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길엽 Dec 24. 2024

관포지교(菅鮑之交)

 친구 관중을 재상으로 천거하고 항상 그 뒤에만 있었던 포숙!


우정의 상징인 관포지교(管鮑之交)에 관한 내용입니다. 관중(管仲)과 포숙아(鮑叔牙)의 우정이란 뜻입니다. 두 사람의 우정은 워낙 유명하여 후세 사람들에게 널리 널리 알려졌고,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도 큰 교훈을 줍니다. 오늘은 고사성어 관포지교와 관련된 역사적 배경을 알아볼까요. 



(120) 관포지교(菅鮑之交)/진짜 친구란 이런 것/평생 변치 않은 친구/사기열전/관중과 포숙/인간관계 - YouTube



고대 중국 춘추시대의 제후국(諸侯國)으로 제(齊)나라에 관중(管仲)이라는 걸출한 재상이 있었다. 군주가 국정을 재상에게 온전히 맡겨 천하 제일 강국이 된 사례로, 사람들이 제나라의 환공과 재상 관중이 국정을 이끌던 시대를 많이 언급한다. 


관중은 말했다. 


                         “창고가 가득 차야 예절을 알고, 의식이 풍족해야 영예와 치욕을 안다.”


                                                倉廩實則知禮節 , 衣食足則知榮辱


이 말은 백성은 당장 입고 먹는 것이 넉넉해야 예의나 수치, 나아가 법 따위를 알게 된다는 말이다. 춥고 배고픈 사람에게 예의나 체면 등이 무슨 소용인가 하는 관중의 견해는 지금 들어도 정말 탁월하다. 종놈 배고픈 것 양반은 모른다는데, 나라의 최고직 관리인 재상을 오랜 기간 맡았던 관중이 그런 정치철학을 바탕으로 제환공에게 숱하게 충심으로 간언하고, 제환공 또한 관중이 실행하는 정책을 강력하게 후원하였으니 제나라가 춘추 5패 중 첫 번째 맹주가 되는 것이 너무나 당연했다.



관중이 재상으로 역임하는 동안 제나라는 부유해지고 군사력이 막강해졌다. 무엇보다 국정 우선 순위를 백성들의 삶의 질 제고에 놓고 백성들과 고락을 함께 하였다. 국가의 근본은 예의염치에 있어서 이것이 없으면 나라가 망하기 때문에 법치가 필요하고, 상벌 또한 분명해야 한다. 하지만 백성들의 삶이 고달프면 이 모든 것들이 허사가 된다는 것이 관중의 탁월한 시각이었다. 훗날 공자도 관중의 공적을 널리 인정하여 이렇게 말하였다.


                       “관중이 없었다면 나는 머리를 풀고 옷깃을 왼쪽으로 여몄을 것이다.” 


                                                         微管仲 吾其被髮左袵矣



만약 관중의 법도와 교화가 없었다면 오랑캐의 풍습을 따르게 되었을 것이라는 뜻이다. 관중을 강력하게 천거한 친구 포숙도 대단한 인물이다. 평생 관중을 한번도 배반하지 않고 그를 후원하면서도 자신은 늘 뒤에 서 있었던 포숙은 정신적 내공이 정말 대단했다. 더불어 간언을 충실히 수용한 제환공의 포용력도 탁월했다.


 공자 소백이 훗날 제환공으로 즉위하고 천하의 맹주에 올라 춘추5패의 선두주자가 된자. 당시 권력 투쟁 상황을 좀더 살펴 보자. 관중은 처음에 제나라 공자 규(糾)를, 포숙은 규의 이복동생인 소백(小白)을 섬겼다. 규와 소백 모두 제나라를 떠나 타국에서 망명 생활을 하고 있었다. 당시 공손무지(公孫無知)가 음탕한 제양공(齊襄公)을 죽이고 정권을 잡았을 때인데 오히려 충신들이 공손무지의 잘못에 불만을 삼고 공손 무지를 죽이고 맏이인 왕자 규를 불러 들이기에 이르렀다. 조국 제나라에서 권력의 공백이 생기자 관중과 포숙 두 사람은 각각의 주군을 모시고 귀국길에 올랐다. 주군이 정치적 라이벌 관계이니 관중과 포숙의 운명도 각자가 모시는 주군의 권력 다툼의 결과에 따라 달라지게 된다.


