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광장, 미국대사관, 중앙청 시대 권력 중심에 대한 이야기
광화문 세종로는 권력이 모이는 중심지역이다. 조선시대 육조거리이며 , 일제강점기 총독부, 해방 후 미군정 이후 권력이 모이는 장소로서 광화문 세종로 사거리를 중심으로 우리는 권력의 흐름을 볼 수 있다.
이러한 관계가 극대화되던 1950년대는 시대적으로는 현재의 경복궁이 복원되기 이전이므로 과거 총독부 건물이었던 중앙청 건물이 있고, 그 앞에는 후견국가로서 미국 대사관이 있고, 이어지는 사거리에는 식민지시절 만들어진 동아일보와 조선일보가 있다. 오늘날에도 광화문 광장은 서울의 랜드마크지만 광장에 서서 주변을 보다 보면 식민지성을 탈피하지 못한 권력관계가 보인다.
광화문과 경복궁은 조선의 정궁으로 중앙집권적 제도를 상징한다.
일제강점기에는 조선총독부가 위치한 곳이기도 하다. 해방 후에는 미국대사관이 들어섰고 청와대에는 식민지를 이어가는 독재 권력이 자리 잡았었다.
이후 1987 민주화를 위한 흐름이 진행되었다. 사실 대한민국 민주화에 영향을 준 것은 정보통신 기술이다.
광화문에는 한국통신이 있었다. 사람들은 통신을 통해 소통방식이 바뀌었고, 끝내 네티즌은 스스로 대통령을 만들어 냈다. 이후 몇 변의 반동 이후 촛불혁명으로 광화문광장으로 시민들이 모여들면서 탄핵을 통해 또다시 민주 정권이 들어섰다.
민주정권 시절 서울시 박원순 시장은 광장을 시민들에게 돌려주고자 계획을 했다.
또한, 새로 조성하는 광화문광장에 대한 설계하는 방식 또한 시민들의 의견을 모으는 방식으로 진행했다.
어느 날 퇴근길 광장에 작은 부수에 들리니 시민토론회 참여자를 모집하기에 참여의사를 밝히고 참여했다.
광화문 광장이 완성된 후 만들어진 모습을 보면서 나를 비롯하여 그때 모여서 이야기하던 여러 사람들의 의견들을 꼼꼼하게 기록해서 설계에 담았다는 것을 실감하게 되었다.
박원순 시장 또한 권력의 공간으로서 광화문 광장을 생각했었던 것 같다. 그래서 권력이 모이는 광화문을 시민들에게 내어주는 것은 역사성의 실천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이처럼 시대별 교체된 권력은 광화문에 모여들었고, 광화문광장에 서면 권력을 볼 수 있다.
그런데, 2021년 미국대사관이 용산으로 이전할 계획을 세웠는데 굥교롭게 도 윤석렬 대통령은 집권하자마자 청와대에서 용산집무실로 옮겼다. 이후 한국사회는 어떤 변화를 겪을지 지켜봐야겠다.
광화문 한국통신 KT건물에서 교보문고를 지나 종로 쪽 광장 끝으로 가면 오래된 비석이 있다. 대부분 이비석을 그냥 스쳐 지나갈 뿐 무슨 비석인지 언제 만들었는지 잘 모른다.
이 기념비는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한 1897년(광무 원년) 이후 황제로서 광무 6년이 되는 1902년 세운 기념비이다. 대한제국시절 세운 이 기념비의 비문에는 고종이 제위에 오른 것과, 광무라는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한 것, 그리고 고종이 즉위 40년이 된 사실 등을 기록했다.
사실 이 시점은 고종이 조선의 왕으로 즉위한 지 40년 되는 해로서 고종 어극 40년 칭경기념비(서울 高宗 御極 四十年 稱慶紀念碑), 속칭 비각(碑閣)이라고 한다.
우리가 오랫동안 식민지시대 교육을 받아와서 일제강점기 모든 것이 이뤄진 것으로 생각했던 것과 달리 조선은 스스로 서구 기술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 1885년 처음으로 전신이 들어오면서 서울과 인천, 서울과 의주, 서울과 부산이 연결했다. 특히, 대한제국을 선포하는 시기는 본격적으로 앞선 기술을 받아들였다.
