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택은 버렸다와 같다.
내가 버린 것에 보내는 애도.
오십을 바라보는 나이.
나는 마지막 도약을 십 년으로 잡고 달리는 중이다.
내게 더 이상의 기회는 없을 거라 생각한다.
천년을 살 것처럼 또는 칠십을 청춘이라 말하는 것도 욕심 같다.
늙음과 젊음은 엄연히 그 자리가 다르다.
나는 영혼이 꺼진 눈이 무섭다.
다 꺼진 육신에서 불타는 눈도 무섭다.
의지와 욕심은 다르다.
욕심을 욕심이라 부르는 건 그것이 나쁘기 때문이다.
나는 욕심을 부려서 눈살 찌푸리게 하고 싶지 않다.
불타는 눈이 무서운 건 가질 수 없는 걸 탐하기 때문이다.
각각의 나이에는 어울리는 의지가 있다.
요즘은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며 욕정을 끌어낸다.
삿된 망언에 흔들리다 보면 죽음을 준비할 수 없다.
죽음도 충분히 준비하고 맞이할 단계다.
그러므로 슬기롭게 은퇴를 준비하고, 명예롭게 물러나, 영혼을 위해 살아가는 시간을 충분히 갖는 게 옳다.
그때조차 젊은이에게 양보하지 않는 태도는 추하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내가 버린 것이 무엇인지 떠 올려본다.
정신없이 달렸고 열정하나 젊음하나로 다 해낼 거라 믿었다.
그러나 관절들이 망가지고 피부와 근육의 탄력이 사라지기 시작하는 지금 나는 아름다울 나이 나를 충분히 가꾸지 못한 게 아쉽다.
그러나 내게는 아직도 현역의 시간이 남아있다.
아이들을 독립시켜야 하는 부모 노릇을 마무리하지 않는 것, 노후준비를 제대로 못하는 건 답이 아니다.
그러므로 부모가 할 일을 마치겠다.
또 인간은 타인에게 희망을 줄 필요가 있다.
내 존재가 정답일 수 있고 오답의 표본일 수 있다.
내가 영혼이 빠져나간 눈과 탐욕으로 빛나는 눈을 무서워하듯 내가 남에게 두렵고 무서운 미래가 되길 원하지 않는다.
그래서 지독하게 몸부림치며 죽을병을 얻지 않는 것도 복이다.
어려서 우리 집 어른들은 암과 고혈압으로 일찍 세상을 떴는데 고혈압은 조용하고 빠르게 죽지만 암은 나를 두렵게 했다.
다 큰 어른의 눈에서 눈물 콧물이 날 정도로 정신까지 후비는 아픔과 삭신을 부셔먹는 암.
그런 두려움을 주변에 주고 싶지 않다.
소원이 있다는 건 지도를 얻을 가능성이므로
좀 속이 보여도 나는 소원한다.
나의 늙음이 다른 이를 두렵게 하지는 않고 소멸되게 하는 시간이 되게 해 달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