먼저 귀국하는 쪽이 제위에 오르게 되는 상황에서 관중이 제나라로 들어오던 소백을 기다리고 있다가 활을 쏘았는데, 그 화살이 공교롭게도 소백의 혁대 고리를 맞히는 데 그쳤다. 소백이 긴급한 상황에서 죽은 척하는 기지를 발휘하여 위기를 넘겼고, 관중은 소백이 죽었다고 잘못 판단하여 여유로운 마음으로 귀국길에 올랐다. 하지만 소백이 포숙아의 보좌를 받아 재빨리 제나라 수도에 먼저 도착했고, 왕위에 올라 제환공이 되었다. 이 과정에서 제환공이 자신에게 화살을 쏘았던 관중을 증오하여 곧장 제거하려고 했지만 포숙의 적극적인 추천으로 오히려 관중을 상경 벼슬에 임명했다.


제환공의 입장에서는 험난한 망명 기간과 권력 투쟁 기간 변치 않고 자신을 보좌해준 충신 포숙을 재상에 임명하고 싶었지만, 포숙은 오히려 친구 관중을 강력하게 환공에게 추천했다. 포숙은 관중의 역량을 꿰뚫어 보았고, 관중을 정말 높이 평가했다. 같은 처지의 친구지만 인재를 알아보는 포숙의 능력도 대단하고 그러한 친구를 사심 없이 국정의 최고 책임자로 추천한 그 마음 씀씀이에 저절로 고개 숙여진다. 포숙이 관중을 추천하기를,


“제나라만 다스리시려면 저나 습붕(隰朋), 고혜(高徯) 정도로 족하지만, 천하의 패자가 되어 여러 제후를 호령하고 싶으시다면 관중 없이는 절대로 안 됩니다. 그러니 지난날의 원한은 부디 잊어버리시고 관중을 과감하게 발탁하십시오.”



이런 추천이 과연 가능할까. 그냥 그대로 있어도 제환공이 포숙을 재상으로 앉혔을 텐데. 사실 습붕이나 고혜도 제나라의 대부로서 대단한 인물이었다. 하지만 포숙은 제환공에게 천하를 지배하는 패자(覇者)가 되려면 역량이 탁월한 관중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강력히 추천한 것이다. 제환공의 눈에는 포숙이 최고로 느껴졌을 터. 더욱이 관중은 자신을 해치려던 자가 아니던가.



그래도 제환공이 포기하지 않고 포숙에게 재상을 맡기려 했다. 제환공의 거듭된 제의에도 포숙이 끝까지 관중을 추천하자 이번에는 제환공이 분노한다. 관중이 자신을 향해 활을 쏘았기에 관중의 살을 씹어 먹어도 시원치 않은 자인데, 어떻게 재상으로 추천할 수 있느냐고 질책하게 된다. 그러자 포숙이 간곡히 말했다.



“신하된 자로서 자기 주공을 위하는 활을 쏘는 일은 당연한 것입니다. 만일 그를 등용하신다면 관중은 이제 주공을 위해 충성을 다 바쳐 그 활로 천하를 쏠 것입니다.”


 라고 하면서 포숙이 재상의 자리를 고사했다. 그 얼마나 훌륭한 인품인가. 가만히 있어도 자신에게 돌아올 재상 자리를 친구에게 양보하는 포숙의 처신이 우리에게 참으로 많은 교훈을 준다. 그저 가난한 시절 친구이기 때문에 추천한 것이 아니라 천하를 경영할 역량을 갖춘 인재이기 때문에 강력하게 추천하였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경험하지만, 묘하게도 가장 가깝게 지내는 사람이나 친구가 시기하고 질투하는 경우가 의외로 많다. 그래서 적은 가까이 있다고 하던가.


우리 주위를 돌아보면 친구의 뛰어난 역량을 깎아내려 자신이 그 자리에 오르기 위해 온갖 권모술수를 행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던가. 눈에 보이지 않게 정말 갖은 수단을 다해 친구의 약점을 찾아낸다든가 하여 그 자리를 탐하는 사람들 말이다. 하지만 포숙은 결코 비열하게 처신하지 않았다. 정말 순수하고 대국적인 자세로 친구 관중의 역량을 높이 평가하고 그 역량을 마음껏 펼칠 수 있는 자리를 만들어 주었다. 역량을 갖춘 인물을 적재적소에 등용하여 민족과 나라의 발전에 혁혁한 공적을 세우게 하는 것이 바로 제대로 된 인재 천거가 아닌가.


