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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금빛나무 Feb 03. 2024

해방 전후 시대 참여시인

지성인이 사라진 시대 , 잃어버린 인문학 시대를 열기 위한 회고

일제강점기에서 근현대로 이어온 정신


한국사회는 지식인이 사라진 시대를 맞이하고 있다고 봐야 한다.  우리 사회 지식인이란 소위 글 쓰는 사람인데 글 쓰는 엘리트 계층은 알량한 자리를 위해 비논리를 통해 권력이 원하는 이야기만 늘어놓는다.


이들의 특징은 양심이 없고 용기가 없으며 기회주의적이다. 이런 모든 것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마인드컨트롤이 필요하다. 그것이 뻔뻔함이다.


그러나 그들을 포장해 주고 높은 자리를 유지하도록 만드는 구조는 서열화, 계급화, 차별화, 경쟁유발이다.  그런데 공정에 대한 잣대를 손에 넣은 무너진 정의는 권력 편이기에 그런 구조에 기대어 무지성을 지성으로 포장하며 살아간다.  


그러다 보니 우리 사회가 지성인이란 학벌로 착각하는 경향이 많고 그런 자들은 학벌로 패거리를 만들고 수준 낮은 논리로 공동체를 이끌려한다.  


대중들은 먹고살기 힘들어 관심도 없거나 현실을 잘 모르는 경우가 많지만, 우리는 극히 치우쳐진 세상에 살고 있다.


어떤 면에서는 조지오월의 소설 1984 속 사회와 매우 닮아 있다. 그러나 그 속에 사는 사람은 자신들이 그 속에 살고 있다는 것은 인식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현재와 같은 왜곡된 구조를 이해하려면 과거 식민지 시절부터 거슬러 올라간 역사를 살펴봐야 한다.

우리는 일제강점기를 거쳐오면서 일본 제국주의가 파시즘화 되면서 우리는 생각 또한 통제되어 온 역사가 여전히 우리들의 현재 자유롭지 못하게 만든 근원적 원인이라고 할 수 있다.


일제강점기부터 독립운동을 막아내기 위해 사법권력과 정보권력이 중심이 되어 탄압하는 구조는 해방이 된 이후에도 무너지지 않고 살아있는 화석처럼 법률로 이어온 것이 국가보안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들은 국가보안법을 유지하기 위해 외부적을 필요로 한다. 따라서 남과 북 긴장관계가 되어야만 민족반역자 들은 자신들로 돌아올 비판을 막을 수 있었고, 권력유지가 가능하다. 그래서 남과 북 적대적 관계를 만들고 긴장관계를 통해 내부지배력을 유지하는 관행이 지속되고 있다.  


사실 우리 세대는 일본육사 출신군인이 대통령이었고, 광주에서 수많은 민중들을 학살한자가 대통령이던 시절 반공 교육을 철저하게 받아왔다.


그런데도 우리는 민주화라는 가치를 본능처럼 찾아냈다. 비록 학교에서는 일제강점기 친일을 하고, 전두환 독재를 찬양하며 살아온 서정주씨의 시를 배웠지만 물들지 않고 김남주 시인의 시를 노래로 부르고 있다.


그러면서 우리는 우리 문학을 이루어 오던 금기시되던 문학사조와 문학인들에 대해 배우지 못했다. 비록 제도권 교육 환경에서는 외면하고 있지만 한국사회 인문학과 시대정신을 복원하기 위해 과거 흐름을 찾아 나서고자 한다.



사회주의 문학동맹 카프와 임화

 

임화(림화)라는 필명은 임화는 그가 본격적으로 문단 활동을 시작하던 1927년경부터 계급문학에 관심을 보이며 쓰기 시작했다. 1929년에 시 〈우리 오빠와 화로〉,〈네거리의 순이〉 등을 발표하여 대표적인 경향파 시인으로 자리를 잡고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을 대표하는 작가로 부상했다.