대한제국 선포 한해 전인 1896년에는 서울과 인천을 연결하는 경인선 철도가 들어선다. 1902년(광무 6년) 한성전화소에서 전화 업무가 시작되었다. 즉 칭경기념비는 광장한쪽에 자리 잡은 오늘날 한국통신(KT) 회사의 전신이었던 한성전화소가 설립되던 시절에 만들어진 비석이다.
그 시절 고종황제는 많은 시대적 기술변화를 실감하고 새로운 시대를 열겠다는 포부가 있었을 것으로 생각한다. 그리고, 운명처럼 세종로길에는 한성전화소에서 시작되어 통신과 정보기술을 사업기업인 케이티의 두 건물이 있다.
케이티(KT) 옆에는 미국 대사관이 있다. 주한 미국대사관은 대한민국 내 다른 나라 대사관과 달리 높은 담과 철망이 있다. 그리고, 주변에는 경찰차가 상주하고 있을 만큼 마치 군부대 같은 분위기이다. 어쩌면 해방 후 미군정 시대부터 있어왔던 전통인지 모르겠다.
주한 미국대사관이 1968년부터 50년 넘게 사용해 온 현재의 광화문 청사를 용산 미군기지 자리로 이전할 예정이라고 한다. 새로 지어질 용산의 미국대사관은 보다 한국민들과 친근한 형태가 될 것으로 기대해본다.
그러나, 우리는 광화문에 위치한 미국대사관 주변에 벌어지는 일들을 통해 한국사회가 바라보는 미국의 의미를 볼 수 있고, 미국인들이 한국을 봤던 관점을 읽을수 있다.
미국대사관 주변에는 미국을 반대하는 집회와 미국을 숭배하는 집회가 동시에 벌어진다.
또한, 미국대사관에 줄을 서서 비자받는 사람들이 보인다. 이러한 양극단의 모습이 미국에 대한 한국민의 복잡한 모습이라고 생각된다.
사실상 한국사회를 볼 때 우리가 미국과의 관계는 불평등하고 종속적 관계를 가지고 있다.
2002년 6월 13일 효순이, 미순이가 미군장갑차에 깔려 죽었지만 미군에 의한 범죄는 치외법권적 범죄에 책임을 지지 않을 수 있는 주한미군지위협정(SOFA)을 경험하게 되었다. 대중들은 SOFA가 불평등하다는 것을 알고 분노하게 되었다.
미국 탐사보도 전문기자 팀 셔록은 2018년 제주도 4.3 연구소가 주최하는 강연에서 미국이 전시작전통제권을 가진 입장에서 미국이 독재정권의 무력진압을 허용한 점을 이야기했다.
“1940년대 발생한 제주 4·3과 1980년 광주 5·18을 검토해 보니 30년이 훨씬 넘는 시간 차이에도 두 사건이 무척 닮아 놀라웠다. 제주 4·3은 남한에 수립된 미군정에 맞선 무장 투쟁이고 5·18은 미국을 등에 업은 한국 군사 정권에 맞선 무장 투쟁으로 , 미국이 진압군에 개입했다는 공통점을 찾을 수 있다.”
팀 셔록기자의 이야기처럼 미국이 바라보는 한국에 대한 시선은 매우 폭력적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https://www.hani.co.kr/arti/society/rights/851423.html
이러한 부분은 장병준 교수의 ‘1945년 해방직후사’라는 책에서 나온 것처럼 미국에 한반도보다는 일본이 중요했었기에 전범국 일본에 대해서는 좀 더 온화한 민주주의를 정착하도록 노력했고, 해방 후 대한민국은 아무런 고민 없는 점령군 입장으로 생각했다는 이야기가 담겨있다.
https://www.hani.co.kr/arti/culture/book/1118660.html
우리는 쉽게 일본과 한국에 있는 미대사관 건물형식을 통해 두나라에 대한 미국의 태도를 간접적으로 느낄 수 있다. 현재 광화문에 있는 주한 미국대사관의 건물과 현재 대한민국역사박물관 건물은 모두 미국 국제개발청의 자금 지원을 통해 미국의 태평양건축 엔지니어(PA&E)와 빈넬(Vinnel) 사가 주체가 되어 당시 개발도상국 지원 측면에서 한국 측을 위한 청사 건물을 지은 뒤 공사 자금이 남게 되어 추가로 동일한 형태 같은 공법으로 주한미국경제협조처(USOM) 빌딩을 옆에 지었고 이후 이곳에 미국 대사관이 입주한 것이다.
