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년 만의 세입자 탈출
스무 살 때 8평 작은 원룸에서 자취 생활을 시작한 이후로 어언 12년 차, 드디어 나에게도 내 집이 생겼다. 지난 한 달간은 틈틈이 인터넷에서 매물을 찾고 점심시간과 주말시간을 쪼개어 뷰잉을 다니느라 정신없이 바빴다. 워털루와 사우스워크, 엘리펀트 앤 캐슬, 노스 그리니치까지 뷰잉을 다녀본 결과, 사우스워크에 있는 신축 플랏으로 이사를 가기로 결정했다.
집을 사기로 결정하고 나서 일단 모기지 브로커를 통해서 얼마나 대출을 받을 수 있는지부터 알아보기 시작했다. 모기지 브로커가 여러 옵션들을 알아봐 준 결과 메트로 뱅크가 가장 큰 금액을 대출해줄 수 있다고 했었다가 나의 영국 내 주소 히스토리 증명이 3년 미만이어서 대출을 거절당했다.. 어쩔 수 없이 조금 적은 금액을 대출받는 대신 이자율이 더 낮은 바클레이를 통해 모기지를 받기로 했다. 원금과 이자를 함께 상환하는 Repayment 옵션이라 지금보다는 더 많은 주거비를 지출하겠지만, 실제 은행에 내는 이자는 지금 내는 월세보다 훨씬 적어서 대출금을 열심히 갚으면 돈을 모을 수 있는 소비 구조가 되었다.
대출 절차를 진행하면서는 우리 예산 내에서 살 수 있는 여러 옵션들을 둘러보며 타협하는 과정을 거쳤다. 집을 고르는 가장 중요한 기준은 일단 인터넷 스피드.. 한국에서야 광케이블 안 깔려있는 건물을 찾는 게 더 어렵지만, 런던에서 광케이블 깔려 있는 집을 찾다 보니 자연스레 선택지는 모던 플랏으로 좁혀지게 되었다. 옛날에 지어진 빅토리안 플랏들은 인터넷 속도가 잘 나와봐야 30메가라 둘 다 재택근무를 해야 하는 우리에겐 적합하지 않았다.
모던 플랏을 위주로 찾아보다 보니 의외의 복병은 관리비 개념으로 내야 하는 서비스차지였다. 모던 플랏은 대개 화려한 부대시설을 갖추고 있는 경우가 많은데, 그건 그만큼 관리비가 비싸다는 말이 된다.. 노스 그리니치에 있는 플랏이 헬스장, 수영장, 프라이빗 영화관, 가라오케, 오피스 공간까지 갖추고 있어서 마음에 들었는데, 1년에 거의 6천파운드를 서비스 차지로 내야 한다는 말을 듣고 마음을 접었다.
그다음 타협해야 할 조건은 위치와 크기였는데, 남편은 1존 안에 있어야 할 것, 나는 3 베드 이상의 크기일 것이 가장 중요한 조건이었다. 우리가 집을 사게 되면 최소한 3년은 살게 될 건데 그동안에 만약에 손님이 놀러 온다거나, 새 생명체가 등장하게 되면 2 베드로는 충분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런데 어차피 평생 살 집이 아니라면 다시 팔 때 유리한 조건일 집을 사는 게 낫겠다는 생각에 결국은 위치를 더 중요하게 고려하기로 했다. 버몬지와 사우스워크를 선택지에 두고 고민했는데, 버몬지에 있는 플랏은 런던 브리지 역에 가깝긴 했지만 사실상 2존인 위치였고, 플랏 단지 안은 깨끗하고 좋았지만 주변 환경이 좀 음침해서 밤에는 돌아다니기 무서울 것 같아서 패스했다. 그래서 사우스워크의 플랏에 있는 3 베드로 오퍼를 넣었다가 까이는 바람에 눈물을 머금고 2 베드로 눈을 낮춰야 했다ㅠㅠ 사실 3 베드를 사려면 가지고 있는 모든 돈을 완전 탈탈 털어야 해서 부담스러웠는데, 당장 둘이 살기에는 2 베드 사이즈가 더 적합하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편해졌다. 이 집에서 열심히 돈 모아서 몇 년 뒤엔 3 베드로 이사 가야지ㅋㅋ 위치를 가장 1순위로 두고 고른 집이니만큼 지하철역에서 정말 가깝고, 시내 어디든 웬만해선 걸어갈 수 있고, 특히 내 회사까지는 걸어서 10분 거리라 다시 출근하게 된다고 해도 출퇴근 스트레스가 덜 할 것 같다. (회사로 출근할 일이 별로 없다는 게 함정..ㅋㅋ)
그래서 오늘 계약금을 입금했고 변호사와 서류 작업을 진행 중이다. 모든 절차가 무사히 잘 끝나면 모든 시공이 완료되는 10월쯤에 이사를 갈 수 있을 것 같다! 가구는 이제부터 사서 채워야 하는데 뭘 꾸미고 쓸고 닦는덴 젬병인 터라 누가 인테리어는 대신 와서 꾸며줬음 좋겠다ㅠㅠ 필요한 침대나 소파 찾아보는 대신 아두이노로 스마트홈 시스템 구축하기, HiFi 오디오 기기 이런 것들만 자꾸 보게 된다ㅋㅋ
아무튼 아직도 내가 집을 게다가 런던에 샀다는 게 얼떨떨하고요.. 12년간의 떠돌이 생활을 청산할 수 있다는 안도감이 들면서도 이제 앞으로는 정말로 회사를 막 그만두면 안 되겠다는 부담감도 느껴진다. 그래도 더 이상 내 노동이 남의 대출을 갚아주는데 쓰이지 않을 테니 좀 더 열심히 일하고 많이 벌어야겠다는 의욕이 샘솟는다. 이젠 안전한 나의 둥지에서 더 탄탄한 커리어를 쌓아가는데 집중하자고 다짐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