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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길엽 Jul 06. 2024

남 이야기 함부로 하면 안 되지요

늘 가는 미용실의 주인은 연령이  상당히 으신 할머니십니다. 3년 전부터 이곳에 매월 한 번씩 와서 커트를 합니다. 제가 남의 말을 잘 들어주는 편이라 지인들도 저에게 하소연을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곳 미장원 할머니께서도 멀티플레이처럼 두 손을 부지런히 놀리면서 계속 말씀하십니다. 저는 그저 '맞지요. 그러네요. 아이고 잘 하셨습니다.' 등만 반복적으로 말할 뿐인데 희한하게도 저와 대화가 잘 이어집니다. 몇 가지 화제가 있었는데, 오늘은 손님 중에서 한숨을 깊이 쉬면서 넋두리를 많이 한 분 사연을 들려 주셨습니다.


"그분은 학교 교감 선생님으로 정년 퇴직하셨는데, 자식들에게 용돈을 좀 달라고 했더니 자식들이 갑자기 냉랭해졌다면서 말을 시작하데요. 자식들 아파트를 사는데 퇴직금 일부를 조금씩 보태주었는데도, 막상 용돈이 조금 필요해서 한마디했는데, 자식들 모두가 외면하기에 갑자기 인생 뿌리가 뽑힌 것 같다고 하더라고요. 돈이 있는데 왜 자기들에게 손을 벌리느냐고 핀잔도 들어 요즘 사는 것이 너무 허무하다면서 자신의 사정을 길게 늘어놓더라고요. 참 사람 팔자 알 수 없지요."


그래서 제가 물었습니다.


"학교 교감 선생님으로 퇴직하셨다면 그분 나름대로 성공하신 삶을 산 것 같은데, 그리고 연금이 있을 텐데 왜 지금 자식들에게 손을 벌려야 할까요?"


연금도 부인이 전액을 쓰는가 봅니다. 최근 둘째 아들 사업이 실패하여 이자를 내는 것도 쉽지 않을 정도라고 하네요. 퇴직한 사람이 실패한 인생을 사는 대표적인 코스를 밝고 있는 듯했습니다. 미장원 할머니가 처음 이야기를 꺼낼 때는 제가 의아해했습니다. 왜 그렇게 인생을 살아야 하는가 하고 말입니다. 그런데 이야기를 계속 듣다 보니 할머니께 하소연하신 그분 심정이 점점 이해가 되더군요. 그래서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남 이야기 함부로 하면 안 되지요'


자식들은 아버지가 현재 어떤 처지인지 정확하게 알고 있지 못한 듯합니다. 연금으로 충분히 생활이 될 것 같다는 것이지요. 사업에 실패한 자식의 빚 이자를 대신 갚아주는 것도 다른 자식들에겐 비밀로 했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아버지 입장에선 예전에 자식들 결혼할 때 아파트 구입에 돈을 보태준 것을 떠올리며 용돈 정도는 쉽게 받을 수 있으리라 여기고 있겠지요.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어쩌다 가족이 모여 식사를 하는데도 아버지만 쏙 빼놓고 어머니와 자식들만 모이니 기가 찰 일입니다. 가족 여행도 아버지만 제외하고 다녀왔답니다. 어머니가 다음과 같이 이유를 대면서 말이지요.


"느그 아부지는 사람이 많이 모여 먹는 회식도 별로 안 좋아하고, 어디 어울려 여행가는 것도 안 좋아하지."


미장원 할머니 말씀을 자꾸 들으면서 그분이 애처럽게 느껴집니다. 저야 그분 얼굴도 본 적이 없지만 그저 남일이라고 쉽게 외면할 것이 아닙니다. 어디 부인과 자식들이 그분을 외면하는 것이 처음부터 그랬겠습니까. 어쨌든 지금 당장 처한 현실에 자신의 뿌리뽑힌 듯한 인생을 미장원에 와서 하소연하고 싶은 그 심정이 깊이 와닿습니다. 우리집 아이들이 저와 아내에게 지극정성으로 효도를 다해 늘 고맙긴 하지만 이 아이들도 언제 무슨 일이 일어나 생판 남보다 못한 관계가 될 수도 있음이 우리네 인생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우리집 아이들이 설마 그럴까. 내가 어떻게 키웠는데 등등으로 자식들을 떠올리지만 미장원 할머니가 말씀하신 그분도 어찌 지금 상황을 예상이야 했겠습니까.


저 혼자 책상에 앉아 생각에 짐겨 있는 것을 보고 큰아들이 주말 시내 숙박 아르바이트 가려고 나서다가 슬쩍 물어 봅니다.


"무슨 걱정이 있으십니까?"


큰아들이 그렇게 물었지만 단번에 별일이 아니라고 말꼬리를 돌립니다. 이런 이야기도 큰아들에게 온전히 전하기가 쉽지 않은데 말하기 어려운 사항은 더욱 어렵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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