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들 한 번씩은 겪는다던 중2병이 나에게는 조금 희한한 방식으로 찾아왔다. 매일 죽음과 삶, 종교와 신과 우주에 대한 생각에 빠져 살았던 것이었다. 아침에 눈 뜨는 순간부터 자전거를 타고 등교하며, 수업시간에 멍 때리면서, 점심을 먹는 내내 머릿속은 그 생각으로만 차 있었다. 방과 후에는 친구 G와 함께 ‘삼천당’으로 갔다. ‘삼천당’ 이란 당시 거주하던 아파트 단지에 둘러싸인 한 정자를 우리끼리 부르던 말인데 그곳에서 이야기할 때면 늘 주제가 삼천포로 빠졌기에 붙여진 이름이다.
아무튼 우리는 삼천당에서 매일 같이 신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날이 더울 땐 동네 마트에서 아이스크림 바 를 하나씩 사들고 와 혀로 핥아먹으며 신의 존재 여부를 논했고 날이 추울 땐 책가방을 꼭 껴안고는 신이 과연 선한 존재일지 악한 존재일지 토론했다. 시간 가는 줄도 모른 채 의견을 뒷받침할 증거들을 찾아내고 퍼즐을 맞춰갔다.
비단 신에 대한 이야기뿐만이 아니었다. 신을 이야기 하다 보면 어느새 죽음과 사후세계, 그리고 우주에 대한 이야기로 이어졌고 그때부터 우리는 끝없는 상상의 나래를 펼치기 시작했다. 죽어서 어디로 가는지, 우주 밖으로 나가게 되는 건지, 현재 우리가 정말 살아 있는 건지, 죽음이 가짜인 건지, 환생이란 것이 존재하는지 등..
가만히 그 생각들을 하고 있자면 말 그대로 궁금해서 미칠 지경에 이르렀던 시기였다. 이 세상 모든 게 이상해 보이고, 당장 손가락을 움직일 수 있는 내 몸이 신기하고, 살아있다는 게 소름 끼치고... 거의 매일 겪던 의문이었고 그건 아마도 당시 처음으로 죽음을 고민하기 시작하던 나에게 가장 큰 관심거리였다.
그리고 그토록 집착했던 의문들은 점차 머릿속에서 흐릿해지기 시작했다. 어느 순간 생각할 여유가 없어졌던 것 같다. 고등학생이 되면서 당장 해야하는 일들이 있었고 하고 싶은 일도 많아졌기에 그런 의무니 들 새도 없었던 것이다. 가끔 생각이 나긴 했지만 길어봤자 몇십 분이었다. 물론 그 몇십 분 동안에도 그 의문들은 나를 괴롭히며 소름이 돋게 만들었지만 말이다.
그렇게 몇 년이 지나, 죽음이라는 주제는 다시금 내 삶을 건드리기 시작했다. 좋아했던 연예인의 죽음, 좋아했던 선배의 죽음, 바닷속에서 죽어간 이름 모를 많은 친구들의 죽음, 우울과 삶의 공허함, 자살에 대한 욕망이 그 이유들이었다.
나의 가장 친한 친구이자 가장 많은 비밀을 공유한 친구 J는 맨날 죽을 거라고 했다. 삶이 그다지 평탄하지 못했기에 그녀의 감정 기복 또한 평탄치 못했던 것 같다. 그녀에게는 늘 사건이 끊이지 않았다. 그녀 스스로 사건을 만들고 다니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가족 문제부터 시작해 남자 문제, 여자 문제, 수많은 불법적인 일들이 늘 엮였다.
2017년 겨울, 우리는 두 달 정도 방 한 칸에서 같이 살게 되었다. 우린 거의 매일 밤 취할 때까지 술을 마시고 춤을 췄다. 석관동에 있는 한 예술대학 앞에 살았는데 한밤 중에 몰래 들어가 학교 캠퍼스 한복판에서 무아지경으로 춤을 췄다. 그리고 바닥에 드러누워서 별과 달을 봤다. 물병자리가 우리를 데려가 줬으면 좋겠다는 둥, UFO가 지구를 멸망시켜도 괜찮을 것 같다는 둥 실없는 소리를 하며 깔깔 웃었다.
가끔은 쫙 빼입고 이태원이나 홍대에 있는 클럽으로 가 춤을 추며 밤을 보냈다. 주로 여자들만 있는 클럽에 갔다. 처음 보는 여자들과 춤을 추고 눈을 흘기며 포옹하고 키스했다. 그렇게 날이 밝고 아침이 다가오면 우리는 그제야 집으로 들어가 그날 저녁까지 늦잠은 자곤 했다.
