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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트로브잣나무 Jul 27. 2021

최고의 입시생

2018-09-07에 작성된 글.

재수 없지만 나는 입시시험에 최적화된 학생이었다.


연기나 무용을 잘하지 못해 부족하다는 느낌이 들 때면 선생님들에게 털어놓고는 했다.

“쌤, 저 진짜 못하는 것 같아요.”

나의 토로에 선생님들은 이렇게 말하곤 했다.

“넌 뭐 하나라도 붙을 거야. 걱정하지 마”

“대학은 잘 갈 거야. 무용만 좀 더 열심히 해”


그 말에 부응이라도 하듯 연극학과로는 대한민국에서 가장 유명하다는 곳에 입학하게 되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나는 그곳에 갈 수 있는 확률이 꽤나 높은 아이였다. 172cm의 큰 키와 마른 몸. 내신 성적 1등급. 노래라는 확실한 특기. 모범생 같은 외모와 자세. 그랬기에 입시 준비를 하며 겪었던 콤플렉스나 고민은 크게 심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뭐가 문제냐고? 바로 입시를 하기에만 딱 좋은 조건을 갖춘 게 문제였다. 나는 연기를 어떻게 하는지도 모르는 학생이었다. 보는 눈도 전혀 없었기에 뭐가 잘하는 건지도 몰랐다. 그저 대사의 분위기만 파악하고서는 섣불리 말하고 움직였다. 말하는 방법도 몰랐지만 몸을 어떻게 움직여야 할지도 모르는, 그저 노래만 곧 잘하는 학생이었다. 물론 뮤지컬은 무척 좋아했지만 노래 연기만 했지 대사 연기에는 흥미가 없었기에 그에 대한 공부도 연습도 많이 하지 않았다. 그저 좋은 소리와 발음으로 대사를 읽을 뿐이었다.


좋은 학교에는 갈 수 있어도 좋은 배우는 될 수 없는 아이였다.


질의응답 편


고등학생이던 나는 당시 외적으로나 내적으로나 다른 학생들에 비해 조금 더 단정하고 모범적으로 보였다. 질의응답 연습 면접을 할 때도 바른 태도와 반짝이는 눈빛으로 모법 답안을 내놓고는 했다. 하지만 어느 날이었다.


모의 면접 중 선생님이 질문했다.

“가장 최근에 본 공연 이름이랑 그 공연 어땠는지 얘기해 봐”

“OOO입니다. 공연의 주제는 좋았지만 어떤 장면들의 연출들은 무엇을 표현하려는 것인지 전혀 보이지 않았기에 좋은 공연이라고는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갑자기 표정이 날카로워진 선생님. 나의 이 말을 마지막으로 모의 면접을 잠깐 중단하시고는 그 장면을 보고 있는 친구들에게 설명하기 시작했다.

“얘들아. 이렇게 부정적으로 말하면 안 돼. 면접 보는 교수님들이랑 그 작품 연관되어 있으면 어쩌려고 그래. 무조건 긍정적으로 말하고 좋은 것만 말해야 돼, 알았지?”

대답하는 아이들.

“네.”


이어서 면접이 또 시작된다.

“어떤 배우가 좋은 배우라고 생각해요?”

이 질문에 대한 확실한 답을 준비하지 못했던 나는 순간 약간의 재치와 당돌함을 발휘하고 싶었다. 지루한 평가를 하고 있을 심사위원에게 역 질문을 함으로써 내가 그에 맞는 배우가 되겠다고 할 참이었다.


“많이 생각해 보았지만 아직은 정확히 모르겠습니다. 교수님은 어떤 배우가 좋은 배우라고 생각하시나요?”

얼굴이 갑자기 굳어지는 선생님.

“자, 얘들아. 여기서 이러면 될까, 안될까?”

애매한 상황에서 우물쭈물 대는 친구들.

“어떤 경우라도 반문하거나 저렇게 물어보면 안 돼. 어떻게 면접 보는 사람이 심사위원한테 이렇게 물어볼 수가 있니. 예의 없어 보이기도 하고 그러면 뽑기 싫어져.”

대답하는 아이들

“네에..”


“이어서 할게. 마지막 질문이야. 지금 활동 중인 연출가 중 가장 좋아하는 사람은?”

“OOO연출가님입니다!”

험악해지는 선생님의 표정.

