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오렌지양 Aug 04. 2021

게임과 결혼한 남편

제법 잘 맞는 부부


게임과 결혼한 남편



딴 딴따다~ 딴 딴따다~

결혼 행진곡이 울려 퍼진다.


"신랑 입장!"


신랑이 씩씩한 걸음으로 버진로드를 걷는다.

곧이어, 면사보에 수줍은 얼굴을 가린 신부가 저 멀리서 모습을 보인다.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신부 입장!"


조심조심, 한 걸음 내딛으면서 신랑 옆으로 가는 신부.

둘은 그렇게 마주 섰다.

신랑은 떨리는 마음으로 신부의 면사포를 벗긴다.

신랑은 조심스레 신부의 이름을 부른다.


"사랑해.... 롤....!!"


그렇다, 우리 남편은 게임!

리그 오브 레전드, 일명 롤이라고 불리는 게임과 결혼했다.


우리 남편은 연애 때도 게임을 좋아했지만 결혼해서는 더더더더 좋아하는 것 같다

몸과 마음이 편해서 게임이 더 잘 된다나 어쩐다나...


아시는 분들은 아시겠지만 롤은 게임 한 판이 짧게는 30분,

길게는 1~2시간까지 하기 때문에 '한 판만 하고 끌게'라는 말을 절대 들어선 안 된다.

'한 판만 하고 끈다'는 남편을 기다리다간 2시간, 3시간이 훌쩍 넘어가기 때문이다.

기다리다 지친 나는 먼저 잠이 들고 남편은 새벽 2시가 넘어서야 침대로 슬금슬금 들어온다.

퇴근하고 나랑 보내는 시간보다 게임이랑 보내는 시간이 훨씬 더 많은 남편.


이렇게 맨날 게임만 하는데 그렇다고 게임을 잘하느냐? 잘하면서 맨날 하느냐?

그건 또 아니다. 맨날 지고 지고 또 지는데도 게임을 한다.

(얼마나 못하냐면 1년 내내 매일 게임을 하는데도 브론즈다...)


이놈의 게임 때문에 있었던 우리 부부의

에피소드 몇 개를 꺼내어 보려고 한다.


#문상 도둑이야!


남편 회사에서는 생일, 명절 때마다 문화상품권 20만 원을 준다.

우리는 이 상품권으로 쇼핑을 하기도, 외식을 하기도 한다.

그래서 나는 문상을 서랍 깊숙이 넣어서 현금처럼 소중히 보관한다.

올해 설날에도 남편은 어김없이 20만 원의 문화상품권을 나에게 건넸다.

그러면서 넌지시 한 마디 말했다.


"오렌지야, 이번에는 문화상품권 어디에 쓸 거야?"


"외식하거나 책 사거나 영화 보거나? 쓸 데야 많지~ 왜?"


"나 만 원만 주면 안 돼?"


"만 원? 갑자기 왜?"


"음.... 책, 책 사려고!"


나는 남편의 동공이 흔들리고 목소리가 떨리는 그 순간을 포착했다.


"뭐야, 무슨 꿍꿍이야? 필요한 거 있으면 말해~ 사줄게"


남편은 속내를 들켰는지 아니야, 아니야~ 하면서 손사래를 치면서 갔다.

나는 '뭐야 왜 저러지?'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는 늘 그랬듯, 문화상품권을 화장대 서랍 안쪽에 넣어두었다.


그러던 어느 날,

모처럼 남편과 휴일에 외식을 하러 가기로 했다.

서랍 깊숙이 보관했던 문상을 꺼내렸는데...

분명 5만 원짜리 4장이었던 문화상품권이 3장으로 줄어있었다!

이게 대체 어디로 갔지?

범인은 한 명뿐!


"사과 남편아! 혹시 문화상품권 꺼내서 썼어?"


"아니?"


"수상한데...  돈이 필요하면 말을 하지~ 왜 몰래 꺼내서 써~"


"나 아니라니까? 어디 떨어뜨린 거 아니야?"


남편은 정색한 얼굴로 서랍장 주변을 뒤지기 시작했다.

진심이 넘치는 액션에 나는 당황했다.

내가 진짜 잊어버렸나? 머리를 긁적이던 그때,

남편의 컴퓨터 모니터에 떠있는 리그 오브 레전드의 캐릭터가,

분명 맨날 봤던 같은 캐릭터인데 뭔가 멋들어진, 번쩍번쩍한 옷을 입고 있는 거다.

(머리 스타일도 장난 아니었다)

나는 설마설마하는 마음으로 다른 캐릭터들을 눌러봤고

이런! 남편이 주로 사용하는 캐릭터가 5명인데 5명 다! 비까 번쩍한 옷을 입고!

아주 파티 파티 댄스파티 난리가 난 것이다.

(코스튬도 하나만 산 게 아니라 한 캐릭터당 몇 개를 샀다! 세상에...)


"오빠아아아아아!!!! 이거 뭐야!!!!"


그렇게 남편은 나 몰래 문화상품권 5만 원을 슬쩍해 롤 캐릭터의 코스튬을 샀고

나름 완전 범죄를 계획하며 폭풍 연기를 펼쳤지만, 나에게 완벽하게 들켰다.


#뜻밖의 장점

우리 남편은 앞서 얘기했듯이 연락이 잘 되는 스타일이 아니다.

연애할 때도 그렇고, 결혼해서도 그렇고 남편은 연락에 참 무심하다.


하지만, 남편이 롤에 빠지고 나서는 남편이 내 연락에 답장하지 않아도

남편이 뭐 하고 있는지 실시간으로 알 수 있게 되었다.

바로 '롤 전적 검색' 덕분이다.


이 기능이 얼마나 편리하냐면, 나는 연락을 자주 하는 스타일이고

남편은 연락을 자주 안 하는 스타일인데

이 기능이 우리 부부의 오작교(?) 역할을 톡톡히 해내 주었다.

덕분에 나는 남편을 닦달할 일이 없고, 남편도 연락에 스트레스받지 않는다.

게임 덕분에 발견한 아주 뜻밖의 장점(?!)이었다.


하지만, 이런 장점이 있으면 뭐하랴,

우리 남편은 내 얼굴은 보지도 않고 하루종일 컴퓨터 모니터만 쳐다보고

상대팀 부모님의 안부를 물으며 열심히 게임만 하는 것을.


하도 싸우고 지지고 볶아서 이제는 싸울 힘도 없을 때쯤

남편은 요즘 정신을 차렸는지 새벽 3시가 전에 게임을 끄고 잔다.

(새벽 3시면 장족의 발전이다. 예전에는 평일에도 5시, 6시까지 했다)


그래서 내가 물었다


"요즘엔 웬일로 게임을 일찍 꺼?"


"네가 잔소리 안 하니까 별로 재미없어"


"... 뭐야? 내가 잔소리하는 걸 즐겼어?"


"네가 끄라고 하니까 더 오기가 생겨서 늦게까지 했는데 요즘엔 별말 안 해서 나도 별로 흥이 안나"


참, 청개구리도 이런 청개구리 없다.

다행히 요즘은 게임과 적당한 거리두기를 하지만 그게 얼마나 갈까.

부디 게임 좀 적당히 해라 남편아













매거진의 이전글 결혼 4년 차, 각방을 쓰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