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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길엽 Dec 01. 2024

덕행이 고결하고, 공손한 군자(君子)가  간신이라니

화흠(華歆)-후한에서 첫 출사 하고 오나라 손책을 거쳐 조조의 위나라까지


인생이야기


(2) 간신(奸臣)인가 공신(功臣)인가' |사람 평가 함부로 할 수 없는 법 | 화흠(華歆)이야기 | 후한에서 오나라 그리고 위나라 조조 휘하 | 처세 - YouTube필라이프

 전


우리나라 관광객이 많이 방문하는 중국 산동성 위해시 성산두에 간신경시관(奸臣警示館)이 있는데, 이곳에는 중국 역사의 대표적인 12명의 간신들이 전시되고 있다. 춘추 시대 오(吳)라 백비(伯嚭), 진(晉)나라 도안고(屠岸賈), 진(秦)나라 환관 조고(趙高), 후한의 문신 화흠(華歆), 수(隋)나라 권신 양소(楊素), 당나라 혹리 내준신(來俊臣) 북송시대 협의 소설에서 간신으로 묘사되는 반인미(潘仁美), 한족의 민족 영웅을 악비(岳飛)장군을 음해하여 죽게 만든 남송의 진회(秦檜), 남송(南宋) 멸망의 원인이 된 재상 가사도(賈似道), 명나라 재상 엄숭(嚴崇), 청나라의 화신(和珅), 중화민국의 한간(漢奸) 왕정위(汪精衛) 등 12명이다. 

 


이중에 인생 역정에서 간신이냐 아니냐는 논란이 되는 인물이 대체로 세 명을 꼽을 수 있는데, 수나라 양소, 북송시대 반인미, 그리고 후한의 문신 화흠이다. 이 글에서 주목하는 인물은 화흠이다. 후한에서 벼슬했다가, 오나라 손책에게 부름을 받고, 결국 조조의 품에 안겼다. 조조의 위나라에선 훌륭한 국정을 펼쳐 최고의 자리에까지 올랐다. 선정을 베풀어 백성들의 존경을 받은 인물인데도 간신의 대열에 오르다니 참 기이한 일이다. 한나라 측에서 보면 조국을 배반한 케이스고 조조의 위나라엔 건국 공신이랄 수 있는데, 한나라 입장에서 간신으로 평가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화흠이라는 인물을 재조명하려면 아무래도 그의 공부 친구 관녕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면 두 사람 함께 공부하던 시절 이야기부터 해야한다. 중국의 후한(後漢) 헌제 때 관녕(管寧)과 화흠(話歆)이라는 두 선비가 있었다. 두 사람은 한 스승 아래서 동문수학을 했지만 사고와 행동을 하는데 있어서는 매우 달랐다. 인생관, 가치관이 달랐다는 뜻이다. 관영은 검소하고 학문을 즐겨 부귀에 관심을 두지 않았으나 화흠은 그렇지 않았다. 세속적이고 부귀영화를 추구했다는 뜻일 게다.



 하지만 화흠의 실제 관리로서의 행적은 그렇게 세속적이고 부귀영화를 추구한 속물이라고 단정하기 좀 그런 면이 있다. 단지 자신의최초 조국인 한(漢)나라에 출사했다가 오나라 손권 휘하를 거쳐 결국 위나라 조조의 품에 안겨 그 안에서 높이 평가받았다는 것인데, 이를 두고 지조가 있느냐 없느냐고 묻기도 그렇다. 천하의 인재가 널리 초빙을 받아 자신의 역량을 펼친 케이스 아닌가. 중국 땅이 너무나도 크고 크고 작은 나라가 워낙 많아서 최초 출사한 나라에 계속 있으란 법도 없지 않은가. 


