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 선생님이 스웨덴 학생들에게 러시아어와 문화를 가르치면
평소 수업과 선생에 대해 어떤 생각을 하는지 감잡기 어려웠던 한 어른 학생이 수줍은 표정으로 건네 준 뜻밖의 선물을 받았다. 고급스러운 파란색 종이로 싸고 황금색 리본으로 장식한 벨기에 초콜릿.... 그래서 더 감동했다.
코로나 발발로 스웨덴에 돌아오기 직전에 러시아에서 찍었다는 붉은 광장, 크렘린 사진을 보여준다. 학생이 보여준 사진 속에 있는 모스크바의 야경은 내 기억 속의 그것보다 더 웅대하고, 깨끗하고 화려하다.
네바 강 위에 배들이 지나가라고 다리가 들린 새벽의 페테르부르크의 경치도...
나의 20대 시절 페테르부르크 대학교... 광활한 러시아와 구 소련 연합에서 뽑혀서 온 공부 좀 한다는 친구들에 러 정부 초청 외국인 대학원생들이 모여서 치열하게 공부하고, 시간 쪼개서 생활비까지 벌려고 (정부에서 뽑힌 학생들에게는 등록금이 면제되고 장학금이 제공되지만 인플레이션으로 치솟는 물가로 인해 장학금만으로 생활하기는 턱없이 부족했다) 두세 군데에서 일하기 - 어문계 학생들이니 아무래도 언어 가르치기나 통. 번역 일 병행하는 것... 개인적으로는 여행 온 것처럼 시간이나 삶이 여유 있어 보였던 서구에서 온 단기 유학생이나 일본 학생보다는 그곳이 삶의 터전이기에 치열하게 살던 구 소련 학생들이 정서상 더 가깝고 친해지기도 어렵지 않았던 것 같다. 한편으로 러시아어가 외국어인 학생들보다는 현지 친구들을 많이 만나는 것이 더 좋기도 했다.
금요일 저녁이 되면 종종 친구들과 만나 이야기 꽃을 피며 숨을 돌린다. 여름이 가까워지면 큰 배들이 지나갈 수 있도록 네바 강의 다리가 들린다. 다리가 들려서 귀갓길이 막혔다는 핑계로 우리는 어느 기숙사에 있는 누구네 방에 몰려가서 집에 갈 생각들을 안 하고 밤새 잠도 안 자고 학교 생활, 젊은 시절에 샘솟는 아직 살아보지 않은 삶에 대한 철학, 선생님 이야기, 누가 누구랑 사귄다더라 등 남 연애 이야기 등으로 날이 새는 줄 몰랐다.
기타를 잘 치는 남학생이라도 있으면 남학생의 가타 반주에 맞춰 빅토르 최, 데데떼, 그리고 당시 인기가 많던 여성 록가수 젬피라의 노래를 함께 불렀다. 그 남학생은 세상 고민 다 짊어진 듯한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담배 한 개비를 입에 비스듬하게 물고는 빅토르 최의 "담뱃갑 Pachka segaret"이라는 노래를 기타로 연주하곤 했다. 그러면 한 여학생은 반한 눈으로 그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누군가가 고향에 다녀오면 고향집 지하실에서 폴란드인 아버지가 직접 훈연해서 만들어 줬다는 소시지, 기름이 잔뜩 달린 시베리아 식으로 만들었다는 살라(베이컨과 비슷하지만 익히지 않고 돼지기름이 잔뜩 달린채로 건조해서 호불호가 많이 갈린다)를 가져왔다. 번역 원고를 한 회사에 넘기고 돈을 받았다는 동양어문학부 친구가 사 온 초콜릿이 코팅된 웨하스 케이크를 디저트로 내오고, 한 친구는 익힌 쌀에 오이, 당근, 완두콩, 감자, 게맛살을 마요네즈와 스미따나에 버무려 넣어 만든 올리비에 살라드 등을 만들어온다. 나는 생크림 꿀 쿠키를 주로 사왔다. 우리는 가져온 음식을 함께 나눠 먹으며 밤새 놀다가 들렸던 네바 강 다리가 다시 놓이는 새벽이 되면 아쉬워하며 친구 집을 나서 다리를 건너 숙소까지 걸어왔다. 그 길들... 도스토옙스키의 죄와 벌의 주인공 라스꼴니꼬프가 선과 악에 대한 철학적 상념을 하며 헤맷을 그 길들.. 그리고 고골리의 외투의 주인공이 유령이 되어서 떠돌아다녔을 그 환상의 도시...
젊음이라는 묘약 덕택에 조금만 자고 나면 그다음 날 생활에도 별지장이 없었다.
이제는 2-3 시간 비행기 타고 출장 다녀오는 것조차 피곤할 때가 있다. 지금은 전염병 때문에 출장은커녕 여행도 못하지만 말이다.
