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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에녹 Apr 07. 2024

후쿠오카에서 인생 첫 버스킹


팔 년 전 인생 처음으로 혼자 해외여행을 갔다.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말은 한국어뿐이다. 엄마 아빠가 한국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저절로 습득한 자랑스러운 모국어. 한국 사람이랑도 소통에 종종 실패하는데 머나먼 타국땅에서 혼자 어떻게 여행을 할 생각을 했을까. 그래도 혹시 모르니 비교적 한국과 비슷하고 안전하다고 생각되는 일본 후쿠오카로 갔다.


비행기에서 내리고 공항에 있을 때는 한국어가 찾으면 보였다. 공항에 나오니 나는 고아가 돼버렸다. 즉시 생존을 해야했다. 방구석에서 조사했던 남들의 여행기는 다 허상이었다. 버스 타는 것조차 어려웠다. 한국은 카드를 탈 때 찍고 내릴 때 찍고 하면 되는데 일본은 아니었다. 목적지까지 얼마가 나오는지 탈 때부터 알아야 했다. 정확히 얼마인지도 모르겠는데 말이다. 그리고 어떤 버스는 뒷문으로 타지를 않나. 그 기준이 뭔지도 모르는 채 눈치껏 사람들이 타는 곳으로 탔다.


어찌저찌 캐리어 하나와 백팩을 맨 인천 촌놈이 후쿠오카에 입성했다. 오로지 목적지에 가야 한다는 일념 하나로 여유라곤 일절 없이 앞만 보고 달려왔다. 내 의사와 상관없이 나는 묵념을 하며 여행을 시작했다. 식당에 들어가면 일본어를 할 줄은 모르니 바디 렝귀지를 써가며 음식을 주문했다. 지하철역무원과 대화를 해야한다면 손짓 손짓 몸짓 발짓까지 해대며 내 의사를 전달했다.


저녁을 먹고 잠시 숙소에 들려서 한숨을 돌린다. 내가 이렇게 쓸모없는 사람이었다니. 해외에 나가면 외국말을 꼭 공부해야겠다는 마음이 든다는 여행 선배님들의 말이 떠오른다. 아니면 기술의 엄청난 발전이 이루어져 내가 한국말을 하면 상대 외국인은 본인의 모국어로 알아서 해석이 되는 도구가 나온다거나. 그렇다면 나는 말을 배우지 않아도 되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잠시 해본다.


숙소에만 있을 수 없으니 길을 나선다. 편의점에서 머쓱한 웃음을 띄우며 캔 음료 하나를 계산한다. 내게 상냥한 미소로 말을 건네는 알바생. 그 미소에 나 또한 알아들었다는 듯 일본어로 "하이"로 화답한다. 편의점을 나오는 순간 내 손에는 음료 한 캔과 비닐봉지가 들려있었다. 지금 이 순간 세상에서 쓸모없는 건 이 봉지랑 나인가 보다.


길 따라 걷다 보니 한적한 공원에 들어왔다. 어디선가 들려오는 기타 소리와 노랫소리. 그 소리를 따라가니 어느 한 할아버지가 맥주 한 캔을 옆에 두고 버스킹을 하고 계시더라. 나는 기타를 칠 수 있는 사람이어서 그 광경이 퍽이나 좋았나 보다. 음료를 홀짝이며 옆 벤치에 앉아 음악을 듣고 있었다. 그 순간 들려오는 모국어. 한국 분이세요?


네. 저 한국 분이에요. 반가웠다. 일본에서 만난 한국인이라니. 내가 보기에 딱 한국인 같았다며 말을 걸었다고 한다. 그분은 버스킹하는 일본 할아버지와 오래된 인연임을 말해줬다. 나도 기타를 친다는 말을 들으시더니 내게 기타를 흔쾌히 내주셨다. 익숙한 코드를 눌러본다. 피크를 잡는다. 드르릉. 인생 첫 버스킹을 일본에서 하다니. 그 자리에서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불렀다. 이름도 모를 후쿠오카의 공원에서 말이다.


버스킹이 끝나고 그 자리에서 중간 통역자를 거쳐 할아버지와의 이야기가 시작됐다. 그중 인상 깊었던 말씀은 어차피 이곳에서 앞으로 볼 사람들은 한 명도 없을 거다. 그러니 용감해져라. 혼자 외국에서 스스로를 쓸모없다고 생각한 내게 쓸모가 넘치는 말이었다. 옆에서 얘기하면서 깐 과자 봉지와 빈 맥주 캔이 늘어갔다. 아까 편의점에서 의도치 않게 받은 봉지를 꺼내 쓰레기를 담는다.


그 뒤로 여행하는 내내 부딪히기로 마음먹었다. 되도록 많은 사람과 이야기를 하고 가자. 뭐가 됐든 말이다. 그러면서 영국에서 여행 왔다는 사람과 되지도 않는 영어를 쓰기도 했다. 할머니부터 손녀까지 삼대가 일본으로 놀러 왔다는 한국 사람들과 포장마차에서 이야기꽃을 피우기도 했다. 일본 게스트 하우스에서 알게 된 룸메이트 형은 두 살 터울의 고등학교 선배였고 일본에서 처음 만난 내게 저녁을 사주셨다.


후쿠오카에서 한국으로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이 모든 게 꿈만 같다고 생각한다. 다시 보지 않을 사람들이니 이곳에서만큼은 용감해지라는 말을 다시 보지 못할 분께서 해주셨다. 팔 년이 지난 지금도 그분을 다시 뵙지는 못했다. 또 어디선가 나 같은 여행객을 키워내고 계시지는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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