결국 환공이 포숙의 말을 받아들여 지난날의 원한을 청산하고 관중을 발탁했다. 관중은 포숙의 강력한 천거에 힘입어 제나라의 재상에 올랐다. 그는 환공을 보좌하여 제나라를 새롭게 개혁하여 부강한 나라로 발전시켰다. 농업을 진흥하고 상공업을 활성화하여 백성들을 부유하게 하는 한편 뛰어난 인재를 발탁하고 군사력과 외교를 강화했다. 


그리고 관중이 포숙의 강력한 추천으로 재상을 맡게 되었을 때 처음에 제환공에게 재상 자리를 사양하였다. 제환공이 연유를 물었을 때 이렇게 답했다. 


“ 신이 듣건대 크나큰 집을 지으려면 나누 하나로만은 안된다고 하옵니다. 그것은 마치 큰 바다도 한 줄기의 흐름으로 이루어지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주공께서 꼭 그 뜻을 성취하고자 하실진댄 동시에 다섯 인걸을 등용하십시오.”


“다섯 인걸이라니 그 누구요?”


“모든 진퇴주선(進退周旋)하는 예의와 언변 판단의 강유(剛柔)는 신이 습붕(隰朋)만 못합니다. 청컨대 습붕을 대사행(大司行)으로 삼으십시오. 


또 초목을 개간하고 토지를 개척하고 많은 곡식을 거두어 땅의 이익을 완수하는 것은 신이 영월(寧越)만 못합니다. 청컨대 영월을 대사전(大司田)으로 삼으십시오. 


또 넓은 평원을 나아가되 수레를 서로 얽어 매지 않아도 군사들이 물러서지 않고, 북소리에 삼군(三軍)이 죽음을 두려워 않도록 하는 데엔 신이 왕자 성부(成父)만 못합니다. 


청컨대 왕자 성부를 대사마(大司馬)로 삼으십시오. 또 옥사를 판결하되 중용을 잃지 않고 무고한 사람을 죽이지 않으며 죄 없는 자를 모함하지 않는 것은 신이 빈수무(賓須無)만 못합니다. 청컨대 빈수무를 대사리(大司理)로 삼으십시오.


또 임금의 비위를 거슬리면서 까지 간하되 충성으로써 하며, 죽음을 피하지 않고 부귀로도 그 뜻을 굽히지 않는 것은 신이 동곽아(東廓牙)만 못합니다. 청컨대 동곽아를 대사간(大司諫)으로 삼으십시오. 


주공께서 만일 국가를 다스리고 병력을 굳게 하시려면 이 다섯 사람이 잇을 뿐입니다. 그러고도 주공께서 다시 패업(覇業)을 원하신다면 신이 비록 재주는 없으나 굳이 군명(君命)에 의하여 구구한 힘을 다하겠습니다.”



관중은 제환공을 보좌하여 탁월한 국정능력을 발휘하였다. 공평한 조세제도를 시행하고 막강한 군대를 만들었으며 소금과 철 산업을 국가가 독점 생산하여 재정을 튼튼히 하여 백성을 위한 정책이 가능하게 만들었다. 능력을 바탕으로 인재를 선발하여 국정을 효율적으로 집행하는 중앙집권적 관료제도가 발전하기 시작했다. 나라가 부유하고 백성이 강하게 되자, 강력한 국력을 바탕으로 제후들과 동맹을 주도했다.


관중은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친구 포숙의 도움으로 극적으로 재상에 올라 제나라를 천하의 맹주로 만들었다. 그것도 40여 년간 재상을 맡아 제환공을 춘추오패의 선두 주자로 부각시키고 천하의 제후들을 아홉 번이나 모아 충성 맹세를 받았을 정도로 제나라를 막강한 나라로 만들었다. 포숙의 사람 보는 눈이 얼마나 대단했는가를 알 수 있다.


또한 인재를 발탁하면서 사사로운 원한이나 과거의 사소한 잘못은 과감히 잊어버리고 국가를 위하여 위험에 빠진 친구를 추천한 포숙의 그릇이 그 얼마나 컸던가. 그리고 친구가 재상이 되고 자신은 그 아래 관직을 맡아 업무를 수행하면서 단 한 번도 불편한 기색을 보이지 않고 친구의 국정 수행을 진정으로 도왔고 무엇보다 평생 관중을 배반하지 않고 관중을 후원하면서도 자신은 늘 그 뒤에 서 있었다.


