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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금빛나무 May 25. 2024

참여시인 김수영 문학관 방문기

자유를 갈망하는 김수영 시인의 일생과 문학 세계를 만나다


김수영은 한국사회에서 모더니즘 시인이면서 시대의 아픔을 겪고 참여시인으로 변모한 시인이다.


서구사회라면 모더니즘에서 포스트 모던으로 변화하는 과정 속 서구사회 모더니즘의 특징인 계급구조를 무너트리고자 저항하는 것이 포스트모더니즘이라고 할 수 있다. 기존 구조에 대한 해체를 통해 평등사회로 추구하거나 규율을 벗어버리려는 움직임 속 자유를 향하게 하는 것이 포스트모더니즘적 흐름이다.


그런데 한국사회 모더니즘은 일제강점기 식민지에서 우리의 주체성을 잃지 않은 지성인들에 의해 이어졌다.  

이들이 살아온 세월이 가혹한 만큼 이들이 갈망한 자유는 우리 시대 지식인들의 비판과 사회참여 시의 형태로 나타난다.


우리는 해방 후 민중들이 억압되어 나온 시대를 보면서 나온 한탄과 비판을 시에 담은 것은 우리가 시대를 보는 눈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면에서 참여 시는 우리가 느끼는 그대로를 보여주고 시대를 진단한다.

비록 비판과 불편함을 이야기하지만, 그 목소리는 더 좋아질 세상을 향하고 있다.


최근에는 송경동 시인이 있고, 그전에는 김남주 시인이 있다. 김남주 시인이전이 김수영 시인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 같다.


김수영 역시 명동에서 활동한 문인으로 그와 절친이면서도 서로 라이벌이었던 시인은 박인환 시인이었다.

박인환은 낭만적 모더니즘 시인으로 알려져 있지만, 그 역시 인도네시아 인민에게 주는 시(1948)처럼 반제국주의 참여 시를 썼던 시인으로 김수영 시인과 박인환 시인의 마리서사 시절부터 많은 교류가 있었던 것 같다. 


이후 명동에서 활동하던 시인들은 1960년대 이후 명동의 급격한 상업화로 인해 가난한 문인들이 더 이상 교류하기 힘든 상황이 되었다. 이후 많은 문인들은 강북지역으로 이전했다. 정릉, 삼양동, 우이동, 쌍문동등에서 그들의 흔적을 볼 수 있다. 특히 김수영 시인을 기리는 문학관이 도봉구에 있어 소개해 보고자 한다.


서울 도봉구 해동로 32길에 위치한 김수영문학관은 시인 김수영(1921~1968)을 기리며 그의 작품과 문학적 업적을 조명하는 특별한 공간입니다. 2013년 11월 27일에 개장한 이 문학관은 김수영의 삶과 시문(詩文), 그리고 그가 남긴 깊은 철학과 문학적 유산을 만날 수 있는 장소이다.


한국 문학의 대표적 자유시인인 김수영 시인이 생전에 시작(詩作) 활동을 했던 도봉구에는 그의 본가와 묘, 시비가 있다. 이를 기리기 위해 도봉구는 김수영문학관을 건립하여 2013년 11월 27일에 개관했다. 


https://place.map.kakao.com/22454382


김수영문학관에 들어서면, 그의 생가와 묘소가 있는 도봉구에서 그가 생전에 창작 활동을 했던 흔적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다. 

문학관 내부에는 김수영 시인이 생전에 쓴 육필 원고, 시집, 외국 문학 번역서 등 다양한 저작물이 전시되어 있다. 




김수영문학관을 둘러본 후, 그의 일생을 다시 한번 되새겨보았다. 

1921년 11월 27일, 서울에서 지주의 아들로 종로구 관철동에서 태어난 김수영은 어린 시절 비교적 유복하게 보냈다.  어의동공립보통학교(현 서울효제초등학교)와 선린상업학교(현 선린인터넷고등학교)에서 학창 시절을 보냈으며, 이 시기에 영어 실력을 쌓아 오스카 와일드의 작품들을 외워 읽을 만큼 뛰어났다고 한다.


