넷플릭스에서 역대급 흥행에 성공한 오징어게임의 시즌2가 오픈을 앞두고 있습니다.
글로벌 시장에서 한국 드라마는 오징어게임 전과 후로 나뉠 만큼 그 위상이 많이 달라졌습니다. 한국 드라마 콘텐츠가 상대적으로 저렴한 제작비에도 아시아를 중심으로 전 세계에서 높은 흥행 성과를 보였기 때문이었죠. 하지만 그런 성과에도 아쉬운 점은, 당시 주목받았던 한국 드라마 콘텐츠가 여전히 질적으로 의미 있는 성장을 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질적인 성장'이란 드라마 자체의 퀄리티(스토리, 연출, 캐릭터 등)보다는 시장과 시스템의 퀄리티를 의미합니다. 제작사들의 비즈니스 모델은 여전히 단편적이고, 채널 종속적인 구조도 바뀌지 않았습니다. 현실적으로 콘텐츠를 더 많이, 더 비싸게 파는 게 전부인데 OTT채널들도 성장이 정체되며 전반적인 산업 분위기가 침체되었죠. 한국 콘텐츠는 여전히 글로벌 시장에서 주목받고 있는데 왜 이런 점들은 나아지지 못했을까요?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오늘 이야기할 내용은 한국 드라마 콘텐츠의 2차 판권 사업에 대해서입니다.
[넷플릭스와 일본애니메이션 시장]
한편 넷플릭스가 한국드라마만큼, 혹은 그 이상으로 집중한 콘텐츠 시장이 있었습니다. 일본 애니메이션입니다. '23년 하반기 넷플릭스 흥행 상위 100개 콘텐츠 중 1/3에 해당하는 33편이 애니메이션이었다고 하죠. 일본은 넷플릭스가 2015년 아시아에서 처음 진출했던 시장이기도 합니다. 인연이 깊죠. 넷플릭스가 일본에 진출하기 시작하며 일본 애니메이션 산업도 큰 지각변동이 일어납니다. 1조 엔 초반에서 성장이 정체되어 있던 일본 애니메이션 시장규모가 갑자기 연간 두 자릿수 성장을 해보인 것이죠. 넷플릭스를 포함한 해외매출의 가파른 증가 덕분이었습니다. 2013년 일본 애니메이션 시장에서 해외시장이 차지하는 비중은 25% 수준이었으나 2015년 49%까지 치솟으며 2022년에는 56%까지 증가했습니다.
넷플릭스가 일본에서 추진 중인 애니메이터 육성정책도 주목할 만합니다. 열악한 처우로 유명한 일본 애니메이션 업계와 달리 넷플릭스는 수강생들에게 생활비와 수업료를 지원합니다. 이들은 일본의 신입 애니메이터보다 높은 금전 대우를 받습니다. 교육이 끝나면 넷플릭스 오리지널 작품 제작에 참여하죠. 전혀 나쁠 게 없는 조건입니다. 넷플릭스의 영향력이 너무 커지자 일본 애니메이션 업계는 이를 경계하는 모습을 보일정도입니다. OTT 종속적인 구조가 되면 일본 애니메이션 산업의 큰 헤게모니인 제작위원회 시스템을 위협할 수 있기 때문이죠.
제작위원회란 원천 콘텐츠 IP를 갖고 있는 만화 출판사와 애니메이션 회사가 중심이 되어 TV방송국, 완구회사, 식품회사, 광고회사, 게임회사 등 IP 사업화와 관련된 여러 이해관계자들이 공동으로 애니메이션 제작을 위한 자본을 투자하는 방식입니다. 이들은 애니메이션으로 발생하는 로열티를 지분에 따라 배분하거나 특정 사업권리를 독점적으로 가져가는 방식으로 수입을 창출합니다. TV채널은 독점 방영권을, 게임회사는 해당 IP를 활용한 게임개발 권리를, 완구회사는 캐릭터를 활용한 완구 제작 권리를 가져가는 식이죠.
