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선비 Dec 31. 2019

우리의 첫 번째 마지막 리스본

8. 여행이 끝난 동행을 보내며

2018년 2월~3월, 2018년 4월~5월, 2019년 2월~4월, 2019년 7월 이렇게 네 번에 걸쳐 4개월 남짓 포르투갈의 메인랜드, 마데이라 섬, 9개의 섬으로 이루어진 아조레스 군도에서 때로는 관광객으로 때로는 현지인들의 친구로서 그들의 생활을 여행했다. 나의 여행 기록이 포르투갈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그 애정이 깊어지는 계기가, 포르투갈 여행을 앞두었거나 고민 중인 사람들에게는 용기와 응원이 되었으면 한다.


https://brunch.co.kr/@gagoganda/9
포르투갈의 패러 글라이딩 편에 이어서 씁니다.



오늘은 언니가 요리사


오늘은 이틀간 동행한 언니의 여행 마지막 밤이다. 언니는 포르투갈에서 만난 현지인에게 한식을 대접하고, 우리의 저녁 식사를 직접 만들기로 했다. 그래서 리스본으로 돌아오자마자 분주하게 장을 봤다.


리스본엔 아직 한국 식자재만을 전문으로 취급하는 한인 슈퍼가 없다. 하지만 호시우 광장 인근의 Martim Moniz역 주변에 밀집한 중국인들이 운영하는 슈퍼에 가면 한국 식자재를 살 수 있다. 제일 큰 규모의 슈퍼엔 한국어를 구사하는 점원도 근무한다. 몇 번을 방문하니, 그 직원은 한국 식품을 사면서 한국인 행세를 하는 나를 기억하고서 수줍게 한국말로 먼저 말을 걸어오기도 했다.


한국 식자재를 판매하는 슈퍼의 상품 가격은 우리나라 편의점과 비슷한 수준이거나 조금 비싼 편이라 부담스럽지 않다. 다만 우리가 필요한 품목들을 모두 구입하기 위해 네 군데의 슈퍼를 다 들러야 했다.



숙소에 도착하자마자 잠깐의 쉴 새도 없이, 언니는 음식을 만들기 시작한다.


"생닭 분리하는 거 힘들지 않으세요?"

"어우 보기보다 굉장히 쉬워요, 제가 하면 금방이에요!"

"야채 손질 좀 도와드릴까요?"

"아니에요, 정윤 씨는 쉬어요. 저 진짜 금방 할 수 있어요!"


순식간에 닭볶음탕과 떡볶이가 완성되었다. 아, 쌀밥과 과식을 부르는 맛이다. 한참 동안을 먹고 또 먹으며, 새벽 두 시까지 수다꽃을 피우다 자리를 파했다. 긴 하루였던지라 정신없이 잠에 들었다.


다음날 아침에 일어나 부엌에 가보니 어젯밤의 흔적이 말끔히 치워져 있다. 언니의 특별 미션을 수행할 준비도 되어 있었다. 언니 짐을 챙길 시간도 부족했을 텐데, 이걸 혼자 언제 다 했을까 싶어 미안한 마음으로 인사를 건넸다. 이른 아침부터 쾌활하고 씩씩한 얼굴의 언니는 "우리 이제 시작해볼까요?" 하고 두 팔을 걷어붙였다.


해 본 사람만이 그 노고를 이해하는 김밥 재료 준비


언니의 특별 미션은 바로 안토니오, 디아고를 위한 한식 짓기이다.


안토니오는 내가 지내는 숙소의 호스트로 언니가 장기 렌트한 차를 두고 잠시 다른 나라를 여행할 동안 본인의 건물 실내 주차장을 내어주었다. 언니는 안토니오에게 작은 보답이라도 하고자 했지만, 안토니오는 점잖게 거절했다. 그래도 무엇을 할 수 있을지 고민하다가 한식을 먹어본 적 없다는 그의 말에 간장 닭볶음탕과 김밥을 만들어주기로 했다.