“스탑. 너 지금 중앙대 모의시험 보고 있잖아. 근데 다른 학교 출신 연출을 말하면 어떡해!”

“죄송합니다...”

마음에 조그맣게 자리 잡은 불만.

‘나는 그 연출가 작품 진짜 좋았는데... 굳이 그 학교 출신으로 말해야 하나?’

초기 모의 면접에서 이런저런 코멘트들을 잔뜩 들은 뒤, 다시 질의응답 리스트의 답변을 처음부터 다시 작성하기 시작했다. ‘내가 가장 최근에 본 공연은 OOO이지만 이건 별로 좋지 않다고 했으니, 좀 더 전에 본 걸로 말하고...’


그렇게 나는 선생님이 원하는 답변에 나를 맞춰갔다. 교수님들이 원한다는 학생의 모습에 더욱 가까워지는 중이었다. 그렇게 새로워진 매뉴얼대로 답변을 외우고 있을 때쯤, 다음 모의 면접 시간이 찾아왔다.


“이 학교에 오고 싶은 이유는?”

“OOO연출가님의 △△△라는 작품을 보고 연출과 그에 맞는 연기 양식이 참 새롭고 독특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러한 연출 디렉팅을 받고 연기하면 배우들은 얼마나 즐거울까 생각했습니다. 궁금해서 더 알아보니 연출가님이 이 학교의 교수님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 이후로 이 학교는 저의 꿈이 되었습니다!”

흡족해하는 선생님의 표정.

“얘들아 봤지? 이런 게 모범 답안이야. 너희들도 참고해.”

“네~”


지금 돌이켜보면 모범 답안이라는 게 대체 뭘까 싶다. 나는 이미 정해진 정답에 날 끼워 맞췄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온전한 자신만의 생각을 하고 말할 수 있을까? 획일화된 삶에 적응된 한국 학생들 중 그 누가 no!라고 외치고 자기만의 삶을 살 수 있을까? 지금 생각해 보면 당시 ‘나의 생각’ 은 거의 존재하지 않았던 것 같다. 내 생각이 꿈틀 거리기도 전에 남의 의견이 정답인 것 같으면 그 생각을 내 것으로 만들고는 그게 내 생각인 것 마냥 말하고 다녔다.


연극영화과 입시 면접 질문엔 이런 것들이 있다. 좌우명이 무엇이냐, 자신의 장점이 무엇이냐고 생각하냐, 연기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냐, 인생철학은..? 등등의 것들이다. 사실 난 그 답을 몰랐다. “아직 정확하지 않아요. 몰라요”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렇게 말했다간 남들에게 생각 없는 아이로 비칠 것 같았다. 무엇보다도 합격하지 못할 것 같았다. 그걸 들키고 싶지 않아 그럴싸한 답변을 만들어냈다. 그리고 난 그 반에서 제일 면접을 잘하는 아이로 칭찬받았다.


나를 비롯해 함께 입시했던 친구들은 대학 교수님들이 맘에 들어할 만한 답변을 입시 선생님들과 함께 정해갔다. 그리고 그 질의응답을 달달 외워갔다. 물론 긍정적이고 좋은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융통성과 포장을 하는 건 좋은 일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아이러니했다. 자신의 생각을 보여달라는 하는 질문의 답에는 정작 학생들의 생각이 담겨있지 않았다.


무엇이 우릴 그렇게 만들었을까? 누구보다 솔직함과 각각의 개성을 요구하는 곳에서, 모범답안이 존재하고 거기서 벗어나면 안 된다는 이 일그러진 구조. 물론 전부 다 그런 건 아니었겠지만, 내가 느끼고 보고 들었던 건 그랬다. 연기 입시 카페에서는 합격자들이 질의응답 후기를 공유했고, 우린 어떤 답변의 패턴이 합격을 야기하는지 훑어보았다.


예의 바르지만 재치 있어야 했고 끼는 있으되 거슬리지 않을 만큼만 보여줘야 했다. 그 사이를 지키는 게 나에게는 무척 어려운 일이었다. 아마 다른 아이들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그냥 있는 그대로를 말할 수는 없었던 걸까? 스무 살도 채 되지 않은 우리가 인생철학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고 있어야 했나?


