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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트로브잣나무 Jul 27. 2021

EveryoneDeservesTheChanceToFly

2018-03-10에 작성된 글.

2017년 뉴욕의 크리스마스이브


뉴욕에 가서 가장 하고 싶었던 것 중 하나가 밤마다 재즈바에 가서 뉴요커들과 함께 음악을 듣는 것이었다. 10군데 정도 되는 재즈바를 알아보고 지도에 표시했는데, 문제가 하나 생겼다. 한국과는 다르게 21살 미만에게는 주류 판매가 금지되어있기 때문에 재즈바 또한 출입이 불가능하다는 이야기를 들었던 것이다. 너무도 가고 싶은 마음에 여기저기 포털사이트나 카페에 검색했지만 정확한 정보를 얻을 수 없었다. 그렇게 거의 포기하다시피 갔다가 뉴욕에서 알게 된 현지 분들에게 물어봤더니 술은 마시지 못해도 입장은 가능한 재즈바들이 꽤 있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그래서 그날 저녁 뉴욕 맨해튼에서 재즈바가 제일 많이 밀집되어 있다는 West Villiage로 갔다.


저녁 9시, 어두컴컴한 거리를 다니며 핸드폰으로 지도 앱을 켜고 내가 가고자 마음먹었던 곳들을 찾아갔는데, 이런. 크리스마스 이브라 그런지 여는 곳이 거의 없었다. 닫힌 문들 앞에서 내 조그만 소망이 날아가 버리는 듯했다. 상실감을 실은 추위가 패딩 속을 파고들었고 좌표를 잃어버린 발걸음은 한층 무거워졌다. 그렇게 추위 속에서 거리를 방황하던 중, 어디선가 나지막한 피아노 소리가 들렸다. 어둠 속에서 유일하게 반짝거리는 곳이었다.


저곳이다! 하고 뛰어가 슬쩍 안을 들여다보았다. 모두가 피아노 연주에 맞춰 즐겁게 노래 부르고 있었다. 들어가게 된 피아노 바는 생각보다 좁았고 사람들 사이의 틈을 비집고 들어가야 할 정도로 북적북적했다. 삼각 형태의 공간이었는데 두 모서리는 출입구였고, 나머지 한 모서리에선 피아노 연주자가 신나게 연주하고 있었다. 연주 솜씨가 수준급이었다. 음악은 Whitney Huston의 'I wanna dance with somebody'! 음악에 맞춰 사람들이 함께 노래를 불렀고, 크리스마스 꼬마전구들은 창문 위쪽에서 반짝거리고 있었다. 왠지 한바탕 재미있게 놀 수 있을 것 같았다.


즐거운 크리스마스이브를 보낼 수 있을 것 같아 마음이 괜히 설렜다. 입구 쪽 구석진 바에 혼자 앉아 당당히 술을 시켰다. 무슨 깡이었는지 21살 이상이냐고 묻는 바텐더의 말에 당당히 “of course!”라고 대답했다. 한국에서는 '술기'라고 불리는 내가 이곳에서 술을 한 모금도 하지 않았더니 미칠 지경이었다. 다행히.. ID를 검사하지 않았고 그렇게 맥주를 병나발로 마시며 술과 음악에 취해 떼창 무리에 합류했다.


마시고 노래하던 도중, 사람들이 냅킨에 뭔가를 적어서 연주자에게 건네는 것을 보았다. 아마도 원하는 곡을 요청하는 것 같았다. 갑자기 내 머릿속에 무언가 반짝 떠올랐다. 이미 노래를 함께 부르고 있었지만 무대에 나가서 부르면 더 신날 것 같았고, 그런 나를 상상하면 할수록 몸이 근질거렸다. 노래를 불러도 되냐고 물어볼까? 무슨 노래를 부르지? 만약 신청한 곡을 반주자가 모르면 어쩌지? 민폐 아닌가? 사람들이 좋아할까?? 여러 가지 걱정이 들긴 했지만 무대에 오를 상상만으로도 밀려오는 스릴감을 억제할 수 없었다.


결심한 나는 한 바텐더에게 과감히 말을 건넸다.

“Can I sing there?”


바텐더의 눈이 동그래지는가 싶더니 냅킨에 곡 제목을 써서 피아노 연주자에게 주면 된다고 알려주었다.

‘이렇게 쉽게 무대에 설 수 있는 건가?’

