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네가 전망대-스위스의 배신
역시나 날이 맑다. 꼭 한국의 전형적인 가을날 같다!
무언가 해야 하는 의무감 없이 눈을 뜨는 아침은 행복하다. 자연스럽게 일어나 아침을 먹으며 오늘은 수네가 전망대를 가보기로 했다. 봐도 봐도 질리지 않는 알프스의 매력에 푹 빠졌나 보다. 요즘 강 뷰가 인기라고는 하지만 내겐 산 뷰가 최고다!
콩알이와 난 일찌감치 준비를 마치고 푸니쿨라 타는 곳으로 갔다. 일찍 갔다가 내려와 점심을 먹을 생각이었다. 매표소 직원이 편도와 왕복 중 무엇을 줄까 물었다. 난 가벼운 마음으로 전망대에서 걸어 내려오면 얼마나 걸리냐고 물었다. 직원은 1시간 30분이라고 대답했고 우린 편도 티켓을 달라고 했다. 까짓 1시간 30분 걷는 건 아무것도 아니니 제대로 알프스를 즐겨 보자며!
영화 속에서나 볼 법한 산악열차를 타고 올라가는 짧은 시간 내내 탄성을 연발했다. 3대가 덕을 쌓아야 볼 수 있다는 마터호른을 비롯해 알프스의 눈 덮인 봉우리들은 그 어떤 말로도 표현할 수 없는 감동을 주었다. 그냥 그대로 눌러앉아 살고 싶었다.
전망대 카페로 홀린 듯이 들어가 파라솔 아래 자리를 잡고 앉았다. 겁나는 스위스 물가 때문에 한 번도 들어가지 못한 카페를 겁 없이 들어간 것이다(눈앞에 펼쳐진 경치 때문에 커피가 얼마였는지조차 기억에 없다). 콩알이도 그랬는지 커피와 디저트를 사 왔다. 커피를 마시는 내내 콩알이는 사진을 찍어 대기 바빴다.
건너 테이블에 동양인 가족이 자리를 잡았다. 콩알이 또래의 아들과 부모였다. 보기 흔한 조합의 여행이 아닌지라 저절로 귀가 쫑긋해졌다. 한국인들이었다. 뚱해 보이는 아들에 비해 부모는 즐거워 보였고 우리에게 사진을 찍어 달라고 했다. 콩알이가 열심히 사진을 찍어 주자 사탕을 한 움큼 건네고 자리를 떴다. 아, 다 큰 아들과 여행하면 저런 거구나 싶은데 콩알이가 한마디 거든다.
“엄마는 딸이 있어서 다행인 줄 알아야 해!”
마음껏 호사를 누리고 안내판을 따라 내려오기 시작했다. 더 위로 올라가고 싶었지만 아직 눈이 쌓여 있어 내려오기로 한 것이다. 가끔씩 지름길 같은 곳이 보였지만 여자 둘에 초행길이라 자전거길을 따라 내려왔다. 우리는 내려가는 길이었지만 거꾸로 그 길을 자전거로 올라오는 사람들이 눈에 띄었다. 산악자전거에 터질 듯한 허벅지로 힘차게 페달을 밟는 그들의 표정은 한결같이 환했다. 그들의 젊음이 부럽게 느껴지는 유일한 순간이었다.
그런데 1시간 30분이라던 직원의 말과 달리 2시간을 내려왔는데도 마을이 보이지 않았다. 슬슬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언젠가 내려가지긴 하겠지만 생리적 욕구가 문제였다. 갈증도 나고 배도 고프고 무엇보다 커피 때문에 화장실이 가고 싶었다. 콩알이 사정도 마찬가지였다. 우린 화장실 표시가 나오기만을 바라며 걷고 또 걸었다.
드디어 멀리 레스토랑 겸 카페 표지판이 보였다! 우린 거의 뛰다시피 걸어 도착했다. 하지만 문이 닫혀 있었다! 성수기에만 운영한다고 쓰여 있었고 당연히 화장실도 잠겨 있었다. 하, 며칠만 있으면 성수긴데!
우린 서로를 격려하며 다시 속도를 냈다. 남은 방법은 최대한 빨리 내려가는 것밖에 없었다. 이 멋진 곳에 화장실이 이렇게 귀하다니! 알프스의, 아니 스위스의 배신이었다!
장장 3시간에 걸친 뜻밖의 트래킹이었다! 다리가 아픈 것도, 배가 고픈 것도 문제가 아니었다. 마침내 하산에 성공한 우린 곧장 숙소로 향했고 곧 평화를 얻었다. 그때가 2시 반이었다.
여행의 돌발은 당황스러웠지만 그렇게 또 하나의 추억을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