자기 자신에 대해 생각하는 건 무척 가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자신을 어떻게 하면 더 효과적이고 창의적으로 보여줄 수 있는지 고민해 보는 것 또한 가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게 입시라는 두려움의 벽 안에 갇혀 있을 땐, 나의 생각이 왜곡되고 포장된다는 기분이 들었다. 그들이 싫어할 만한 내 모습을 검열하는 작업일 뿐이었다. 그런 모습마저 나인데도 말이다.


심사위원들 또한 정형화된 무수한 대답들 속에서 조금이라도 창의적이고 개성 있는 답변을 바라고 있었을까? 아니면 정형화된 ‘모범 답안’을 말하는 학생을 기다리는 것일까? 그리고 만약 그때로 다시 돌아간다면 과연 나는 솔직하게 말할 수 있을까?




그렇다면 내가 대학에 가고 싶었던 ‘진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나는 상당히 치밀한 아이 었다. 티 내거나 말하고 다니지는 않았지만 누구보다 입시 정보에 민감하고 합격의 가능성을 높이는 일에 전력을 다했다.


면접 모의고사 때 어떠한 학교에 가고 싶은 이유를 말하라 했을 때면 그럴싸한 답변을 쥐어 짜내 말하고 다니곤 했다. 그렇다고 가고 싶은 이유가 아예 없는 학교에 지원하지는 않았지만 그 이유들은 대부분 면접에서 결코 이야기할 수 없는 속물적이 이유들이었다. 이제부터 면접에서 말하지 못한 진짜 이유들을 말해보겠다.


한예종 같은 경우 지금 현재 가장 네임드 있는 연기과이며 창작 뮤지컬을 많이 한다는 점에서 끌렸다. 하지만 무엇보다 가장 큰 이유는 ‘간지’였다. 간혹 가다 한예종 연기과 과잠바를 입고 다니는 사람을 발견하기라도 한다면 존경과 부러움의 눈빛으로 바라보곤 했다. 선배들 중 한예종 연기과에 입학한 사람은 없었지만 1차라도 합격했던 선배가 있다면 그 조차도 대단하게 느껴지는 정도였다.


나머지 학교들 또한 ‘이름값’ 때문이거나 제자들을 외부로 이끌어 주는 교수님들이 있기에 지원한 것이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면접 질문에 이런 걸 말할 수는 없지 않나. 그래서 적당한 핑계들을 만든 것이었다.


중앙대에 가고 싶었던 이유를 말하고 다닐 때 속물처럼 보이고 싶지 않아서 ‘리프라이즈’라는 뮤지컬 동아리 때문이라고 했다. 물론 이것도 하나의 이유였지만 훨씬 더 큰 이유는 바로 학교의 이름과 그 학교에 계신 한 교수님 때문이었다. 애초에 교수님의 마이너리티 한 감성의 대중적인 작품을 좋아하기도 했지만 무엇보다도 학교에 다니는 제자들을 공연에 쓴다는 사실이 나를 그 학교에 가고 싶게 하는 명확한 이유였다.


학교에 가고 싶다기보다 어서 외부 뮤지컬을 하고 싶은 마음뿐인 내게 그야말로 중앙대는 꿈을 빠르게 이뤄줄 수 있는 학교였고 그 이유가 목표의식을 확실하게 심어주었다. 포털 검색과 선생님들을 통해 학교에 대한 정보를 꼼꼼히 알아보았다. 내가 제일 궁금했던 건 어떤 제자들을 공연에 투입시키는지, 그 제자들은 어떻게 생겼으며 그들의 목소리는 어떤지, 연기를 어떻게 하는지 등이 제일 궁금한 부분이었다. 하나라도 알아내서 나에게 적용시키고 싶은 마음뿐이었기 때문이다.  


쉬는 시간이면 그 학생들의 SNS 계정에 들어가 염탐을 하곤 했다. 한낱 입시생에 불과한 내게는 그들이 어떤 옷을 입으며 심지어 어떤 음식을 먹는지 그런 사소한 것들마저 궁금했다. 그들과 비슷한 옷을 입고 비슷한 행동을 하면 나도 그 학교에 가지 않을까 하는 환상도 가졌었다. 그들이 지금 뮤지컬에 막 데뷔하고 공연을 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나에겐 희망이었다.


‘나도 이 학교에 입학해서 저 교수님 마음에 들어야지. 그리고 얼른 데뷔할 거야!’

그렇게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은 중앙대 가기 플랜이 만들어졌다.




