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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anielC Jul 16. 2019

여름의 낙수_06 EnD

단편소설집

*

내가 그 오래된 사건의 전말을 비교적 구체적으로 떠올리게 된 것은 건너편 아파트를 방문하고 난 뒤 열흘쯤 지나서였다. 카퍼레이드가 펼쳐지고 난 직후의 도로처럼 어수선하던 내 의식은 어느 정도 정돈되었고 차분해지고 있었다. 더위가 한 풀 꺾이고 있었기 때문이었는지도 몰랐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채 매일매일이 반복되었다. 나는 오전에 늦게 일어나 늦은 아침을 먹고 아내의 출근을 전송한 뒤 베란다 창으로 저녁해가 비껴들 때까지 책상에 앉아 소설을 썼다. 나의 생활은 다시금 단조로워졌고 마음의 부황은 치유된 듯 보였다. 기억을 온전히 떠올리게 되면서, 다용도실 깊숙이 처박혀 있던 상자들 속에서 끝내 아무에게도 공개하지 않았던 친구의 유품을 찾아내고 나서야 내 안의 혼란들은 가라앉은 듯하였다.


그러니까 그 여자를 만난 것은 전혀 뜻밖이었다. 나는 유품이 들어 있는 꺼멓게 기름때에 전 서류봉투를 들고 집을 나섰다. 결코 내용물을 확인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벌써 어둑어둑해져서 놀이터의 놀이기구들이 풀어진 형상으로 눈에 들어오고 있었다. 그녀는 시소의 가운데 기둥에 걸터앉아 있었다. 나는 그녀를 알아볼 수 없었지만 내가 다가가자 그녀가 또렷한 목소리로 안녕하세요?라고 내게 인사를 했던 것이다. 내가 쭈뼛거리자 그녀는 708동 501호, 하고 자신의 존재에 대한 짤막한 설명을 달았다.


비교적 그녀의 음성은 침착했다. 이제 모든 것은 평안을 회복했고 일상의 질서로 되돌아갔다는 느낌이 그녀의 말투에는 배어 있었다. 나는 본능적으로 서류봉투를 든 손을 등 뒤로 돌렸다. 서늘한 느낌이 등골을 타고 흘렀다. 그녀는 마치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저야 뭐⋯⋯. 여행은 어땠습니까? 나는 그렇게 말하고 나서 한참 만에야 그녀가 앉아 있는 시소의 쇠기둥에 나란히 걸터앉았다. 그토록 자연스럽게 그녀와 인사를 주고받을 수 있다는 게 전혀 이상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렇다고 그녀에게 친밀감을 느꼈던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낯섦이나 친밀감, 그리고 어색함과는 전혀 다른 성질의 느낌이었다. 가까이 서 본 그녀의 얼굴은 평온했으나 지나치리만큼 창백했다.


어머니를 뵜었지요, 집을 비우신 동안에.


그녀가 여행에 대한 나의 물음에 대해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었으므로 나는 덧붙여 말했다. 그러자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고는 발치로 시선을 떨구었다. 바람이 한 차례 불었고 놀이터 담장 밑에 늘어서 있는 축사로부터 분뇨 냄새가 강하게 풍겼다.


전 그쪽에서 그날 일을 처음부터 전부 봤다는 걸 알고 있어요.


내가 담배 한 개비를 거의 다 피웠을 때 그녀가 느닷없이 말했다. 그녀의 말투는 어느 정도 단정적이었고 그리고 공격적인 구석도 없지 않았다. 나는 대꾸 없이 담배꽁초를 모래에 떨구고 발로 지그시 눌렀다. 대체 이 여자가 내게서 확인하고 싶은 것은 무엇인가? 얼른 답이 떠오르지 않았다.