애니메이션의 경우 편차가 있지만 보통 회당 2~5억 원 수준의 제작비가 필요한데, 100회를 제작한다고 하면 적게는 200억 원에서 최대 500억 원까지 자금이 소요됩니다. 단일 애니메이션 회사가 감당하기에는 부담스러운 금액이죠. 이런 리스크를 헷지 하면서 수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탄생한 게 제작위원회입니다. 제작위원회는 일본 애니메이션 산업의 2차 판권 규모를 키워내는데 매우 큰 역할을 했습니다.
[일본 애니메이션 시장의 핵심은 MD 2차 판권]
핵심 2차 판권 사업인 MD 시장규모가 전체 일본 애니메이션 시장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25% 수준입니다. 아까 일본 애니메이션 시장에서 해외 시장규모가 50% 정도라고 했으니, 사실상 해외 시장을 제외하면 내수 시장의 절반을 MD가 차지하는 셈이죠. MD시장이 일본 애니메이션 시장을 이끌어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결국 애니메이션은 그 자체로도 매출이 발생하지만 이런 2차 판권을 위한 일종의 비히클(Vehicle) 역할을 하는 건데요, 애니메이션 제작사들도 제작위원회에 포함되는 만큼 제작위원회는 제작사가 덩치를 키우고 꾸준히 생존할 수 있는 기반이 되는 셈입니다. 그렇게 성장하여 자체 제작 비용을 감당할 수 있을 만큼 커진 제작사들은 제작위원회를 거치지 않고 애니메이션을 제작하기도 합니다. 제작위원회 제도가 애니메이션 제작사들이 성장할 수 있는 발판이 중요하다는 걸 알 수 있죠.
물론 장점만 있진 않습니다. 일본 애니메이션 업계가 이토록 열악한 환경일 수밖에 없는 데는 아이러니하게도 제작위원회 영향이 적지 않기 때문이죠. 애초에 콘텐츠로 돈을 벌기보다 2차 판권을 통한 수입창출에 집중하다 보니 애니메이션 제작이 우선시되지 않는 경우도 많습니다. 낮은 비용으로 적당한 퀄리티를 양산해 각 채널에 뿌리고 관련 굿즈를 팔겠다는 생각이죠. 비용을 좀 더 지불해서라도 좋은 퀄리티의 작품을 제작하려는 제작 생태계의 방향과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제작위원회는 이런 명과 암이 존재합니다. 그럼에도 콘텐츠 2차 판권의 사례를 스터디하기 위해 제작위원회를 빼놓을 수 없는 것도 사실이죠.
다시 한국 드라마 산업으로 돌아와 보겠습니다. 한국에서는 드라마 제작사가 IP를 소유하는 게 일반적이지 않습니다. 제작비를 OTT에서 받든, 방송국에서 받고 협찬이나 PPL을 붙이든 어떤 방식으로든 자금을 끌어와 드라마를 제작한 뒤 일정 마진을 받고 해당 채널에 판매/납품하는 형태죠. 국내 드라마 한 편 제작비가 적게는 10억 원에서 많게는 30~40억에 달하는 상황에서 제작사가 이를 100% 부담하는 것은 매우 어렵습니다. 10부작이라고 해도 제작비가 100억에서 최대 400억에 이르는 셈이니까요. 아직 규모가 크지 않은 국내 제작사들이 감당하기엔 리스크가 너무 큰 거죠. 제작사의 규모화가 이뤄지지 않으면 영원히 외주 형태로 머물 수밖에 없는데요, 현재와 같이 OTT나 방송국 같은 채널이 강력한 헤게모니를 쥐고 있는 환경에서는 제작사들이 높은 제작비를 자체 충당할 만큼 자금을 축적하는 게 쉽지 않습니다. 이는 생태계 종사자들에게 좋은 업무환경을 제공하는데 어려움이 되어 전반적인 콘텐츠 퀄리티를 제약하는 악순환이 되는 거죠. 창작자의 열정에만 기댈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이어서 2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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