비록 일제강점기였지만 일본에 들어온 서구문물과 철학 및 사상가들의 번역물을 접할 수 있었다.

특히, 임화는 헤겔, 칼막스 등 비롯한 사상가들과 소설비평론의 루카치까지 섭렵한 당대 지식인으로 그는 사상을 통해 식민지 조선의 암담한 현실에서 희망을 발견하고자 했다.  그는 수많은 시를 쏟아냈으며 평론이며 글을 통해 당시 조선의 정서를 대변했다.


1930년에는 약 1년 동안 일본 유학을 다녀와 1931년 귀국한 이후로도 참여적인 성향을 대표하는 카프에서 좌파 문학 이론을 생산하고 각종 논쟁에 적극 참여하면서 활발히 활동했다.

임화 시인

그러나 1930년대 만주사변등으로 일본제국주의가 파시즘화되면서 사상통제가 진행되면서 많은 일본 내 사회주의경향의 모든 단체가 해산되는 계기가 되었다.


이로 인해 식민지 조선 내에서도 카프 활동으로 제1차 카프 검거 사건 때 체포되어 수감되기도 했다. 제2차 카프 검거 사건 이후 1935년 자신이 서기장 직함까지 지낸 카프가 강제적으로 해산되었다.


태평양 전쟁 종전 후 조선문학건설본부, 조선문학가동맹 등 좌익 문학 단체에 적극 참여하면서 박헌영에게 매료된 이후 남로당 노선을 걸으며 월북했지만 "패배주의적 감정과 투항주의사상을 설교하였다”라고 하여 숙청의 빌미가 되며 숙청당했다. 그는 월북 작곡가인 김순남이 작곡하여 한국 전쟁 시기에 인민군과 빨치산들이 즐겨 부른 노래 <인민항쟁가>의 작사가이기도 하다.

작곡가 김순남

인민항쟁 가는 작곡가 김순남이 대구 10.1 사건을 기리기 위해 1946년 작곡한 노래. 가사는 시인 임화가 썼다. 노래 배경이 되는 10.1 사건은 미군정의 식량난이 심각한 상태에서 미군정의 친일 관리 고용, 토지개혁 지연, 식량 공출 정책의 강압적 시행 등으로 인하여 불만을 품은 민간인과 일부 좌익 세력이 경찰과 행정당국에 맞서서 발생한 사건이었다.


이 노래는 좌익에 의해 광범위하게 불려졌고, 북한은 물론이고 남한에서도 이 노래를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았었다. 그러나 김순남과 임화가 모두 북한에서 숙청되어 잊힘에 따라 이 노래는 북한에서는 더 이상 불려지지 않게 됐다.



인민항쟁가

 

원수와 더불어 싸워서 죽은

우리의 죽음을 슬퍼 말아라

깃발을 덮어다오 붉은 깃발을

그 밑에 전사를 맹세한 깃발

더운 피 흘리며 말하던 동무

쟁쟁히 가슴속 울려온다

동무야 잘 가거라 원한의 길을

복수의 끓는 피 용솟음친다

백색 테러에 쓰러진 동무

원수를 찾아 떨리는 총칼

조국의 자유를 팔려는 원수

무찔러 나가자 인민유격대




박인환과 김수영 두시인 이야기


광화문역 근처 회사 가는 길옆에는 박인환 시인의 집이 있었다는 표식이 있다.

일찍 생을 마감한 천재 시인 박인환은 현재의 광화문역 근처에 살았고, 그는 주로 문화예술인들의 고향 명동으로 다니면서 시인으로 삶을 살았다.

후반기 동인으로 모더니즘 경향의 작품을 발표하면서도 자신만의 도시적인 비애와 고뇌를 그려내고 있다.


그는 특유의 낭만적 감성시인으로 일제강점기와 해방과 전쟁 이후 어지럽고 비극적 세상 속을 뚫고 나오는 낯선 세계에 대한 열망과 희망을 꿈꾸고자 하는 마음을 시속에 담았다.