보이지 않는 도시연구소 - 주한미국대사관, 대한민국 역사박물관
https://invisiblecity.co.kr/%EC%A3%BC%ED%95%9C%EB%AF%B8%EA%B5%AD%EB%8C%80%EC%82%AC%EA%B4%80-%EB%8C%80%ED%95%9C%EB%AF%BC%EA%B5%AD-%EC%97%AD%EC%82%AC-%EB%B0%95%EB%AC%BC%EA%B4%80/
그런데, 이 건물을 보면 주변에 높은 담이 있어 내부에 접근이 어렵다.
반면, 일본에 있는 주일 미국대사관의 경우 일본인의 정서를 최대한 고려한 대사관 건물을 지었다.
주일미대사관은 도쿄의 니 나토 쿠(Minatoku)에 위치하였는데, 서울에 있는 미 대사관과 달리 높은 담도 없고 일본식 다다미를 형상으로 일본인들의 정서를 최대한 배려한 건물이 들어선 것이다.
그런데 , 놀랍게도 현재 광화문 교보생명 빌딩과 동일한 모습일 것이다.
교보생명 건물이 아이러니하게도 일본의 미대사관과 형태가 동일한 이유는 교보생명보험의 창업자인 신용호 회장은 일본에서 미 대사관 건물을 보고 반해서 주일 미대사관을 설계했던 건축 설계자인 시저 펠리(Cesar Pelli)에게 같은 형태의 건물을 설계해 달라고 요청했기 때문이다.
시저 펠리는 고종의 기념비전이 있기도 한 광화문 네거리의 역사성을 살린 새로운 건물을 설계했으나 신용호 회장이 완강히 거부했다고 한다. 그래서 광화문 네거리의 초입이라는 상징적인 장소에 외벽 형태가 일본의 다다미 바닥을 연상케 하는 거대한 판상형의 주일 미국 대사관 모방 건물이 1984년 들어서게 되었다.
광화문에 서면 우리는 매우 복합적인 감정을 가지게 된다. 설마 신용호 회장이 광화문에서 미국이 한국에 세운 미국 대사관의 모습에서 보이는 미국의 태도와 미국이 일본에 세운 미대사관의 차이를 보여주기 위해 만든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우리는 간접적으로 두 건물의 차이를 보면서 미국이 아시아의 두나라를 보는 시선과 온도차이를 비교해 볼 수 있다.
그리고, 비록 교보문고 건물에 걸려있는 좋은 문구를 보면서 감사하기도 하지만, 일본풍의 교보생명빌딩의 존재를 보면서 현재를 사는 한국인들의 정체성 부재와 가치 혼돈을 상징처럼 느끼게 한다.
근대화라는 정의는 왕이 아닌 시민들이 중심이 된 권력집단에 의한 정치제도를 만들었던 프랑스혁명에서 비롯된 공화정시대에서 시작된 개념이다.
결국 근대화를 이루는 요소는 다수의 의견을 모으는 과정이 필요한데, 이러한 방식을 이루는 것이 기술적으로 어렵기에 간접민주주의 및 대의민주주의가 현실적 대안이 되어 근대화 이념을 실천했었다.
그런 면에서 대중 소통이란 민주주의의 필수적인 요소이다. 오늘날에 기술적 진보가 두드러진 분야로 정보통신 발전을 들 수 있는데 오늘날 대중들은 정보통신 기술의 혜택으로 여러 매체를 통해 서로의견을 모을 수 있게 되었다. 광화문 광장에 접한 케이티는 조선부터 이어진 오늘날까지 통신 흐름의 살아있는 증인이고 역사라고 할 수 있다.
우리 사회 근대화는 언제부터일까 생각해 보면 근대화정신을 열었던 시대와 제도적 근대화 시기로 나눠 생각해야 할 것 같다.
아무래도 근대화 정신을 열었던 시작은 동학혁명이라고 할 수 있다. 안타깝게도 일제강점기에 멈추었지만 그 정신은 여운형 선생등 기독교, 불교, 천도교 등 종교지도자들이 주도하고 함께했던 3.1 혁명으로 이어졌고, 해방 직후 여운형선생의 조선건국준비위원회(인민위원회)가 활동하면서 해방의 공간을 열었다.
그러나 미국은 대다수 조선인들의 생각과 달리 통역을 할 수 있는 소수 친일지식인들의 의도대로 움직이고 있었다.