하지만 그런 플랜을 가지고 있던 것과는 별개로 정작 시험에 합격하지 못하면 그 모든 것은 도루묵이었다. 실기시험은 2차까지 있는데 일단 1차 시험은 자유곡 하나였다. 나의 메인 입시곡은 뮤지컬 <Brooklyn>의 ‘Once upon a time’이라는 곡이었는데 끝으로 갈수록 무자비한 고음이 도사리는 곡이었다. 1차 시험의 수많은 아이들 중에서 조금이라도 눈에 띄려면 그 고음 파트를 보여주는 게 유리했다.


하지만 시험 당일에 교수님은 앞에 노래를 30초만 들으시고는 바로 무용 턴을 돌아보라고 지시했다. 이런, 배웠던 무용 동작 중에 제일 자신 없는 게 턴이었다. 마음속으로는 식은땀이 흘렀지만 누구보다 멋지고 바르게 자세를 잡았고 오른쪽으로 턴을 돌려는 순간, 휙 중심이 흔들리면서 상체가 앞으로 쏠리고 말았다.


‘아, 망했다.’


하지만 마지막 자세와 표정은 세상에서 제일 당당한 듯이 지어 보였다. 들려오는 교수님의 말씀.

“네. 가 보세요.”

속으로는 ‘망했다. 중대는 가기 글렀다.’라고 수 백번을 외치고 있었지만 밖으로는 겉으로는 환한 미소를 지으며 “네! 감사합니다!”를 외쳤다.


망쳐도 끝까지 자신 있게 나가라는 선생님들의 말을 되새긴 뒤 입시 장소에서 퇴실했다. 입시 진행을 맡고 있는 학생들과 나와의 거리가 더욱 멀게만 느껴졌다. 조금 풀이 죽은 채로 학교 밖으로 나갔고 그 즉시 입시 선생님에게 얼른 전화를 걸었다.


“응, 시험 잘 봤어?”

“선생님....”

“목소리 보니까 잘 못 본 모양이구나.”

“노래도 그 고음 파트 부르기도 전에 끊고 바로 턴을 시키셨는데 정말 망했어요.”

“괜찮아, 기다려 보자. 그렇다고 다른 학교 시험 기죽지 말고 잘 보고.”


다른 학교 1차 시험은 모두 느낌이 좋았는데 이렇게 찝찝하긴 처음이었다. 합격 못하면 어쩌지? 야심 찬 계획이 무너지는 듯하면서 내심 불안해졌다. 해탈한 채 그저 연습에 매진했다. 남몰래 꿈꿔왔던 플랜이 희미해져 갈 때쯤 1차 시험 결과 날이 다가왔다. 혼자 연습실 구석에 쪼그려 앉아 핸드폰으로 침착하게 수험번호와 이름을 입력하고 조회 버튼을 눌렀다.


이럴 수가. 핸드폰 화면에는 선명한 글씨로 ‘1차 시험에 합격하셨습니다’라는 문구가 적혀있었다. 기회를 한 번 더 얻은 기분이었다. 심장이 미칠 듯 두근거렸지만 침착하게 선생님께 전화를 걸었다.


“쌤 결과 나왔습니다.”

“어떻게 됐어?”

“합격이에요!”


주위 가까운 사람들에게 연락을 돌린 즉시 학교 홈페이지에 들어가 2차 시험을 위한 자료들을 꼼꼼히 살펴보았다. 2차 시험은 내신, 서술시험, 그리고 지정곡 혹은 지정 연기 시험이 있었다.


자유연기나 자유곡의 경우 준비해 간 것을 보여주면 되지만 시험 내용에는 지정 연기와 지정곡이라는 것도 존재했다. 학교마다 연도마다 다르게 지정되는 희곡들과 그 안에 나오는 대사들을 준비해야 했고 그건 1차 시험 후에 공지되기도 한다. 중앙대 같은 경우 1차 시험에 붙으면, 합격자에게는 2차 시험을 위한 지정희곡, 지정곡이 각각 3개씩 주어진다. 나는 뮤지컬 전공으로 시험을 보았기 때문에 2차 시험까지 주어진 7일간에 지정곡 3개를 외워야 했다.