 

진시황 시절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승상에 올랐던 이사(李斯) 또한 정통 진나라 출신이 아닌 초나라 상채군의 말단 공무원이었다. 말단 공무원 시절 화장실 뒤켠과 쌀 창고에 있던 각각의 쥐가 보여준 행태를 보고 깨달아 진나라 함양으로 가지 않았던가. 그리고 이사가 여불위를 거쳐 최종적으로 진시황 휘하에서 승상을 맡아 전하를 통치하는 승상으로서의 역량을 마음껏 떨쳤다. 그러다가 한(韓)나라 출신 정국이란 자가 진나라 조정에 들어와 거대 수리사업을 실행하였는데, 이 수리사업의 애초 목적은 국가 재정을 고갈시키는 것에 있음이 들통난다. 



그러자 조정의 일단의 정치 세력들의 외국 출신 관리 추방을 강력하게 주장하게 되는데, 이때 이사도 그 대상이 된다. 이에 이사가 당대 최고의 명문장 ‘간축객서(諫逐客書)를 올린다. 축객 즉, 외부에서 온 객을 축출한다는 뜻이니, 간축객서는 외국 출신 관리는 추방하는 것에 대한 간언하는 글이란 뜻이다. 문장 하나 하나 빼어났다. 그중 두고 두고 인구에 회자되는 명문장이 바로 



                      태산불양토양(泰山不讓土壤), 하해불택세류(河海不擇細流)로



     ’ 태산은 한 줌 흙도 사양하지 않고, 하해는 가는 시냇물도 가리지 않는다는 뜻이다. 




이사가 올린 간축객서에 감화된 진시황이 축객령을 거두고 이사는 다시 복귀한다. 이처럼 여러 나라를 거쳐 벼슬살이한 것 자체를 비난할 것이 못 된다. 그 대신에 벼슬살이 과정에서 어떤 행적을 보이는가에 대해 면밀하게 살펴보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래서 화흠이란 인물을 파악하기 위해 젊은 시절 어떤 가치관을 가지고 있었는가를 알아 볼 필요가 있다. 관녕과 화흠이 함께 지내던 시절 이야기다. 

 


하루는 두 사람이 밭에 김을 매고 있었는데 호미에 금이 걸려 나오자 관녕은 미련없이 던져버렸지만 화흠은 그 금을 들고 한참을 바라보았다. 금에 미련이 있어서였을 것이다.  


그리고 또 어느 날엔 두 사람이 돗자리 하나를 함께 깔고 앉아 책을 읽고 있었다. 때마침 멋있는 의관을 갖춘 고관대작의 수레 행렬과 같이 지나가는 나팔 소리가 들리자 관녕은 거들떠보지도 않았지만, 화흠은 큰 길까지 뛰어가 구경을 하고 돌아왔다. 관녕은 화흠이 권력, 재물욕에 사로잡혀 있으며, 그와 함께 학문하는 친구가 될 수 없다며 절교를 선언했다. 관녕이 갑자기 칼을 꺼내더니 함께 깔고 있던 돗자리를 반으로 자르고 따로 앉아 말했다. 

 


                                     “자네는 이제 더 이상 나의 친구가 아닐세.”


                                          寗割席分坐曰, 子非吾友也.



여기에서 유래된 고사성어가 바로 바로 할석분좌(割席分坐)이다. 친한 사람과의 절교를 비유한다. 여기까지 내용을 보면 화흠이 재물에 눈멀고 벼슬에 집착하는 인물의 전형으로 보인다. 그렇지만 그의 벼슬살이에선 그런 면이 별로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그 반대 행적을 보였다. 



화흠은 후한 태수를 지내다가 한때 오(吳)나라 손책의 휘하에서 일을 하였으며, 그후엔 조조의 초빙을 받게 된다. 그 뒤에 오나라 손책(孫策)이 죽었을 때, 조조(曹操)는 관도(官渡)에 있었는데, 그는 나이 어린 천자에게 화흠을 부르라는 상소를 올렸다. 말이 황제지 실제는 허수아비 황제에 불과했고, 조조가 상소문 형태를 명령을 내린 것에 불과했다. 어쨌든 조조에게 화흠을 돌려보내지 않으려는 손권(孫權)에게 화흠이 말했다. 