박인환

박인환 시선집(1955년)을 간행하였고 급성 알콜성 심장마비(1956년, 향년 29세)로 이어져 자택에서 사망하였다. 그러나 박인환의 경우 서정시인으로만 알고 있지만 다른 면이 있다. 그가 20대에 세운 서점 마리서사 (종로 3가, 2번지 현재 대한보청기)는 특별한 서점으로 해방 후 좌우 대립 없는 시기 다양한 작가와 예술인, 화가, 연극인들이 모인 문화 사랑방이었다.



목마와 숙녀


한 잔의 술을 마시고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생애(生涯)와
목마(木馬)를 타고 떠난 숙녀(淑女)의 옷자락을 이야기한다
목마는 주인을 버리고 그저 방울소리만 울리며
가을 속으로 떠났다.
술병에서 별이 떨어진다
상심(傷心)한 별은 내 가슴에 가벼웁게 부서진다


그러한 잠시 내가 알던 소녀(少女)는
정원(庭園)의 초목(草木) 옆에서 자라고
문학(文學)이 죽고
인생(人生)이 죽고
사랑의 진리마저 애증(愛憎)의 그림자를 버릴 때
목마(木馬)를 탄 사랑의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세월은 가고 오는 것
한때는 고립(孤立)을 피하여 시들어 가고
이제 우리는 작별(作別)하여야 한다
술병이 바람에 쓰러지는 소리를 들으며
늙은 여류작가의 눈을 바라다보아야 한다


등대(燈臺)에 불이 보이지 않아도
그저 간직한 페시미즘의 미래(未來)를 위하여
우리는 처량한 목마(木馬) 소리를 기억(記憶)하여야 한다


모든 것이 떠나든 죽든
그저 가슴에 남은 희미한 의식(意識)을 붙잡고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서러운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


두 개의 바위틈을 지나 청춘(靑春)을 찾는 뱀과 같이
눈을 뜨고 한 잔의 술을 마셔야 한다


인생(人生)은 외롭지도 않고
그저 낡은 잡지(雜誌)의 표지(表紙)처럼 통속(通俗)하거늘
한탄할 그 무엇이 무서워서 우리는 떠나는 것일까


목마는 하늘에 있고
방울 소리는 귓전에 철렁거리는데
가을바람 소리는
내 쓰러진 술병 속에서 목메어 우는데



이와 다른 궤적으로 모더니즘 시인 김수영은 전쟁의 아픔을 통해 자유를 노래하는 시인이 되었다.


김수영은 박인환에게 문화사랑방 마리서사 시절 박인환을 기억한다. 마리서사를 통해 많은 문학인이 모이는 시대였고 박인환은 이 시기 인도네시아 인민에게 주는 시(1948)처럼 반제국주의 참여 시를 썼던 사람이다.

김수영은 박인환을 비판함으로써 박인환을 살린다는 생각을 한다. 박인환의 본질은 마리서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박인환이 문연 마리서사


김수영은 전쟁의 상처가 큰 시인이다. 그는 남로당원이자 문학가 동맹으로 인민군으로 끌려갔으나 탈출하여 고향으로 갔지만 거제도 포로수용소에 갇혔다.


그러나 포로수용소 인민군포로 반공포로 간 매일 같은 학살을 목격했다고 한다. 그 이후 포로수용소에서 나오자 알게 된 것은 자신의 아내가 다른 사람과 결혼한 것이다.


이런 비극이 그가 전쟁에서 겪은 비극과 함께 자유에 대한 민감한 감수성을 느끼게 된 것 아닌가 싶다.


그는 친구 박인환 보다 오래 살면서 4.19 혁명을 맞이한다. 그러면서 혁명을 이루고도 변화되지 못한 세상에 대한 회한을 시로 옮기면서 시대를 노래한다.