그럼에도 광화문 주변에는 근대화 정신을 가진 지식인들이 머물면서 명동일대에서 근대화 시 문화를 꽃피웠다. 그런 대표적인 문인으로 박인환 선생이 살던 집터를 우리는 KT와 교보 건물 주변 도로에서 찾을 수 있다.
표지석에는 모더니즘 시인 박인환으로 표기되어 있듯 식물·동물·기계·정치·경제·수학·철학 등 근대화된 사회의 특성과 낭만이 담긴 시를 추구했다.
우리가 일제강점기까지는 사실상 왕정과 전체주의 시대였다면 본격적인 근대화 시대는 해방이후일 것이다. 박인환이 활동한 해방 이후는 근대화 정신이 움트고 싹트는 시작점이었다고 할 수 있다.
박인환은 1926년 강원도 인제출신으로 면사무소 직원이었던 아버지 박광선과 어머니 함숙형 사이에서 4남 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부친의 강요로 평양의학전문학교에 입학했으나, 1945년 8.15 광복으로 학업을 중단하고 서울로 내려와 종로에서 현재는 대한보청기 자리에 '마리서사(茉莉書肆)'라는 서점을 경영하면서 본격적으로 시를 쓰기 시작했다.
이 서점은 절친이자 선배 시인 오장환의 '남만서점'을 해방 후에 물려받은 것이었다. 여기서 그는 아내도 만났다. 마리서사에서 김수영 등 많은 문학인들과 교류했으며 명동 문학시대로 이어졌다.
그는 1955년 《박인환선시집》을 출간했고, 이듬해 1956년 소설가 이상의 기일을 기념한다고 3일간 폭음한 후 급성 알코올 중독성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 향년 29세였다.
박인환의 대표작으로는 '세월이 가면'과 '목마와 숙녀' 등이 있다.
'세월이 가면'은 박인환의 마지막 시로 알려져 있다. 당시 문인들의 아지트였던 명동의 대폿집 '은성'에서 극작가 이진섭, 가수 나애심과 술을 마시던 중 이진섭이 즉석에서 곡을 붙이고 나애심이 불렀다. 이후 테너 임만섭이 그 악보를 받아 들고 다시 불렀으며, 주위의 모든 손님들이 몰려와 노래를 감상했다. 참고로 '은성'의 사장은 최불암의 어머니였다.
'목마와 숙녀'는 박인희의 노래로 많이 알려져 있지만, 원작 시의 경우 노래에 생략된 후반 부분이 더해져 한층 더 탄식과 체념의 정서가 짙다.
최근 오세훈 시장이 광화문에 엄청난 규모의 태극기를 세우려고 한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물론 우리에게 국가를 상징하는 국기는 소중하다. 그러나 광장에 태극기로서 국가란 개념을 최고로 올린다는 것은 국가주의 혹은 파시즘 시대로 회기 하는 것을 말한다.
권력의 중심으로 시민이 아닌 무형의 국가란 상징을 숭상해왔던 인류역사가 인류를 얼마나 고통을 주고 비극적이었는지 역사는 증명한다. 자칫 국가주의는 히틀러의 전체주의시대 같은 참혹한 비극적 결말을 맞게 될 수 있다. 우리도 군사정권시절 그래왔듯 북한도 그런 전체주의사회 특성을 가지고 있다.
올해는 동학혁명이 일어난 지 130년 된 해로서 사람이 곧 하늘이라고 하는 명제를 던졌고, 130년이 지난 오늘날 사람들에게 조차 그 개념은 진보적이다. 남과 북이 언젠가 새로운 시대를 함께 맞이하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분단 이전 본질을 찾아야만 한다. 그리고 인류 역사 발전 흐름을 보고 다음단계가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이번 프랑스올림픽을 보면서 떠올린 것은 그들은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는 자부심이 강하다는 것이었다.
개막시에 나타난 왕비목을 잘라서 왕권을 폐기하고 공화정을 열었던 그들의 역사가 담겨 있었다.
즉 인류의 진화란 과거의 불합리한 문화를 폐기하고 새로운 구조와 시스템을 만들어 더욱 효과적이 되었을 때 인류 진화가 완성된다.
광화문광장에 서서 주변을 보면서 도시에 숨겨진 역사를 보자. 우리가 사는 곳 모두에 우리가 현재를 살아가는 본질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 불합리함도 있고, 답답함도 있고, 분노도 있다. 이러한 문제인식을 우리들의 마음속에 담는 것이 바로 인류진화의 첫 단계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