 

“주군께서 천자의 명령을 받들어 조공(曹公)과 우호 관계를 맺은 지 얼마 안 되어서, 두 분 사이에 명분과 도의가 아직 견고하지 않습니다. 제가 주군을 위해 조그만 성의를 바치려고 하는데, 유익한 데가 어찌 없겠습니까? 이제 저를 공연히 이곳에 머물게 하시어 보살펴주시는 것은, 주군께도 좋지 않을 듯하옵니다.” 

 

이 말을 듣고 손권이 기뻐하며 화흠을 조조에게 보냈다. 아무래도 당시 정세 상황에서 조조에게 정면으로 대드는 위험을 굳이 안을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화흠이 그런 상황을 화흠에게 간곡하게 건의하자 손권도 화흠을 조조에게 보내게 된 것이다. 화흠이 손권의 휘하를 떠나 조조의 위나라도 초빙되어 가게 되었다. 그때 빈객들과 화흠의 지인 1천 명이 넘게 나와 화흠을 환송하며, 수백 금을 증정했다. 



그런데 화흠은 모두 거절하지 않고 받아서 몰래 각각 기호로 표시했다가, 떠날 때가 되자, 예물을 전부 한데 모아서, 빈객들을 향해 이렇게 말했다. 이 행동을 보면 화흠이 그렇게 세속적이고 물욕에 빠진 사람으로 보기 어렵지 않은가. 화흠이 받은 예물을 일일이 돌려 주면서 말했다. 


  


“그대들이 준 이 마음을 고맙게 여겨 모두 받으려 했는데, 막상 받고 보니 예물이 지나치게 많습니다. 이것을 모두 싣고 마차로 가야 하는데, 먼 거리를 가면 귀중한 물건이 가득하여 도중에 횡액을 당할 수도 있고, 가는 길도 험난할 듯합니다. 그래서 이렇게 모두 돌려 드리니, 여러 빈객들께서는 저의 생각을 깊이 너그럽게 헤아려 주시기를 바랍니다.” 

 


그제야 모두 각자 선물하려던 예물을 도로 회수하고는, 그의 덕행을 감탄해마지 않았다. 그렇게 화흠은 결국 조조의 휘하에 들어가 권신(權臣)이 되었지만 관녕은 혼탁한 세상을 한(恨)하며 조정에 나가지 않았다. 관녕은 화흠과 함께 수학하던 시절 돗자리를 칼로 베어 화흠과 친구 관계를 단절하던 그 기질대로 살아간 것이다. 하지만 화흠은 조조의 위나라에서 본격적인 벼슬살이를 하게 된다. 


 

그런데 화흠의 인생에서 큰 사건이 터진다. 서기 200년, 19살이 된 황제 헌제(獻帝)가 조조(曹操)를 제거하기 위하여 총신(寵臣) 동승(董承) 등을 동원하여 조조를 제거할 목적으로 거사를 하는데, 허술한 계획이 사전에 발각되면서 동승은 물론 그때까지 헌제를 모시던 신하들은 모두 삼족(三族)을 멸하는 처벌을 받는 일이 일어난다. 이처럼 조조를 제거하려다 오히려 멸문지화를 겪게 된 것이다. 황제라곤 하지만 아무런 세력도 없는 허수아비에 불과했으니. 

 


1차 시도가 실패하고 황실 식구들은 겨우 목숨만 부지하여 어쩔 수 없이 숨죽이며 살아가고 있었는데, 214년에는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던 복황후가 친정아버지와 모의하여 조조를 제거하려고 거사를 한다. 하지만 이마저 복황후가 친정아버지 복완(伏完)과 주고받은 편지가 발각되어 버린다. 이에 조조가 화흠 등을 데리고 황궁 수색에 나선다. 황궁 곳곳을 무자비하게 수색하자 복황후는 문을 닫고 벽 뒤에 숨어 있었다. 



그런데 이때 화흠이 문을 부수고 들어가 벽을 깨고 복황후를 끌어냈다. 복황후를 군사들에게 머리를 붙잡힌 채 비참하게 끌려나온다. 일국의 황제에게 예우란 것이 일체 없었다. 그렇게 머리채를 붙잡혀 맨발로 끌려 나온 복황후는 매질과 함께 온갖 수치스러운 일을 당한 후 처형되었다. 그리고 복황후의 일가친척 수백 명도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모조리 즉결 처형을 당했다. 