김수영 시인

또한, 시인 김수영은 술에 취하면 그가 존경한 대선배 임화의 노래 인민항쟁가를 즐겨 불렀다고 한다. 전쟁직후 레트플렉스가 극에 달한 시절 인민군 출신으로 거제포로수용소의 참혹함을 겪은 붉은 딱지를 붙인 시인이인민항쟁가를 부르는 것을 동료 시인들이 말렸다고 한다.


시잉 김수영의 자유에 대한 갈망이 얼마나 컸는지 부인 김현경 씨가 보관해 오던 10여 권의 수첩과 노트, 서봉투와 엽서, 광고지 등에 남긴 것이다. 이 가운데 <김일성 만세(金日成萬世)>라는 시는 4ㆍ19가 일어난 반년 뒤인 1960년 10월 6일 탈고했지만 이념적인 금기 때문에 발표하지 못한 작품이다.


“‘김일성 만세’/ 한국의 언론자유의 출발은 이것을/ 인정하는 데 있는데// 이것만 인정하면 되는데// 이것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 한국/ 언론의 자유라고 조지훈이란/ 시인이 우겨대니// 나는 잠이 올 수밖에” <김일성 만세>  - 출처 : 한겨레 신문-


시인 김수영은 김일성만세를 부를 수 있어야 언론자유라고 한다. 그것은 그가 생각하는 자유란 시대가 억압하고 금기시하는 모든 억압을 떨쳐내는 것을 말한다. 특히, 푸른 하늘을 에서는 자유로 향하는 길이 얼마나 험난한지 4.19 혁명을 통해 수많은 죽음을 보면서 겪은 것을 이야기한다.


푸른 하늘을-김수영


푸른 하늘을 제압하는

노고지리가 자유로웠다고

부러워하던

어느 시인의 말은 수정되어야 한다

자유를 위해서

비상하여 본 일이 있는

사람이면 알지

노고지리가

무엇을 보고

노래하는가를

어째서 자유에는

피 냄새가 섞여 있는가를

혁명은

왜 고독한 것인가를

혁명은

왜 고독해야 하는 것인가를


https://www.hani.co.kr/arti/culture/book/1009617.html

우리 시대는 과거 레드콤플렉스에 의해 세상을 왜곡해 본다. 그런 본질에는 청산 못한 식민지 기득권 문제가 우리 사회에 도사린다. 우리는 사회주의 시인 계열에 대해 그동안 배워오지 못했다. 그러나 그들은 분명 우리의 문화에 영향을 미쳤고 함께 살아가는 가치를 남겼다. 그러나 그들이 빨갱이라서 , 혹은 월북작가라서 그들을 지우려고 하는 것은 야만적이다.


우리는 일본사회에는 존재하는 사회주의 정당이 한국사회에서는 왜 금기시되는지? 그리고, 미국인이나 일본인은 북한에 갈 수 있지만 우리는 북한에 가지 못하는 이유에 대해 더 깊은 생각을 해봐야 한다.




전사로 불리길 바란 시인 김남주


명동 문학시대를 넘어선 이후 삼양동으로 넘어간 문학인들이후 전국 아픔이 있는 모든 곳에서 산업화 과정중 부를 독점해온 전체주의 권력에 맞선 민중시인들이 나왔다.


시인 김남주는 전라남도 해남군 출신으로 아버지는 노비 출신이었다고 한다. 그는 공부를 잘하여 광주제일고등학교에 입학했으나 학교에 다니는 급우들이 자신의 노비였던 아버지를 탄압하던 계급이라는 의식 때문 고등학교를 자퇴했다. 그는 검정고시 이후 전남대학교 영어영문학과 재학 시절에 3선 개헌과 유신헌법을 반대하는 학생 운동을 적극으로 주도하기 시작하였다.


1972년 유신 헌법이 선포되자 그는 최초로 유신을 반대하는 신문인 「함성」을 발간하였다. 이후 어렵게 「함성」을 운영하다가 1973년에 제호를 「고발」로 개칭하여 발간하였다. 그 해 「고발」을 전국에 배포하려다가 경찰의 불심검문에 걸려 반공법 위반 혐의로 구속되었다. 1973년 국가보안법 혐의로 복역하고 전남대학교에서 제적당했다.



