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희경의 <장미의 이름은 장미>를 읽고
토론토에 오늘 밤부터 다시 눈이 많이 온다고 한다. 눈밭인 북쪽에서 내려와 큰 터에 나와 살기 시작한 지 이제 반년이 된 올해부터는 겨울 살림이 좀 피려나 했는데 웬걸 이십몇 년 만의 폭설로 여전히 녹지 않은 눈 속에서 겨우 겨우 숨을 쉬며 산다.
은희경의 열다섯 번째 책이다. 분명 이른 십 대부터 그녀의 소설을 읽기 시작한 기억이 있는데 이 사람은 지치지도 않고 현재 시점의 이야기를 이렇게 잘도 하는구나 싶어서 샘이 나버렸다. 아마도 파트너겠지 짐작 가는 사람 덕에 뉴욕을 오가는 세월 동안 그녀는 짧지 않은 시간을 디아스포라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이렇게나 또렷이 그려냈다.
나 만큼이나 오랜 시간을 해외생활을 한 친구와 최근에 소통의 어려움에 대해 길게 얘기한 시간이 있었다. 나는 하고 싶은 말이 어떤 불필요한 뉘앙스나 변곡점을 만나지 않고 상대에 있는 그대로 가 닿는 면에 있어서 영어가 되려 편안할 때가 있다고 했고 바로 그 지점이 파악되지 않거나 표현되지 않아서 힘들어했던 친구는 서로가 서로를 신기해했다.
특히 상대에게도 나에게도 외국어인 이방인의 언어로, 가뜩이나 오해의 여지가 많은 관계를 할 때 이 이점을 잔뜩 누렸다. 불필요한 말은 생각의 과정을 거쳐 필터링하고 그 덕에 오해의 소지는 아예 사지 않는다. 감정이 섞일 여지가 별로 없는 소통은 나의 복잡하기 그지없는 퍼스널리티까지도 마치 전혀 다른 사람의 것인 양 바꿔 놓는다. 영어로 말하는 나는 타자에 상관없이 우직하게 일관된 공만 던지는 투수지만 한국어의 나는 상대를 보며 다양한 변속 구를 구사하는 노련한 투수다. 영어로 말할 때의 나는 군더더기 없는 문장을 사용해서 조심스럽게 상대에게 내 생각을 표현하는 사람이지만 한국어를 사용하는 나는 내 생각을 짧고 간결하게 말하는 법을 몰라 괜스레 딴청에 변죽만 울린다.
나라는 사람이 원래 한국어로도 구어보다는 문어가 훨씬 편한 사람이라 마음을 크게 건 사람이 아닌 이상, 사람과 사람의 대화가 어떤 트루 이해의 통로가 될 수 있다는 희귀한 확률에 거는 기대가 적다. 이렇게 쓸 수 있고, 읽을 수 있다면 그것으로 어느 정도는 만족해버린다. 하지만 즐거운 시간이든 서글픈 시간이든 내 사람들과 쓰고 싶은, 듣고 싶은 언어는 여전히 영어 아닌 한국어다.
불완전한 영어를 쓰는 친구와 내가 긴 대화 끝에 함께 도달한 지점은 그래서 미묘하게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원하는 소통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이야기였다. 오점 하나 없이 깔끔한 게 아니라 얽히고설켜서 복잡하기 그지없는, 오독의 샘이 퐁퐁 샘솟는, 감정이 덕지덕지 묻어있는 그런 소통이어도 그런 대화가 절실한 그녀와 내가, 그런 데에 딱히 뜻이 없는, 본국에서 편안하게 한국어로 소통하며 사는 사람들 혹은 이국에 뿌리내리는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결핍 없이 자신에게 이 방식이 너무나 잘 맞다고 생각하며 사는 사람들을 보며 의아하고 어느 정도는 부럽다고 생각하는 그런 지점.
꽤 오랜 시간을 보낼 사람은 나의 모국어를 쓰며, 영원히 해석하지 못할 상대라는 복잡한 지도를 힘겹게 그러나 즐겁게 여행하면서 서로가 서로를 잔뜩 오해하며 살았으면 좋겠다는 그런 지점.
그 불쾌하게 끈적이며 끝끝내 들러붙는 언어 모국어.
(2022년 2월 24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