화흠이 복황후를 체포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일이 조조의 전기(傳記)인 조만전(曺瞞傳)을 통해 전해지면서, 화흠이 후한을 대표하는 간신으로 평가된 것 같다. 만(瞞)은 조조의 아명이고 조만전은 성명 미상인 오나라 사람이 썼다는데, 조조에 대한 부정적 시각이 많이 반영되어 있다. 당시 삼국의 대치 상황을 고려할 때 오나라 사람이 조조의 전기를 썼고, 그 안에 화흠이 복황후를 체포하고 복황후가 온갖 모욕과 수치를 겪은 것을 감안할 때 화흠이훗날 간신으로 평가받는 이유가 되지 않았을까 싶다. 

 


조조가 자신을 제거하기 위한 거사의 실질적인 주역인 복황후를 체포하라고 화흠에게 지시한 것은 아무래도 자신에 대한 충성심을 시험해 보려는 의도가 컸을 것이다. 그에 상관없이 화흠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복황후를 끌고 가 처형했으며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어린 황자들까지 죽여버리며 그의 충성심을 보여주었다. 



그렇게 복황후의 거사가 사전에 발각되고 황후를 비롯한 수많은 사람을 잔인하게 죽인 조조가 천하통일의 꿈을 이루지 못하고 220년 1월 65세 나이로 사망한다. 그리고 아들 조비(曹丕)가 뒤를 이어 위왕(魏王)이 되는데, 화흠은 조비에게도 인정을 받아 최고위직인 상국(相國)에 오른다. 이때 화흠이 후한을 대표하는 간신으로 평가받게 되는 두 번째 사건이 발생한다. 

 


20년 이상 후한을 쥐고 흔든 조조는 황제의 자리에 굳이 오르려 하지 않았다. 조조는 어린 황제 헌제를 끼고 섭정을 하면서 굳이 황위에 오르지 않아도 실질적인 황제의 권력을 행사하였던 것이다. 하지만 조조의 아들 조비는 아버지와 달랐다. 이에 화흠, 조홍(曹洪) 등 신하들이 헌제에게 황제의 자리에서 물러나 조비에게 양위할 것을 강요한다. 헌제를 압박하고 조비에게 황권을 양위케 한 주역이 바로 화흠이었다. 


 

동탁의 도움을 받아 황위에 올랐고, 그후 조조의 도움을 받아 이각, 곽사 등을 제거하면서 황제의 자리를 유지할 수 있었지만, 30년 이상 허수아비 황제였던 헌제 입장에선 황제 자리에 더 이상 미련이 없었다. 그래서 헌제는 양위를 하게 된다. 서기 220년 11월에 화흠이 조비에게 황제의 인장을 갖다 바치고, 수선대(受禪臺)에서 선양 의식을 거행하였다. 



이렇게 위(魏)나라 초대 황제 문제(文帝)가 등극한 것이다. 후한에서 벼슬살이를 시작했던 화흠이 손권을 거치고 최종적으로 조조의 위나라에서 고위직에 오른다. 그리고 화흠은 조조 사후에 위나라 건국 공신으로 대신 중에 가장 높은 사람인 위인신(位人臣)에 임명된다. 


 

이렇게 화흠은 위나라에 들어온 지 20년 만에 최고위직에 오를 정도로 군주의 인정을 받으며 출세가도를 달렸다. 그런데 화흠은 위나라 관리 행적에서 간신들이 흔히 저질렀던 음습한 권모술수을 거의 보이지 않았다. 간신들이 흔히 부귀영화를 추구하고 탐욕을 부린 전형적인 형태와도 달랐다. 우리가 흔히 앍고 있는 간신들과는 달리, 화흠은 재물을 탐하지 않았고 권세를 자신이 부귀영화를 누리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하지 않았다. 