날씨가 궂거나 조금 귀찮은 날에는 그 좁은 집에서 춤을 췄다. 깜깜한 밤에 형광등을 다 끄고 친구 애인이 선물해 준 곰돌이 모양의 무드등을 켰다. 다행히 우리 집 아래층에는 사람이 살고 있지 않아 마음껏 뛰놀 수 있었다. 집에서 춤을 출 때는 그 느낌을 서로 공유했다. 그리고 삶과 죽음의 이야기를 했다. 술과 춤만 있으면 웃음과 이야기가 끊임없이 나왔다.
하루는 탈진한 뒤 방바닥에 드러누워 약속 하나를 했다. 이 세상에 더 오래 살아남게 된 사람이 자의든 타의든 먼저 죽게 된 사람의 얼굴을 몸 어딘가에 문신으로 새기자고. 그리고 시체를 불에 태운 뒤 뼈를 곱게 갈아 강에 뿌려주기로. 나는 J가 언제든 죽어 사라질 것만 같아 종종 그 사안을 업데이트했다. 워낙 변덕스러운 친구기에 그나마 가장 최근의 바람을 이뤄주고 싶었다.
아직 J는 죽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가 늘 죽음과 가깝게 있는 것 같아 숨 죽이고 지켜보게 된다. 우리는 무척 다르지만 어느새 서로를 닮아가고 있다. 그녀는 나의 죽음을 몸에 새겨줄 사람이다.
J와 함께 그런 말을 보았다. 소크라테스'변론'의 “죽음을 두려워한다는 것은, 자기가 모르는 것을 아는 체하는 것 아닙니까?”라는 말이었다. 누군가에게는 와닿지 않을 수 있겠지만 우리에게는 무척 긍정적인 느낌으로 다가왔다. 사람들은 자살이나 죽음을 입에 올리는 행위를 금기시하는 편이지만 정작 그들은 한 번도 죽어본 적이 없다. 죽은 자는 말이 없고 그들의 이야기를 들은 이는 아무도 없었으며 설령 있었다고 한들 증명된 사실이 아니다.
죽음과 자살은 어째서 부정적인 것의 대명사가 되었을까. 행복하지 않을 때 생각하게 되는 것들이라서 그런 걸까. 하지만 힘이 들 때 ‘여행’이라는 단어를 생각하지 않나. 죽음과 여행이 다를 바 없어 보이는 이유는 글에 취해 제대로 된 생각을 하고 있지 못하기 때문일까. 다시 돌아온다는 개념이 없다는 점과 목적지를 모르는 점 외에 그다지 다를 게 없다고 생각한다.
어쩌면 ‘죽음’은 모든 것의 해방일지 모른다. 세상을 떠나게 되는 것이니 어쨌든 ‘이 세상’에서는 해방될 수 있는 것 아닐까. 더 이상 주변 관계에 신경을 쓰지 않아도 되고 다음 날 무엇을 하며 시간을 잡아먹을지 고민하지 않아도 된다.
언제든지 죽을 수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는 편이다. 그렇다고 죽음을 간절히 바라는 것은 아니다. 겁도 많고 엄살도 심한 나로서는 신체의 고통이 두렵다. 예부터 전해져 온 끔찍한 사후세계 전설들과 전혀 모르는 세상에 대한 두려움도 있다. 하지만 언젠간 혹은 언제든 죽을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누군가의 습격을 받을 수 있다. 살이 베어나갈 수 있고 혈관이 잘릴 수 있다. 폐에 물이나 유독가스가 차서 죽을 수 있다. 피를 많이 흘려 죽을 수도 있고 높은 곳에서 떨어져 몸이 박살나 죽을 수도 있다.
어쩌면 나 스스로 죽음을 간절히 원하게 될 수도 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현재의 나는 그다지 우울하지 않다. 이건 내게 우울한 토픽이 아니다. 그저 죽음의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고 늘 염두에 두고 있다는 말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여전히 죽음이라는 건 부정적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사실은 죽음을 부정적으로 인식하는 사람들에게 반기를 들고픈 마음에 이런 글을 끄적이는 걸지도 모르겠다.
죽음 뒤의 나와 주변 사람들의 삶을 상상해보고는 한다. 하나의 세상을 잃은 듯 삶이 위태로워질 이들, 그저 충격을 받을 이들, 죽음을 슬퍼할 이들, 어쩌면 아무렇지 않거나 기분이 좋을 이들, 아쉬워할 이들.
죽음 뒤의 일은 아무도 모른다. 끔찍한 지옥이 펼쳐질지, 같은 삶이 반복될지, 행복한 삶의 연속일지. 하지만 현재 주어진 삶을 두고서 떠나기에는 조금 아쉬운 부분이 있다. 일단 여기서 할 일들을 차근차근해 나가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