⋯⋯잊으세요,라고 나는 한참 만에야 그렇게 대답하고 천천히 일어섰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더 이상 그녀에게 내가 해줄 말은 없었다. 결국 나는 한낱 구경꾼 -목격자에 불과한 것이었다. 그녀가 부재중일 때 그녀의 아파트에 찾아갔던 것도 자신을 제어하지 못하고 저지른 충동적인 행위에 불과했다. 나는 사고로 아이를 잃은 이 가엾은 여자에게 아무것도 해줄 것이 없었다. 이제껏 나의 삶이 그러했던 것처럼 현재도 그렇고 앞으로 줄곧 나는 타인에게 아무것도 해줄 수가 없는 그런 평범한 인간에 불과한 것이다.


그렇게 쉽지가 않군요. 당신이 이렇게 내 앞에 존재하고 있는데, 내 앞에서 말하고 쳐다보고 담배 피우고 엄연히 살아 있는데 내가 어떻게 잊을 수 있단 말인가요?


그녀는 마치 어둑신한 허공에 보이지 않는 줄이 매어져 있어 당겨진 것처럼 쑤욱 일어서면서 거의 굴곡이 없는 음성으로 말했다.


나는 멈칫하다가 그녀의 얼굴, 눈빛을 자세히 들여다볼 수 있는 거리까지 가깝게 그녀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그녀의 조금은 비어 보이는 눈동자를 정확히 들여다보면서 낮게 중얼거렸다.


내가 본 것은 아이가 있었고, 그리고 떨어졌다는 것뿐입니다. 그뿐이에요. 내가 그것을 사고로 인식하게 된 것은 한참이 지난 뒤였죠. 그 사고 -그러니까 아이가 추락한 그 사고에 관한 한 아무도 관련되지 않았습니다. 내가 당신에게 말해주고 싶은 것은, 이제 그만 잊으라는 겁니다. 당신 자신을 연관시키지 말고, 그리고 나를 연관시키지 말아 줘요. 아마 내가 당신을 찾아갔던 것은 이 말을 해주고 싶었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목격자인 내가 당신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싶었는지도⋯⋯. 하지만 이젠 아무래도 상관없어요. 우리는 살아 있고, 앞으로도 오랫동안 살아갈 거예요. 이건 마치 계절을 나는 것과 같지요. 모든 걸 잊으세요. 때론 마지막 남은 이 방법이 가장 효과적이라는 걸 당신도 깨닫게 될 겁니다. 깨끗하게 잊는다는 거⋯⋯.


나는 어느 순간부터 내가 말을 하지 않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나의 대부분의 말은 그저 머릿속에서 웅웅거리고 있을 뿐이었다. 천천히 그 여자의 텅 빈 듯한 시선이 어둠 속으로 멀어져 갔다. 그리고 마지막 한 점 남은 크림이 커피에 녹아들듯이 까무룩 하고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마치 그날 그 시간, 그 어두운 창 저편으로 아이를 놓쳐버린 여자가 사라져 버리 듯이, 그렇게.


놀이터 담벼락 한쪽 구석에 있는 쓰레기 소각로에 불 붙인 서류봉투를 던져 넣었다. 누린내가 풍겼다. 나는, 나의 모든 날조된 악랄한 기억들, 그리고 살기로 과장된 몽상들이 그 어두운 소각로 속으로 사라지는 것을 바라보며 온몸에 소름이 쭉 돋는 것을 느꼈다. 지나간 연대에 대한 죄책감의 사슬을 어떤 방식으로든 풀어내야만 희미하게나마 미래에 대한 전망이 가능해질 것이다. 사위어가는 불꽃을 바라보며 내가 떠올린 마지막 생각이었다.

불냄새는 차츰 희미하게 엷어졌고 나는 몸을 웅크렸다. 비로소 그 지독했던 여름이 내게서 한 걸음 비켜섰다는 느낌이 들었다. 어둑신한 놀이터의 모퉁이를 돌아 나올 때 나는 힐끔 뒤를 돌아보았다. 그 여자의 모습이 지나간 연대의 유령처럼 흐느적거리고 있는 것 같았다.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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