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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adion Apr 08. 2021

예술과 관음의 불편한 줄타기를 바라보는 신랄함

<인 더 하우스>,프랑수아 오종, 2012

 중학생이 동급생의 집안에 끼어들어  아이의 어머니에게 이성으로서 접근하는 이야기를 문학 과제로 제출한다. 문학교사는 학생의 뛰어난 필력에 그의 문제 행동을 독려하며 다음 이야기를 계속 읽고자 한다. 그런데  학생은 친구의 집안을 관음 하는 일에서  나아가 버리면서 문학교사의 삶이 꼬이기 시작한다는   영화의 줄거리다.  과정의  때리는 상황 속의 아슬아슬한 관능을 엿보며 다음 전개를 궁금해하도록.


"당신 눈에도 변태 예술 같아?"

"글쎄."

"사장은 안 팔리면 변태래. 그러다 돈 벌면 말투 싹 바꿔. 그런 속물들은 장사꾼이라고."


중학교 문학교사인 제르망이 갤러리 직원인 아내에게 묻자 그녀는 이렇게 답한다.

예술과 선정성의 경계는 어디인가? 눈에 보이는 그런 저급한 선정성 말고도 인간에 대한 존중을 넘어서는 도를 넘는 적나라한 칼질은 어떤가? 예술에 따르는 관음이란 가장 인정받는 고급 작품, 고전들에서도 엿볼 수 있다. 가장 내밀한 마음조차 그때그때 스치는 감정들의 치밀한 포착을 통해 어리석음, 옹졸함, 상스러움을 기어코 끄집어낸다. 우리는 그 솜씨에 음률을 타는 문장과 적당히 지적인 예리함이 받쳐줄 때 그것을 우아한 예술로 칭송한다.


아니라고 생각하는가? 스탕달의 <적과 흑>을 보라. 고전으로 지금까지 널리 읽히는 이 책을 예로 들어보자. 이 책의 앞부분에는 출세욕에 사로잡힌 얼뜨기 가정교사 청년과 그가 고용한 집의 나이보다 순진하고 어리석은 귀족부인의 간통 이야기가 나온다. 이렇게 놓고 보면 세인들의 구미를 당길만한 뻔하게 저급한 화제 이리라. 그러나 이 이야기는 빤한 통속 소설이 아니라 뛰어난 고전소설로 후세에 남았다.


이 소설은 한 인물과 시대상 사이를 드라마틱하게 잘 풀어냈고 거기다 저자의 필력이 뒷받침되었기 때문이다. 일순 명멸하는 인물의 감정들을 낱낱이 포착해 일거일동의 흐름에 당위와 다채로움을 부여하는 묘사가 탁월하다. 그런 묘사는 시대의 비극적인 인물상인 주인공에게서도 무의식적으로 스치는 옹졸함, 미숙함, 상스러움 마저 백일하에 드러내 놓는다. 이런 방식은 직접적인 성애에 대한 묘사나 잔인한 광경 없이도 잔인하고 선정적일 수 있다. 처음 이 책을 읽을 때는 한 청년의 야망과 좌절에 주목하며 읽어나가겠지만 후에 한 장면씩 낱낱이 분절해서 들여다본다면 웬만큼 무감한 사람이 아니라면 세밀한 칼질이 드러내는 시선의 투과성에 반응하게 될 것이다.


처음에는 예리함에서 가려운 곳을 긁듯이 시원한 감각을 느끼며 같이 잔인해져서 슬쩍 웃게 되지만 후에는 치밀함에 질려 버릴 수도 있다. 꿰뚫는 시선 아래 모두가, 같은 인간으로서 다르지 않음을 깨닫고 말이다. 뭐 그나마 적과 흑의 작가는 인물들에게 비판적인 태도라기보다 중립적인 편에 속한다. 굳이 풍자와 비판을 내세우지 않아도 우리에게 제시되는 현상의 표면을 벗겨내는 통찰의 시선은 의미 있는 작품들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난다. 그래서인지 인간과 사회를 해부하는 과정의 일환으로 등장인물의 마음이 발가벗겨질 때, 해학까지 발생한다면 사람들은 즐거워하며 기꺼이 들여다본다. 그런데 여기에는 관음의 심리도 끼어있다는 혐의를 떨칠 수가 없다. 신랄함이 관음증이 아닌 격조 있음을 보장해 줄까?


사실 소설보다도 영화의 시선이 인간의 관음 욕구를 극대화시키는 매체 이리라. 굳이 통찰에 의한 언어 기호로 풀어낸 치밀한 날카로움이 없더라도 얼마든지 일상에서 들어가 보지 못하는 세계를 생생한 영상을 통해 볼 수 있다면 훨씬 쉽게 자극이 극대화될 수 있다. 훨씬 단순하고 원초적인 감각을 추구하기도 효과적이다. 사람들의 시선은 섹스와 폭력의 장면에 집중된다. 그러나 영화라고 만든 이의 시각이 설정되지 않고 순수하게 관객의 방식으로만 보게 되지는 않는다. 영화 역시 통찰을 통해 신랄해질 수 있다. 바로 영화를 보는 시선에 대 영화 스스로 의식하는 것이다. 때로는 열심히 현실이 아니 아닌 이미지를 탐하고 나서도 관자 역시 발가벗겨질 수 있다. 시선의 주인이라 여기던 문학 선생 제르맹과 제자 클로드처럼.


환상으로 관음을 공유하는 기묘한 사제간의 두 사람은 벗겨보면 참 보잘것없는 존재다. 어린 나이에 어머니가 떠난 집에서 장애인 아버지를 돌보며 사랑과 관심에 목말라하는 소년, 나이를 먹어도 존중이나 화합을 모르고 재잘난줄 알며 현실의 주변인들은 안중에도 없는 실패한 소설가인 문학 선생이다. 둘에게 차이가 있다면 자기 자신의 감정을 포장하지 않고 주변의 심리에 속단하지도 않으며 본능적으로 파고드는 능력이 있는 제자가 그나마 글재주가 있게 보이는 것이다. 늙은 선생은 그 조차 없어 제자를 이용해 대리만족을 하려 한다. 둘은 현실에 의해 좌절된 자기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서로를 이용한다. 관객, 독자들은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저 "다음에 계속..."이란 말을 비판하면서도 기다리는 제르망과 뭐가 다르냐고 영화는 끝자락에 못 박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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