 

앞에서도 언급하였듯이 전별금 조로 받은 거액의 축하금도 일일이 기록하여 다시 되돌려 주지 않았던가. 탐욕이 강한 위인이었다면 그깟 마차에 싣고 가지 못한다는 핑계를 대지 않았을 터. 평소에도 청빈한 생활을 하던 화흠은 녹봉과 상으로 받은 물품조차 다른 사람을 돕는데 쓰고 친적과 친구들에게 모조리 나눠주었다. 



그래서 집에는 금은보화는 물론 양식(糧食)이 1석도 없을 정도였다. 그리고 궁궐에 들어가지 못한 여인들을 상(賞)으로 받았을 때도 한 사람도 취하지 않고 모두 시집을 보내 주었다는 일화도 전해진다. 


 

화흠이 조조의 명에 따라 복황후를 참살했다는 소식을 들은 관녕은 장탄식 후 벗을 대신해 죄인을 자처하며 삿갓을 쓰고 승산 깊은 곳으로 들어가 두 번 다시 그의 모습을 볼 수 없었다고 한다. 조비 사후 장남 조예(曹叡)가 2대 명제(明帝)로 계승했을 때도 화흠은 황제의 총애를 받았다. 



5년을 더 조정에 출사한 화흠은 231년 향년 75세 나이로 병사했으며, 경후(敬侯)라는 시호를 하사받았다. 앞에서 관녕과 화흠 사이에 있었던 할석분좌(割席分坐) 고사를 생각한다면 관녕이 젊은 시절 벗인 화흠 대신에 죄인을 자처할 때 어쩌면 자신이 화흠의 인간적인 면모를 정확하게 파악했다고 여기지 않았을까. 

 


하지만 화흠이 분명 조조와 그의 아들 그리고 손자 대까지 권신으로 꾸준히 발탁되었다. 그리고 위나라에서 벼슬살이하는 과정에서 청렴하고 선정을 베풀어 백성을 위하는 관리이자 훌륭한 신하였다. 그런데 그가 후한을 대표하는 간신으로 평가되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 봐도 화흠 본인의 입장에선 억울할 것 같다. 



더욱이 서진(西晉)의 역사가 진수(陳壽)가 쓴 정사(正史) 삼국지(三國志)에서 화흠은 순결하고 덕성을 겸비한 인물로 평가되고, 나관중(羅貫中)인 쓴 소설 “삼국연의(三國演義)”에서는 복황후 사건을 모티브로 화흠을 권세에 빌붙어 악인을 돕는 관리로 묘사되고 있다. 



그러니까 정사에선 훌륭한 인물로 평가하는데 픽션인 소설에서 부정적인 평가를 받았다는 것이 아닌가. 물론 우리도 정사 삼국지 소설인 삼국지연의를 훨씬 많이 접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인물 평가에 대해서는 정사 삼국지의 평가가 온당하지 않을까. 


 

화흠이 후한에서 벼슬하다가 오나라 손권 휘하로 부름을 받고 최종적으로 조조의 위나라에서 최고위직에 올랐다는 것이 과연 개인적 허물에 해당할까. 충분히 이해할 만한 일이 아닐까. 더욱이 백성들의 존경을 한몸에 받고 선정을 베풀었으며 재물에 욕심내지 않고 청빈한 삶의 자세를 보인 모범적인 공직자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단지 조조의 명을 받고 복황후와 그 세력을 참살한 사건과 헌제를 압박하고 퇴위 시켜 조조의 아들 조비가 제위에 오르게 했다는 두 가지 사실만으로 간신이라니 화흠 본인에겐 억울한 것이 아닐까 싶다. 아무리 역사적 사실이지만 사람에 대한 평가가 간단한 것이 아님을 알게 된다. 


 

간신경시관에 12명의 간신으로 전시되고 있는 인물들의 역사적 행적을 보면서 화흠에 대한 역사적 평가가 이렇게 극명하게 대비되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도 화흠을 저렇게 버젓이 간신으로 낙인처럼 전시하고 있는 것을 보면서 우리가 인물 그것도 역사적 인물에 대한 평가가 그리 간단치 않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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