시간이 흘러 오랜 기간 재상의 자리에 있던 관중이 지병이 악화되어 일선에서 물러나게 된다. 관중이 워낙 명재상이었던 만큼 제환공도 관중의 후임을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그 상황에서 관중은 세 사람은 절대로 등용하면 안 된다고 강력하게 주장한다. 역아(易牙)와 수조(竪刁), 개방(開方) 등이다. 그중 역아는 자기 아들을 삶아 요리하여 제환공에게 바쳐 환심을 사려고 했던 인물이다. 수조는 제환공을 보필한다는 핑계를 대며 스스로 궁형을 받아 환관이 되었고, 개방은 부친이 죽었는데도 15년 동안 자신의 조국을 찾지도 않았던 사람이다. 환공이 관중의 제안을 받아들여 처음엔 이들을 내치고 등용하지 않았지만 결국 이들을 등용한다. 역시 권력자에겐 아첨은 달콤한 것이던가.


훗날 환공 이후 이들이 주도하여 공자들 사이에 후사를 다투는 내란이 일어나, 환공이 67일간 유폐된 상태에서 구더기가 담장을 넘어올 때에야 사람들이 비로소 그의 죽음을 알았을 정도로 비참한 말로를 겪게 된다. 춘추오패의 첫 번째 맹주로 천하를 호령하던 그 인물 제환공의 최후는 참으로 비참하였다. 관중이 죽어가면서 그렇게 조심하라고 충고했음에도 결국 참지 못하고 역아, 수조, 개방을 내치지 못한 그 폐해를 여실히 겪게 된다.


관중이 보기에 절대로 기용하면 안 되는 세 인물을 거론했다면, 반대로 제환공이 바라는 후임 인사에 대해서도 언급해야 한다. 관중이 자신을 이어 누가 적당한 인물인지 추천해야 할 상황이었다. 그렇다면 자신의 후임으로 당연히 포숙을 천거해야 했다. 그런데도 관중은 포숙을 후임으로 천거하지 않았다. 포숙의 청렴함과 원칙주의적인 성정이 정치와 맞지 않아 관중 자신이 없을 경우 포숙이 정적들에게 둘러싸여 위험에 빠질 수도 있음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포숙이 지나치게 원칙을 강조하여 엄격한 법률의 잣대로 백성들의 삶을 오히려 힘들게 할 수 있음도 들었다. 관중이 보기에 포숙의 지나친 원칙주의는 다양한 면을 고려해야 하는 정치에는 적합하지 않다는 판단이 앞섰다. 흔히 말하는 정무적 판단이랄까. 이런 관중의 발언을 들은 포숙 휘하의 사람들이 포숙에게 일러바친다.


그러나 포숙은 관중이 죽어가면서도 자신을 천거하지 않아 서운할 법한데도 


“내가 사람 하나는 참으로 잘 보았다. 내가 그러라고 그 사람을 그 자리에 추천한 것이다”


라며 오히려 일러바친 사람을 물리쳤다. 관포지교 부분을 생각하면 관중의 재상 역량보다 포숙의 넓은 인품에 저절로 감동받게 된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사람 사는 원리는 비슷하다. 포숙이 자신의 주군 제환공과 함께 기약없는 망명을 경험하였고, 피가 터지는 권력 투쟁을 거쳐 정권을 잡았다. 그런 상황에서 제환공의 특급 참모였던 포숙이 재상이 되어 부귀와 영광을 손에 잡는 것은 너무나 당연했다.


그런데도 자신을 뒤로 물리고 친구 관중을 전면에 내세워 제환공을 천하 제일의 맹주에 올리고 제나라를 최고 강대국으로 만들었다. 사람치고 어디 자리 욕심이 없는 사람이 있던가. 관중이 죽을 때조차 자신의 후임으로 포숙을 추천하지 않았을 때, 우리 같은 보통 사람이라면 분노하지 않았을까. 내가 어떻게 해주었는데, 죽을 때조차 나를 추천에서 제외하다니 하는 분노와 모멸감 때문에 잠들 수가 없을 것이다. 그런데 포숙은 달랐다. 그래서 관중이 훗날 남긴 말은 참으로 우리에게 진한 울림을 준다. 



관중이 죽기 전에 이런 말을 남겼다.


                              “나를 낳은 것은 부모이지만 나를 아는 이는 오직 포숙뿐이다.” 


                                                                   “生我者父母 知我者鮑子也”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