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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금빛나무 May 06. 2024

비극은 왜 반복되는가?

시대에 뒤처진 한국사회 의사결정 구조 형성과 비판


비극이 반복되는 이유


비극이 반복되는 것을 겪으면서 우리는 무기력해지기 쉽다. '원래 세상은 쉽게 바뀌지 않아'. 또는 '난 이제 모르겠다'. 등 우리는 반복된 비극 속 갈길을 잃어버리기 쉽다. 그러나 그런 반복된 비극에는 반드시 이유가 있다.


표피적 변화와 본질적 변화는 다르다.

우리는 본질적 이유에 대해 제대로 반성하지 못했고, 본질적 변화를 멈춘 것이다.

우리 스스로에게 질문을 해보자. 세월호 때 경험한 것들에 대해 문제를 정의하고 개혁을 이루었던가?

어떤 면에서는 우리는 촛불정부를 자칭하고 나서온 민주당 정권에게 아무런 견제 없이 모든 것을 위탁한 것은 아닌가 싶다. 그러나 결국 그들은 제대로 된 변화를 이루지 못했다. 문재인 정권은 적폐청산이라는 처벌에만 방점이 있었을 뿐, 검찰 개혁과 같은 쉽지 않고 본질적인 개혁에 대해 집권초기부터 해오지 못한 점에 대해 비판해야 한다.


독일 철학자 칼마르크스의 이야기 중 "역사는 반복된다. 한 번은 비극으로 한 번은 희극으로 "라는 이야기는 우리가 비극에 대한 제대로 된 반성을 하지 못하는 경우 우리는 또다시 비극을 되풀이한다는 것을 말한다.

칼 마르크스 (독일 철학자 1818. 5.5 ~ 1883.3. 14)

두 가지 다른 형태 혁명을 통해 되돌아보고자 한다.

우리가 유럽사회에서 벌어진 68 혁명은 그전 세대의 전체주의적 야만성에 대한 저항이었고 다양성을 지켜나가야 하고, 전쟁반대와 같은 철학이 있었다. 비록 이러한 혁명을 통해 정권교체가 된 것도 아니지만, 그것을 주장하던 많은 사람들이 경제 주체가 되면서 세상을 변화시켜 나갔고, 제도를 실질적으로 바꿔나가면서 역사적 진보를 이뤄왔다.


반면 그와 비슷한 시대였던 66년 중국에서 벌어진 문화 대혁명은 너무 다른 양상으로 번져 나갔다. 그 근본적 차이는 중국문화혁명은 누군가를 추종하며, 스스로의 문화에 대한 혐오와 광기와 파괴가 중심이 되어 본질적 목적과 메시지가 사라진 혁명으로 아무런 역사적 진보를 이루지 못하게 되었다. 우리들이 이루고자 한 촛불혁명은 본질적 구조개혁을 못한 채 바람 빠진 풍선처럼 되었고 결국 반동의 시간을 겪고 있다.

우리는 현재 나타나는 역사적 퇴보에 대한 정확한 이래를 통해 우리 스스로를 되돌아봐야 한다.



본질적 문제란 무엇인가?


세월호 사고 등에서 나타나는 우리가 분노한 부분을 생각해 보자. 왜 아이들에게 가만히 있으리라고 방송했고, 자기들만 빠져나오는 선원, 그리고 모두 구조했다고 방송하며 아무런 의심 없는 언론, 청와대 수석이 전화로 방송을 마사지하려는 시도, 수색을 도우려는 잠수사를 거부하는 해경, 무언가 숨기려 하는 정황들과 vip에 대한 지나친 의전 등.  이 모든 상황들이 믿어지지 않는 비정상적임에도 이런 일이 발생하는 이유는 깊이 생각하지 못하고 있다.


사실 여기에 큰 본질적 이유가 있다. 그것은 힘을 가진 윗선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모두들 자신의 의지가 아닌 윗선의 지시에 의해서 현장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더라도 자신의 눈이 아닌 윗선의 지시에만 의존한다는 공통점이라고 할 수 있다.