얼떨결에 든 생각. 하지만 기회가 있으면 잡아야지. 그것도 골 때리는 기회를! 나는 펜을 들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막상 곡 제목을 쓰려니, 어떤 곡을 불러야 할지 막막했다. 내가 잘 부를 수 있는 곡들로 구성된 레퍼토리가 있긴 하지만, 일단 영어로 된 곡이어야 관객들이 알 것이고, 그 곡들을 여기 있는 사람들이 좋아할까, 분위기를 망쳐버리는 게 아닐까 하는 여러 가지 생각 때문에 머리가 복잡했다.


갑자기 기막힌 곡이 하나 생각났다. 신나는 재즈곡인 Bette Midler의 ‘Stuff like that there’!. 이 노래면 나도 좋고 듣는 사람들도 즐거워할 것 같았다. 곡 제목을 끄적끄적 쓰고, 연주되던 곡이 하나 마칠 때까지 기다렸다. 그 3분이 얼마나 길던지! 처음 와 본 나라에서, 나에 대한 정보가 전혀 없는 사람들 앞에서 노래를 부른다니 그 묘한 설렘은 잊을 수가 없다. 내가 생각해도 나 스스로 저질러 놓은 일이 웃겼다. 뭔가 만만치 않은 깡을 부린 것 같아 스스로가 기특하기도 했다.


연주가 끝나자마자, ‘제발 이 노래 알았으면···’ 하는 간절한 마음으로 발걸음을 뗐다. 사람들을 가로질러 연주자에게 갔다. 그에게 냅킨을 내밀고 혹시 이 노래 반주해 줄 수 있냐고 물었다.

“No, I can’t. I don’t know this song.”

안타깝게도 모르는 곡이었다. 한순간에 긴장이 풀려버렸다. 하지만 겉으론 전혀 티 내지 않은 채 다른 노래를 써서 다시 오겠다고 했다. 그러자 연주자가 두꺼운 악보를 건네주며 ‘이 안에 네가 부를 수 있는 곡이 있는지 찾아보라’고 했다.


자리로 돌아가 악보를 뒤적여보니 대부분 모르는 곡이었고, 알아도 아주 조금 아는 곡이었다. 하지만 여기서 포기할 수는 없었다. 악보를 덮고, 누구나 알 만한 유명한 곡을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쉽게 떠오르지 않았다. 내가 아는 곡이 이렇게도 없다니!


자괴감이 몰려올 찰나, 좋은 곡이 하나 또 생각났다. 뮤지컬 <Thoroughly Modern Millie>의 ‘Gimme Gimme’! 이건 왠지 알 것 같아서 잽싸게 냅킨에 제목을 쓰고 앞으로 달려 나갔다. 냅킨을 연주자에게 보여주며 이 노래를 연주해 줄 수 있냐고 물었다. 제목을 본 연주자는 또다시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무슨 노래인지는 알지만 악보가 없다는 것이었다. 잠시 품었던 설렘이 다시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역시 끝이 아니었다. 노래 부르고 싶어 안달이 난 내가 측은해 보였는지 연주자가 혹시 디즈니 노래 중 아는 게 있냐고 물었다. 눈이 반짝 뜨였다. 디즈니 노래는 내가 다 알지! 그중 자신 있는 노래인 인어공주의 'Part of your world'를 부르겠다고 했다. 마침 신청곡 대기가 다 끝난 터라 나는 바로 무대에 오르게 되었다.


잠시만, 이렇게 바로 부른다고? 목도 가다듬을 새 없이 오르게 된 무대에 당황과 긴장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피아노 옆에 뻣뻣하게 서 있는 마이크로 쭈뼛쭈뼛 다가갔다. 보고 있지 않아도 사람들이 나를 쳐다보고 있다는 걸 알았다. 어떤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을까 궁금했다. 침착하게 손을 뻗어 마이크를 잡고, 아무렇지 않은 듯 고개를 들어 날 바라보고 있는 눈동자들을 보았다. 호기심 어린 눈빛들이었다. 미소가 지어졌다. 어디서 그런 생각이 나왔는지는 모르겠지만 마이크를 든 이상 난 가수였고, 이곳의 분위기를 좌지우지할 수 있을 거라는 자신감에 사로잡혔다. 심장이 쫄깃쫄깃해졌다. 그런 쫄깃거림 속으로 또 다른 생각 하나가 머리를 쑥 내밀었다.