그 지정곡은 학교 입시 관계자가 아니면 미리 알 수 없었던 부분이지만 나는 입시를 준비할 때부터 작년 입시, 재작년 입시, 그 전의 입시 출제 경향을 보며 어떤 곡이 지정곡으로 나올지 미리 추측해보고 있었다. 선생님들과 친구들도 모르게 알아보던 정보였다. 그 정보는 쉽게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으며 검색해서 주르륵 나오는 것도 아니었다. 일단 합격생을 닥치는 대로 검색해서 그 학생이 다녔는 학원 카페에 가입한 뒤 합격생이 올린 후기를 찾아냈고, 지정곡에 대한 힌트가 조금이라도 있을까 하여 유튜브의 합격 영상 댓글을 하나하나 확인하기도 했다.


그렇게 수많은 서치를 통해 알아낸 하나의 패턴이 있었는데, 바로 학교의 어떤 교수님이 연출하거나 그 교수님과 함께 작업한 작곡가가 참여한 작품의 곡이 나온다는 것이었고, 대부분 1년 내의 작품이라는 사실이었다.


그렇게 그 교수님의 최근 경력을 알아보았다. 포털사이트에서 나오는 여러 작품들. 그리고 교수님과 함께 작업한 작곡가의 작품들 또한 찾을 수 있었다. 뮤지컬 노래는 검색해서 바로 나오는 경우가 흔치 않았기에 여러 사이트를 돌아다니며 음원이나 영상을 찾았다. 어떤 작품들이 있는지 차근차근 공부했으며 그중에 여자 솔로 노래를 골라 집중적으로 들었고 여기서 하나는 걸리겠지 생각했다.


그렇게 추측은 딱 맞아떨어졌다. 하나는 예상했던 작품에서 출제되었고 다른 하나는 그 교수님과 함께 작업한 작곡가 분의 곡이었고, 나머지는 유명한 뮤지컬인 ‘레 미제라블’에서 출제되었다. 남들보다 한 발 더 앞선 상황이었다.


그렇게 나는 한글 가사뿐만 아니라 영어 가사로도 달달 외워갔다. 브로드웨이 오리지널 캐스트들이 노래한 영상들을 보며 분위기를 몸에 익혔고 리듬을 익혔다. 한참 바쁠 시즌이라 보컬 선생님께 녹음된 목소리를 휴대폰으로 매일 공유하며 코멘트를 전달받았다. 일단 정확히 외우는 게 시급했다. 어느 정도 외워 갈 때쯤엔 혼자서 동선도 짜 보고 나름의 입시 현장의 느낌도 내보았다. 가장 치열하게 연습한 일주일이었다.


그렇게 순식간에 찾아온 최종 실기시험. 대기실에는 1차를 통과한 나름대로의 실력자들만 모여 있었다. 다들 목을 풀거나 준비한 무용 연습을 하며 집중하고 있었다. 확실히 분위기가 달랐다. 1차 시험 대기실에서는 내가 먼저 목을 풀면 우물쭈물하던 사람들이 그제야 소리를 내기 시작했는데, 이곳은 알아서들 소리 내며 준비하고 있었다.


그리고 지정곡 3개 중 하나가 당일에 공통 지정곡으로 주어졌다. 내가 있는 시간대의 사람들은 지정곡으로 모두 뮤지컬 ‘레 미제라블’의 넘버를 불러야 했다. 목소리는 잘 어울렸지만 그 노래의 음역대를 가성으로 부를 때 완전치 못했기에 살짝 불안했지만 어떤 생각을 하며 부를지 다시 정리해나갔다.


그렇게 시험 장소인 4층으로 호명된 사람들이 올라갔고 그중엔 나도 포함되어 있었다. 2차에 합격된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았기에 서로 견제하는 분위기가 더욱 컸다. 시험장 안은 방음이 잘 되지 않는지라 전 순서 사람들이 어떻게 면접을 보는지 소리로 알 수 있었다. 다들 쟁쟁했다. 간혹 지정곡 하나를 더 시켜보는 경우도 있었다.


그리고 드디어 불린 나의 수험 번호. 내 앞으로 잔뜩 긴장한 표정의 사람이 시험장에서 나왔고 살짝 겁이 났지만 어깨를 펴고 시험장에 당당히 들어갔다.


“안녕하세요, 가번호 OO번입니다!”

“지정곡 불러보세요.”

“네!”


처음 사랑을 느끼게 된 코제트라는 인물이 가진 의문, 설렘, 혼자가 아니라는 확신이 담긴 곡의 상황을 생각했다. 완벽히 익힌 영어 가사로 노래 부르기 시작했다.