인사권을 가지고 휘두르는 윗선, 검찰의 힘을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는 정권, 평가권한을 통해 지배력을 가지는 교육. 이 모든 힘은 수직적 구조를 이루는 본질적 힘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수직적 구조에서는 언제나 폭력성이 나타난다. 한국사회에서 나타나는 근현대과정에 나타나는 수많은 비극적 상황들의 근본적 원인이 무엇에서 시작되는지 역사성을 바라본다면 무슨 이야기 인지 알게 되고 더욱 확신하게 된다.


10.29 이태원 참사는 어떨까? 왜 핼러윈데이 매년 하던 혼잡경비를 하지 않았을까? 매년 하던 혼잡경비를 이번에 하지 말자고 했다면 왜 반기를 들고 관철시키지 못했을까? 혼잡경비를 하지 말자고 하는 누군가 지시했다고 하는 원인과 상관없이 우리는 팩트만 가지고도 왜 담당자는 윗선의 잘못된 지시에 반기를 들지 못하는가? 그리고 잘못된 지시를 꺽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에 대한 질문을 해야 한다.


우리는 이지점에서 우리 사회의 본질적 문제는 수직적인 전체주의적 구조에 있다는 것을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런 구조는 과거 산업사회 식민지에 유용한 통치기법이었고, 유럽 및 일본 제국주의 모든 나라에서 식민지 국가에 적용하던 방식이다. 생산을 극대화하기 위한 인간을 노동력과 자원으로 본 구조에서 나온 사회 이데올로기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수직적 구조가 만들어 주는 특징은 인간을 부품화 하고 산업시대 생산력을 유지하고 식민지를 개척하는 정치적 이데올로기 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사회분위기를 정확하게 표현한 소설이 조지오웰의 1984라고 할 수 있다.

본직적으로 수직적 구조는 농업사회가 산업사회를 넘어가기 위해 혹은 식민지 노동자를 착취하기 위해 교육받지 못한 인력을 소수 엘리트 집단이 생산에 투입하도록 만들기 위한 구조였다. 결국 그런 구조에서는 강압적 힘을 가진 전체주의 성향을 띠게 된다.  그러나 그런 구조가 오랫동안 유지되면서 엘리트 권력 중심은 세습이 되고 무능하게 되기 쉽다. 또한 점점 통제력을 잃어버리면서 많은 사고가 발생하게 된다. 그러나 사고가 나더라도 힘에 의해 통제당하다 보니 아무 일도 없듯이 숨죽이며 살게 된다.


결론적으로 오늘날 유럽사회는 68 혁명을 통해 촉발되었지만, 과거 산업사회의 수직적이고, 서열화되고 권위적 구조는 깨어 버리고 수평적이고, 협력이 중요하다는 인식변화가 되었고 이들은 정보산업, 플랫폼 사업등 새로운 산업 시대를 맞이하게 되었다. 이렇게 된 배경에는 초기 산업시대에 비해 생활수준이 올라가면서 노동자들의 교육 수준이 올라가면서, 더 이상 통제가 필요 없이 분권화된 구조속 역할 중심조직으로 산업 구조가 변화하게 된 것이다. 수평성은 수직성에 비래 조직내부에 노하우가 쌓이고 판단을 현장에서 할 수 있기 때문 사고가 날 할 확률이 줄어든다.


산업구조가 바뀌는 시대에는 과거와 같은 시간대비 노동력 투자만으로 부가가치가 생산되지 못하는 시대가 되었다. 따라서, 우리는 현재 시점에서 이러한 과거의 이데올로기를 걷어내야만 한다. 즉 유럽사회가 걸어간 후기 근대화 시대인 68년 혁명시대 외쳐온 본질이 우리 사회에 아직 다가오지 못한 것이다.




뿌리 깊은 한국사회 식민지 전체주의 의식구조


한국사회 가장 뿌리 깊은 전체주의 유물은 무엇보다 언론과 교육이라고 생각한다,

이들은 과거 전체주의 구조의 선전도구로서 서열화와 계급화된 구조를 유지하고 있다. 따라서 각자의 개인이 존중되는 지식집단이 아닌 전체주의적 서열이 중심이 된다. 이런 조직에서 나오는 결과는 우리 사회를 후퇴하게 만든다. 그런 본질의 중심에는 이들 조직문제뿐 아니라 우리나라 기업들 에도 존재하는 문서기안문화와 관련이 있다.