학살 1  김남주


오월 어느 날이었다

80년 오월 어느 날이었다

광주 80년 오월 어느 날 밤이었다


밤 12시 나는 보았다

경찰이 전투경찰로 교체되는 것을

밤 12시 나는 보았다

전투경찰이 군인으로 교체되는 것을

밤 12시 나는 보았다


미국 민간인들이 도시를 빠져나가는 것을

밤 12시 나는 보았다

도시로 들어오는 모든 차량들이 차단되는 것을


아 얼마나 음산한 밤 12시였던가

아 얼마나 계획적인 밤 12시였던가


오월 어느 날이었다

1980년 오월 어느 날이었다

광주광역시 1980년 오월 어느 날 밤이었다


밤 12시 나는 보았다

총검으로 무장한 일단의 군인들을

밤 12시 나는 보았다

야만족의 침략과도 같은 일단의 군인들을

밤 12시 나는 보았다


야만족의 약탈과도 같은 일군의 군인들을

밤 12시 나는 보았다

악마의 화신과도 같은 일단의 군인들을


아 얼마나 무서운 밤 12시였던가

아 얼마나 노골적인 밤 12시였던가


오월 어느 날이었다

1980년 오월 어느 날이었다

광주 1980년 오월 어느 날 밤이었다


밤 12시

도시는 벌집처럼 쑤셔놓은 심장이었다

밤 12시

거리는 용암처럼 흐르는 피의 강이었다

밤 12시

바람은 살해된 처녀의 피묻은 머리카락을 날리고

밤 12시

밤은 총알처럼 튀어나온 아이의 눈동자를 파먹고

밤 12시

학살자들은 끊임없이 어디론가 시체의 산을 옮기고 있었다


아 얼마나 끔찍한 밤 12시였던가

아 얼마나 조직적인 학살의 밤 12시였던가


오월 어느 날이었다


1980년 오월 어느 날이었다

광주 1980년 오월 어느 날 밤이었다



밤 12시

하늘은 핏빛의 붉은 천이었다

밤 12시

거리는 한 집 건너 울지 않는 집이 없었고

무등산은 그 옷자락을 말아올려 얼굴을 가려 버렸다

밤 12시

영산강은 그 호흡을 멈추고 숨을 거둬 버렸다


아 게르니카의 학살도 이렇게는 처참하지 않았으리

아 악마의 음모도 이렇게는 치밀하지 못했으리






한국 사회 반민족주의자들은 자신들의 매국한 죗값을 모면하고 기득권 유지를 위해 레드콤플렉스를 앞세운 큰 목소리로 대중들을 협박한다. 이같은 반지성사회에서 양심의 목소리는 억압받았다.


이제 우리는 의식의 식민지에서 벗어나야 한다. 사실, 사회주의 및 자본주의 ,공산주의는 모두 우리 민족이 만든 사상이 아닌데, 외세가 만든 구조에 의해 서로에게 갈등해야 하는지 그렇게 만든 갈등구조가 식민지의 연속은 아닌지 생각해 봐야 한다.


사실 그렇다. 자유롭게 이야기할 수 있어야 비판도 가능하고 현상을 온전하게 평가할 수 있지만 한국사회에서 자리 잡은 외세에 의존하는 기득권에 의해 생각의 자유를 오랫동안 멈쳐졌다. 오히려 친일 매국노들의 목소리는 관대하게 허용되고 있다.  


친일 매국노들의 목소리가 허용되는 상황에서 사회주의 계열 및 월북작가들의 이야기와 함께 북한의 문학에 대해서도 알아볼 필요가 있다. 우리에게 남과 북에서 일어난 모든 현상과 비극을 온전히 알고 미래를 만들어가야 할 토양이 필요하다. 그것이 인문학이고, 시대정신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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