그렇게 노래가 끝나고 교수님은 내게 물었다.

“1차 때 뭐 불렀죠?”

“뮤지컬 브루클린의 Once upon a time 불렀습니다!”

교수님이 나를 기억해내길 바라는 동시에 그 끔찍하게 못했던 무용 턴은 기억하지 못하셨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했다. 의연하게 보이기 위해 표정관리를 하고 있을 때, 교수님은 지정곡 중 다른 곡을 해 보라고 지시했다.


그 곡은 연습하는 과정에서 가사가 마음에 깊이 와닿아 부르면서 많이 울었던 곡이었다. 하지만 감정에 치우치기보다는 담담하게 이야기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렇게 노래를 시작했고 노래가 거의 끝날 때쯤 교수님은 노래를 멈추시고는 내게 질문을 던졌다.


“남들이 못하는 자신만의 특별한 특기가 있나요?”

머릿속으로 남들이 못하는 내 특기가 뭔지 빠르게 생각했다. 그리고 생각나는 대로 대답했다.

“어떤 노래를 시켜도 자동으로 나옵니다. 시켜도 빼지 않는 넘치는 자신감이 제 특기입니다!”


주먹까지 꽉 쥐며 당당하게 말하는 나를 보고 교수님들이 깔깔 웃으셨다. 분위기가 환기되며 내 마음도 한결 가벼워진 순간,


“못할 것 같아서 기대는 안 하지만 자신감 넘치게 무용해 봐.”


‘못할 것 같아서’라는 말이 내 마음을 뜨끔 찔렀지만 이 좋은 분위기를 그대로 몰아가야 할 것 같아 매일 열심히 연습한 무용 특기를 선보였다. 다행히 내가 준비한 무용의 특징은 발랄하고 자신감 넘치는 플라멩코 느낌의 무용이었다. 무반주였지만 신나게 웃으며 느낌을 살리려고 노력했다. 인생에서 마지막으로 추는 춤이라 생각하고 혼신을 다했다.


그렇게 준비된 무용 특기 1분이 끝나기 전에 교수님은 끊으시고 이렇게 말씀하셨다.


“숨차겠지만 그 상태에서 나머지 지정곡 하나 불러보세요.”


동작 하나하나에 최선을 다했는지라 정말 숨이 찼다. 하지만 준비한 무용과 비슷한 느낌의 노래였기에 숨이 차서 들뜬 목소리여도 충분히 부를 수 있는 노래였다. 무용 뒤 쉴 틈도 없이 노래를 시키시는 교수님이 가혹하게 느껴지는 동시에 한 번이라도 좋은 기회를 주신 거였기에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이 또한 마지막이라고 생각하고 끝까지 즐겁게 불렀다. 빠른 템포와 리듬의 곡이라 숨이 찼지만 괜찮았다. 이미 입시장의 분위기는 익숙해졌고 편했다. 그렇게 지정곡 3개를 부르고 무용 특기까지 보여드린 뒤 교수님은 나가보라고 지시했다. 교수님은 옆에 계신 교수님들을 보며 고개를 끄덕거리고 계셨다.


“감사합니다!”

교수님들께 꾸벅 인사를 드리고 뒤를 도는 순간,

‘아, 붙었다.’

처음으로 붙었다는 느낌이 확실하게 다가왔고 합격이라는 것을 예감했다. 그렇게 나머지 학교들의 2차 시험들을 기분 좋게 마칠 수 있었고, 이제 최종 결과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미 붙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최종 결과 확인 날, 학교 교실 안에 있는 대형 스크린을 띄워놓고 반 친구들이 보는 앞에서 결과를 확인했다. 이래 놓고 불합격이면 민망했을 테지만, 예상대로 ‘합격’이라는 문구를 볼 수 있었다.


“와아아아아아!”

“박슬기 붙을 줄 알았어!”

“축하해!!!”


합격 창으로 넘어가는 순간 친구들은 환호를 질렀고 교실은 난리가 났다. 몇 명은 나에게 달려들어 격한 포옹을 했다. 예상하고 있었지만 막상 눈으로 보니 감동의 물결이 마음속에 일렁였다. 그토록 간절했던 계획이 이뤄졌기에 가슴이 뜨거워지며 눈물이 나왔다.


그렇게 나의 중앙대학교 연극학과 생활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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