러시아어 수업 시간에는 러샤 문화와 문학 이야기도 들려주고 싶어서 수업 중 문화/문학 코너도 마련했다. 지난주에는 푸시킨의 주요 작품 이야기, 실제 사용하던 말과 동떨어진 당시 문학어가 구어와 통합되어 좀 더 자연스러운 현대 러시아 문어가 형성되고 사용되는데 그가 얼마나 큰 기여를 했는지 목청 높여 얘기해 줬다.
특히 구구절절한 남. 녀 주인공의 어긋난 로맨스, 생활상, 잉여 인간, 문제 많던 사회상을 담은 대표작으로 내용은 그다지 장엄한 서사시 같지 않은데 부제는 거창하게 “시로 된 소설”인 "예브게니 오네긴"의 일부와 다른 짧은 시들 몇 편을 낭독해 줬다.
그랬더니 어른 스웨덴 학생들은 따찌아나와 오네긴의 사연이나 결투 이야기보다는 샴페인과 보르도를 슬프거나 즐거울 때 함께하는 벗이라며 찬미라는 시구절에 입맛을 다시면서 열광하는게 아닌가? 이 스웨덴 학생들을 내가 어찌 원망할 수 있겠는가......
스웨덴에서 독한 술뿐 아니라 알코올 함유량이 특정 수준 이상인 일반 맥주, 샴페인, 포도주 판매도 국가가 통제해서 국가가 운영하는 "시스템 회사" 체인점에서 특정 시간에만 살 수 있다. 금지된 과일이 더 달콤하다고 이래서 사람들은 주류를 특별하게 생각하나 보다.
아차, 우리 학생들 중 한 명은 아직 20살도 안 되었는데... 잘못하다가 미성년자도 참여하는 수업시간에 선생이란 작자가 문학 작품 속 등장한 주류 찬미를 주도한 게 될까 봐 재빨리 소재를 “작가의 생애”로 전환했다.
생애를 소개하며 보여준 프레젠테이션에 나타난 푸시킨의 초상화를 보고, 그의 조상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한 어른 남학생은 "우와... 조부가 아프리카 출신 외국인 노예였는데 짜르의 눈에 들어 상류층이 되었네"라며 대놓고 신기해했고, 한 어른 여학생은 “푸시킨이 그래서 잘 생겼구나"라며 눈을 반짝이며 프레젠테이션을 본다. 내가 보기에 푸쉬킨이 미남은 아닌데..... 아니 왜들 별세한 지 몇 백 년이 러시아 작가 외모와 출신에 대해 평가를 하는 걸까.. 나도 모르게 한몫 거드는 말이 입에서 튀어나왔다. "미남에 글까지 잘 썼으니 당시 얼마나 인기가 않았겠어요?" 돌아오지 못할 강을 건넌 것 같아 아차 싶었다.
강의실 밖에서 따로 한 명씩 만났더라면 너무나도 점잖았을 학생들 (중년처럼 보이는 회계사, 글로벌 회사 간부, EU스웨덴 대표로 일했다는 사람들, 눈이 반짝이는 석사과정 학생, 벌써 4개 국어를 배운다는 똘똘한 고등학생, 고위 간부로 퇴직한 전 군인 공무원 등)-이 강의실 안에서 함께 뭉치면 전체는 부분들의 합보다 크다는 것을 입증이라도 하려는 듯 스웨덴판 봉숭아 학당 학생들이 되는 것 같다. 아무래도 선생인 내 탓이 큰 것 같다. 이런 내 생각을 알 리가 없는 학생들은 나의 시낭송을 듣고는 뭔가 진지하고 심오한 걸 배웠다는 흡족한 표정을 짓는다.
위대한 러시아 작가 이야기가 너무 산으로 간 것 같아서 분위기를 바꿔 과제 검사를 하기로 했다.
"자, 숙제해 온 거 누가 먼저 발표해 볼래요?"라 했더니 서로 아무 말 없이 잠시 눈치를 보다가 동시에 "저요, 저요"한다. 이 스웨덴 학생들의 모습이 똑똑한 버전의 맹구와 오서방의 모습과 오버랩된다. 가족과 스키여행 가거나 아파도 결석 안 하고 온라인 동시 진행을 부탁하며 차안에서 수업에 참여하는 성실한 학생들이다.
러시아 어가 어렵다고들 하면서도 모국어가 어쨋든 같은 인도유럽어에 속하는 스웨덴어라서 곧잘 배운다. 의외로 러시아어와 스웨덴어가 비슷한 점도 있다.
다음 강좌가 시작할 때까지 공백이 길면 애써 배운 거 잊어버린다는 학생들의 아우성에 등 떠밀려 가을에 개강할 수업을 한 주만 쉬고 여름 오기전에 시작하기로 했다. “선생은 무쇠인간 로봇 태권브이가 아닌데...”하고 절규가 나오는 걸 간신히 맘 속에 눌러 담았다. 몸은 좀 힘들다. 그래도 왠지 싫지는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