1941년 일본 도쿄상과대학에 입학한 그는 학업을 포기하고 일제의 학병징집을 피해 만주 길림성으로 이주해서 살다가 해방 후 귀국 이후 연극에서 시 창작으로 전향해 본격적인 문학 활동을 시작했으며, 1946년 예술부락에 시를 발표하며 등단했다. 


김경린, 박인환과 함께 시집 《새로운 도시와 시민들의 합창》을 출간해 주목을 받았다. 그 시기는 해방이라는 축제 공간에서 최초로 모더니즘을 표방한 동인지로서, 이 시집은 다시 6·25 전란기에 ‘후반기’ 동인을 태동시키는 계기를 제공했다는 점에서 50년대 이후 근대화 시대의 정서를 담았다.


이후 김수영은 6.25 한국전쟁 발발과 함께 월북했던 임화, 김난천, 안희남 등이 돌아와 종로 2가 한청빌딩(과거 사상계터, 서울 종로구 종로 60-1 )의 조선문학가동맹에 참여하기도 했고 북한 의용군으로 징집되었다.

이후 유엔군과 인민군 혼전을 틈타서 탈출한 경험, 그리고 거제 포로수용소에서의 고초는 그의 삶과 작품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전쟁 후에는 통역 일과 번역가로 활동하며 문학적 열정을 이어갔다.



1950년대에는 ‘노랑이’라는 별명으로 불리며 가난한 문인 생활을 하던 그였지만, 시와 번역을 통해 한국 문단에 독특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1958년 제1회 한국시인협회상을 수상하며 그의 문학적 가치를 인정받았다. 1960년대에는 4.19 혁명 이후 본격적으로 사회 참여와 비판적 글쓰기에 몰두하였고, 이는 그의 시 세계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1968년 6월 15일, 불의의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난 그는 짧지만 강렬한 생애를 마감했다. 그의 죽음은 당대의 많은 문인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고, 그의 작품은 이후로도 많은 사람들에게 영감을 주고 있다.


김수영의 시는 비판적이고 철학적인 성격을 띠며, 당시 사회의 부조리와 억압을 강하게 비판했다.

그의 대표작 중 하나인 「풀」은 억압받는 민중의 생명력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작품으로, 오늘날까지도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고 있다.


김수영문학관을 나서며, 그의 시 한 구절이 떠오른다.


비를 몰아오는 동풍에 나부껴

풀은 눕고

드디어 울었다.

날이 흐려서 더 울다가

다시 누웠다. 


풀이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울고

바람보다 먼저 일어난다. 


날이 흐리고 풀이 눕는다.

발목까지

발밑까지 눕는다.

바람보다 늦게 누워도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고

바람보다 늦게 울어도

바람보다 먼저 웃는다.

날이 흐리고 풀뿌리가 눕는다. 



풀은 우리 민중들의 모습처럼 독재권력의 억압에 굴복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스스로 주체적으로 움직이고 먼저 움직여서 결국 주체적인 민중들의 의지가 바람보다 강함을 이야기해 주고 있다.


“풀이 눕는다 / 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는다 / 바람보다도 더 빨리 울고 / 바람보다 먼저 일어난다”


김수영의 시와 삶은 억압과 고난 속에서도 자유와 진실을 향한 그의 끊임없는 열망을 보여주고 있다.


문학관을 둘러본 오늘, 한편으로는 한국사회의 비극적 역사 속 시인의 눈으로 본 비극의 현장에서 겪은 모든 과정을 느끼는 모든 것을 시로 남기고 우리에게 지나간 시대에서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하는 가치를 남겼다는 점에서 그의 시와 정신에 대해 존경을 표하게 된다

사실 오늘날 사회 역시 민중들 눈으로는 불합리함이 보이지만 권력과 이익앞에 눈감는 기자 와 교수등 수 많은 가짜 지식인들만 판치는 세상에 우리는 세상을 어떤 가치로 살아가야 하는지 생각해 보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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