‘이건 무조건 영상으로 남겨야 해’


사람들의 관심이 쏠려있는 와중에 마침 앞에 앉은 여자 관객에게 휴대폰으로 영상을 촬영해 줄 수 있냐고 물어봤고, 그녀는 흔쾌히 부탁을 들어주었다. 드디어 준비 완료! 나는 잠깐 큰 숨을 쉬고 눈을 감았다. 마음이 차분해지면서 웃음이 나왔다. 그러면서 든 생각.


‘이 사람들 나를 아무도 모르잖아? 인생 뭐 있냐. 이렇게 사는 거지 신박하게!’

어느샌가 반주가 깔리고 있었다. 나를 바라보는 관객들에게 간단한 소개를 했다.

“안녕하세요, 전 한국인 여행객이고, 재밌는 추억 만들고 싶어서 올라왔어요. 즐거운 시간 되기 바랍니다!”


누가 봐도 외국에서 여행 온 사람이 갑자기 올라와서 노래를 부르겠다고 하는 것에 놀랐는지, 객석 여기저기에서 환호 섞인 박수가 터져 나왔다. 아, 그건 내가 신나게 놀 수 있게 만들어주는 기폭제였다. 한층 기가 살아났다.


‘이제 놀자!’


노래를 시작했다. 사람들이 어떤 반응을 보이건 그것은 알 바 아니었다. 나는 내 노래에만 집중하면 된다. 난 지금 바닷속에 사는 인어공주 에리얼이다!


객석의 반응은 생각보다 빨랐다. 첫 소절을 부르자 몇몇 관객들이 환호를 보내왔다. 차분해진 내 의식 속으로 작은 모닥불이 켜지는 기분이 들었다. 몇 소절이 지나자 연주자의 표정과 관객들의 반응이 더 확연히 눈 속으로 빨려 들었다. 그들이 노래에 감성적으로 반응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 노래는 혼자 묻고 답하는 식으로 구성된 곡이었는데, 내가 객석을 향해 묻자 그들이 하나 된 목소리로 대답해주는 재미까지 쫓아왔다.


노래가 끝나자 따듯한 탄성이 객석을 메웠고 무대를 내려와 내 자리에 앉을 때까지 그 탄성이 그치지 않았다. 그렇게 자리에 돌아왔을 때였다.


“Great!”

아까까지 내 옆에 홀로 앉아 계시던 할아버지 한 분이 내게 맥주 하나를 더 시켜주며 또 불러줄 수 있냐고 부탁했다. 탄성을 떠나 한 곡 정도는 더 부르고 싶었는데 관객들이 이만큼 호응해 주니 자신감도 부쩍 커졌다. 이 정도라면 한 곡 더 불러도 민폐가 아닐 것 같았다.


‘다음 곡은 뭘 부르지?’

고민하는 동안, 연주자가 바뀌었다. 바텐더도 바뀌고, 새로운 관객들도 많이 들어왔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새로운 분위기가 만들어졌다. 그 분위기에서는 이상하게도 방금 전과는 다른 묘한 기류 같은 것이 느껴졌다. 좀 더 자유스러워졌다고 할까? 어쩌면 그 분위기는 노래를 마친 내가 느낀 일종의 안도감에서 얻어진 것일지도 모르지만 아무튼 분명한 편안함과 활기 같은 것이 느껴졌다.


그런 느낌 때문일까 문득 떠오른 곡이 있었다. 뮤지컬을 알게 된 이후로 제일 많이 불렀던 곡, 단골 레퍼토리 곡인 위키드의 'Defying gravity'! 정의로운 카리스마가 넘치는 고난도의 곡이다.


바뀐 연주자에게 다가가 곡을 요청했다. 그는 곡 제목을 보자마자 놀라워하며 high belting의 곡을 할 수 있느냐고 물었다. 알고 보니 아까 내가 부른 노래를 들었고, 두 곡의 창법이 꽤 달라서 물어본 것이었다. 난 당당하게 이게 나의 최애 곡이라고 말하며 호탕하게 웃은 뒤 자리로 돌아왔다.


이번 신청은 꽤 시간이 걸렸다. 나 이전에 신청곡이 많았는지 몇 곡 지나도록 내 순서가 오지 않았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긴장이 되거나 조금의 걱정도 되지 않았다. 평소 오디션 같았으면 언제 내 순서가 올지 몰라 긴장에 빠져 있었을 텐데 이때는 희한하게도 아무런 긴장이나 불편이 느껴지지 않았다.


