습이 내 가슴으로 들어왔다.

머리를 한대 쿵! 하고 얻어맞는 기분이었다. 그동안 뭔가 잘못 배웠던지, 잘못 알고 살아온 듯한 느낌이 들었다. 문득 큰아이가 2년 전 중학교 1학년 때 같은 반이었던 한 친구가 기억났다. 아이에 의하면 덩치는 자기보다 크지만 말하는 거나 행동은 유치원생 같다고 했다. 음악인가 미술 수업 때문에 반을 이동해야 하는 일이 있었는데 그 아이가 계속 못 가게 막고 놀자고 해서 애를 먹었다는 이야기였다.

나는 그때 '불쌍한 아이니까 네가 이해하고 도와줘라'라고 했다. 왜 나는 불쌍하다고 생각했을까? 왜 우리 아이에게 그 아이와 있는 그대로 친구가 되라고 하지 못했을까? '불쌍한'이 아니라 '불편한'이라는 형용사를 사용했어야 했다. 도와줘야 하는 것은 맞지만 그것이 희생은 아니라고, 당연히 더불어 살아가는 것이라고 말해야 했다. 생각하니 후회막심이다. 기회가 되면 꼭 다시 얘기해야겠다.

마음은 무거웠지만 영화는 시종일관 밝고 쾌활했다. 청춘들의 성장일기를 보는 듯한 환한 화면과 간간히 흘러나오는 내레이션도 좋았다. '이거 설정 아니야?' 싶을 정도로 너무 재미있어 웃음이 터지는 장면도 많았다. 음악감독이자 혜정의 음악 선생님이기도 한 유인서 님의 ost는 기계음이 많이 들어가지 않아 더욱 좋았다. 음원을 일부러 다운로드하여 몇 날 며칠을 반복 재생해서 들었다.

출발은 장혜영에 대한 호기심이었는데 도착은 장혜정으로 왔다. 영화를 보는 내내 혜정이가 진심으로 좋았다. 혜정이가 가장 좋아한다는, 그리고 나도 너무 좋아하는 맥심 모카골드를 꼭 같이 한잔 나눌 수 있는 날이 언젠가 오길 팬심으로 바라본다. 그녀는 무슨 이야기를 내게 나눠줄까? 그녀만의 언어로 말한다고 해도 괜찮다. 기술이 좋아졌으니 번역기를 돌리면 된다.(진짜?^^) 혜정이가 사는 세상도 나아졌을까? 일상은 여전히 우울한 뉴스로 가득하지만 그래도 조금이나마 기대한다면 섣부른 욕심일까.

무사히 할머니가 될 수 있을까

작사, 노래 : 장혜영, 작곡 : 유인서

무사히 할머니가 될 수 있을까
죽임 당하지 않고 죽이지도 않고서
굶어 죽지도 굶기지도 않으며
사람들 사이에서 살아갈 수 있을까
나이를 먹는 것은 두렵지 않아
상냥함을 잃어가는 것이 두려울 뿐
모두가 다 그렇게 살고 있다고
아무렇지 않게 말하고 싶지는 않아
흐르는 시간들이 내게 말을 걸어오네
라라리 라라리 라라리 라리라라
라리라라 라리라라 라라라라라 리 라라
라라라라
언젠가 정말 할머니가 된다면
역시 할머니가 됐을 네 손을 잡고서
우리가 좋아한 그 가게에 앉아
오늘 처음 이 별에 온 외계인들처럼
웃을 거야


하하하하하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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