문서를 기안하는 것을 경험해 본 사람들은 그것이 매우 일상적이라고 느끼겠지만, 기안 문화가 지구상에 존재하는 곳은 한국, 일본, 대만 정도일 것이다. 모두 일본의 사무라이 전통에서 시작되었다.

사무라이 하급무사는 중간무사에게 정보를 올리고 중간무사는 수합해서 오야붕(두목)에게 보낸다. 이러한 구조는 수많은 중간관리자를 만들고, 계급화 구조를 만들어 낸다. 의사결정구조가 전체주의적이고 수직적인데 분권화 구조가 만들어질 수가 없다.


한국사회는 일본과 달리 비교적 빠르게 전자결재로 바꾸었지만, 본질적인 문서구조는 그대로 남아 있다. 이러한 문제는 여전히 의사결정에는 수직적 구조에 의존하게 된다는 문제가 남아 있다.


계급에 따라 도장방향도 다르다
문서에서 결제난이 있는 구조가 한국구조와 동일하다.



우리 안에 만연한 수직적 전통은 조직 내에서 책임회피와도 연관이 많다. 수직적 구조에서 상위에 위치하는 결정권자는 자기의 경험 수준을 넘겨서 의사 결정을 한다. 그럼에도 자신의 존재감을 과시하기 위해서 무리한 결정을 내기도 하면서 오류가 나타나기도 한다. 또한, 이러한 구조에서는 직원이 좋은 의견이 있다고 하더라도 수직적 구조에서 자기주장을 하지 못한다. 결국 시키는 일만 하게 되고 그런 구조에 길들여진다.

그렇게 하더라도 월급이 나오니 굳이 모험할 필요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또한, 승진에 욕심이 있는 직원들의 능력에 맞게 무엇을 하기보다는 줄을 잘 타야 한다. 결국 승진은 윗사람과 잘 맞는 사람이 사내정치로 관계가 형성되면 이를 통해서 실적을 만들면 된다.

이러한 구조가 한국사회에 만연한 조직구조라고 할 수 있다.

수직적 구조는 의사소통이 적어도 되고, 직송 상관 혹은 윗사람과의 관계만 존재한다. 문제는 이런 구조에서는 상황에 빠른 대처가 어렵다. 결국 사고가 나면 은폐하기 급급하게 된다. 은폐를 하다 보면 수직적 구조에서 가장 취약한 부분을 잘라내기 한다. 이것이 꼬리 자르기라고 할 수 있다.



한국사회에서 검찰이라는 가장 수직적인 구조 조직의 수장이 우리를 대표하는 사회가 되었다.

그런데 한국이 아닌 다른 세계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달리고 있고 최근 몇 년 동안 한국사회 내에 벌어지는 다양한 파열음을 자주 보게 된다.


근본적인 문제는 수직적인 구조의 문제로서 이 구조를 깨는 노력이 필요하다. 해외사업을 해본 사람들이 알고 있는 부분은 서구사회 사람들은 우리와 다른 의사결정 구조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전체적으로 증명을 해나가고 설득해 나가는 과정이 주된 의사결정구조라고 할 수 있다.


즉 모든 조직에서 위, 아래가 사라져야 한다. 모두 구성원이 소통을 통해 만들어갈 때 부각되는 사람이 생기고 이러한 개개인의 장점에 의해 역할을 부여받는 것이다.


우리사회가 겪고 있는 모든 비극적 사고의 반복에는 이러한 수직적 구조에서 조직속에 묻어가는 의식이 큰 문제라고 할수 있다. 조직내 민주성은 조직을 건강하게 하고 본질적 역할에 충실하게 한다. 그리고 각자가 책임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인식하게 한다.


우리는 어떤 사회로 가야 하는지 우리 스스로 생각해 보자.

과거 식민지 일본제국주의 의식구조를 무비판적으로 우리생활속에 박혀있는 의식구조 모두를 끄집어내야 하는 시점이 되었다. 그리고 우리 스스로 왜곡된 의식을 바로잡고 새로운 시대에 맞도록 변화를 해야 하지 않을까? 그래야만 변화된 시대와 과거 의식이 맞지 않아 발생하는 비극적 상황을 막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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