피아노 선율이 거듭될수록 긴장이 풀어지며 바의 좀 더 세밀한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자유로운 공간이었다. 반주자는 자신의 성 정체성을 자연스레 노출시켰으며 그 사실에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음악이 흘러나오면 눈치 보지 않고 부르고 싶은 대로 함께 부르는 사람들. 동성 연인들, 다양한 인종의 사람들, 이 모든 것들은 서로 존중되었다. 다른 모습을 가져도, 얼마든지 공존할 수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때쯤 몇몇 사람들이 다가와 내게 이런저런 물음을 던졌다. 대답을 해주다 보니 어느 결에 대화가 이어지고 있었고 짧은 영어지만 간단한 농담을 주고받으며 이야기를 이어갔다. 처음 와 본 뉴욕의 바, 낯선 곳에서 만난 낯선 이들을 만났지만 그들과 함께 편하게 웃고 떠들 수 이 있는 내 모습이 오히려 신기했다. 무대에서는 흥겨운 음악이 끊임없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낯선 사람들 틈에 있어서인지 이미 무대에 서 있는 기분이 들기도 했다.


내 이름이 또다시 불려졌다. 이번에는 아까와 달리 신나게 올라갔다. 반주자가 내 소개를 재치 있게 해 주고, 방금 전의 노래로 나를 기억하고 있던 사람들과 그렇지 않은 사람 모두 많은 환호를 보내주었다. 그들의 환호가 아까보다 훨씬 큰 불길이 되어 내 가슴속에서 피어오르는 기분이 들었다.


가사를 하나하나 부를 때마다 마음속에 와닿았다. 지금 내가 느끼는 감정, 생각이 노래와 일치했다. 이 노래는 의지를 표하는 단호함으로 시작되어 중반으로 갈수록 고음과 열정이 수반되는 곡이다. 그래서일까 처음 어깨를 고개를 끄덕이며 듣던 관객들이 중반으로 아까와는 다른 환호를 보내며 호응하기 시작했다. 마른 장작이 제대로 타 오듯 감흥이 북받쳤다. ‘그래, 이제 제대로 한 번 놀아보자’ 내 속에서 알 수 없는 똘끼가 펄쩍 뛰어올랐다.


이때부터 나는 슬슬 미쳐가기 시작했다. 내가 생각해도 제어되지 않는 광기 같은 것이 치밀어 올라 미치지 않을 수 없었다. 마음껏 소리 질렀고 마음껏 팔을 휘둘렀다. 그러자 이번에는 객석이 나를 따라 미치기 시작했다. 온통 파도치듯 객석이 환호하며 일어서기 시작했고 반주자 역시 머리를 앞뒤로 흔들어 대며 미친 듯 건반을 두드려댔다. 활활 타는 장작불에 휘발유가 부어지는 순간이었다.


완전히 미쳐버렸다. 솔직히 말하면 그 노래를 어떻게 불렀는지 어떻게 마쳤는지 잘 기억나지 않는다. 기억나는 것이라면 곡의 클라이맥스에서 그 노래의 주인공인 엘파바처럼 하늘을 날고 있는 느낌을 받았다는 것, 희미하게 들어온 시야에서 객석의 사람들도 나를 따라 함께 날아올랐다는 기억이 났다. 내 노래가 끝나자 그들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고 나는 괴성을 지르며 팔을 치켜들었다. 나와 그들의 에너지가 오롯이 하나가 되었음을 느꼈다.


자리에 돌아왔지만 흥분이 가시지 않았다. 바 안이 뜨거운 열기로 가득 차있음을 느꼈다. 마침 옆자리 할아버지와 눈이 마주치자 할아버지가 호쾌한 낯빛으로 오른손을 들어 올렸다. 나도 오른손을 번쩍 들어 올렸다. 하이파이브! 사람들이 내 주위를 지나갈 때마다 진심 어린 응원과 칭찬을 해주고 이름을 물어보았다. 기뻤다. 문득 내가 지금까지 부른 Defying gravity 중 제일 자유롭게 혼신을 다해 불렀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다시 이 곡을 부르게 된다면 그토록 미친 듯이 부를 수 있을까? 고개가 저어졌다.


이제 아무런 한이 없었다. 후련해진 마음을 채우기 위해서였는지 술이 당겼다. 잔을 들어 목을 축이는데, 누군가 냅킨과 팁을 들고 다가오더니 한 곡 더 해줄 수 있느냐고 물었다. 그때부터 본격적인 나의 앵콜 공연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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