언니가 음식을 포장 용기에 담으며 "따뜻하게 무야 할낀데, 차갑게 묵으면 맛없는데 어쩌노." 하는 말을 듣고 있자니, 저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지글지글 적당히 졸인 간장 닭볶음탕과   크기로 썰은 김밥은 안토니오의 사무실로 배달했다. 바쁜 하루를 마치고 저녁이 되어서야  끼를 먹을  있었던 안토니오를 위해 언니의 말을 떠올리며 음식을 데웠다. 음식을   안토니오는 물개 박수를 쳤다. '언니가  모습을 봤다면 무척 기뻐했겠지.' 하고 언니가 떠난 자리를 느꼈다.



디아고는 언니의 마데이라 여행 에어비앤비의 호스트로, 요리하는 것을 좋아하고 젓가락질도 자연스럽게 할 정도로 아시아의 음식에 관심이 많은 포르투기쉬이다. 디아고의 고민은 한국식 김밥을 만들고 싶은데 인터넷을 찾아봐도 알 수 있는 방법이 없는 것이었다.


언니는 안토니오에게 줄 김밥을 만드는 과정을 촬영해서 영상을 통해 디아고가 김밥을 만드는 방법을 배울 수 있도록 돕고 싶어 했다. 디아고를 위해 한국에서 김밥용 고급 김, 한국에서만 구할 수 있는 식자재들을 준비해왔고 리스본에서 젓가락도 샀다. 나는 영상 촬영을 돕고, 언니표 디아고의 선물을 택배로 부쳐주기로 약속했다.


영상과 택배를 받은 디아고는 김밥을 만들어 언니에게 인증샷을 보냈다. 생전 처음 보는 화려한 플레이팅의 김밥, 언니의 젓가락과 냅킨의 조화로운 날개가 차려진 사진을 보니 디아고의 설렘과 기쁨 그리고 언니의 흐뭇한 마음이 고스란히 전해지는 듯했다.


 



김밥


손이 큰 언니가 재료를 푸짐하게 준비한 덕분에 김밥으로 안토니오의 도시락을 싸고, 우리가 아침으로 먹었는데도 몇 줄이 남았다. 나는 언니의 김밥을 한 줄도 남기고 싶지 않아서 지퍼백에 담았다.


언니의 출국 전 우리의 마지막 일정은 프리포트 아웃렛에서의 쇼핑이었다. 나는 우리가 쇼핑을 하는 동안 김밥을 차에 두면 혹시라도 상할까 싶어 쇼핑을 하는 내내 미련하게 김밥을 들고 다녔다. 평소의 나라면 결코 하지 않았을 행동이다.


모든 시간이 귀중하다지만, 특히나 여행에서의 매 순간은 그 의미가 남다르다. 여행 막바지에 시간을 내어 음식을 하며 나의 컨디션을 살피고, 본인 때문에 잠에서 깰까 봐 조심스레 움직이면서도 나더러는 그저 쉬라고만했던 언니의 모습은 오랜만에 느껴본 깊은 배려였다. 그래서인지 언니의 정성이 담긴 김밥을 허투루 생각할 수 없었다.


시간에 쫓겨 바쁘게 리스본으로 돌아오며, 내가 들고 다녔던 언니가 만든 김밥은 훌륭한 점심 한 끼가 되었다. 우리는 통으로 된 김밥을 우걱우걱 씹어먹으며 즐겁게 수다를 떨었다. 수다 덕분인지, 언니의 손맛 덕분인지 그 날의 김밥은 정말 정말 맛있었다.



여행의 마지막 즈음


언니는 마지막 일정이었던 프리포트 아웃렛에서 쇼핑을 하면서도 끝까지 주변인들을 챙겼다. 친구에게 사진을 찍어 보내서 친구가 마음에 드는 색깔을 고르기를 기다려 구입을 한다거나, 상품을 보고 떠오르는 사람에게 선물을 해도 좋을지 고민을 하며 쇼핑을 했다. 여행의 마지막까지 언니에게 소중한 사람들을 위해 언니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서 가능한 최고의 것을 주고 싶어 했다. 그리고 이 과정은 언니에게 기쁨 그 자체였다.


언니가 여행의 마지막을 보내는 방식이 내게는 신선하게 다가왔다. 언니를 지켜보고 있자니, 자연스레 나의 여행 마지막 즈음을 생각해보게 되었다.


나는 여행을 마칠 즈음이면 이 시간이 끝나감을 직면하고 절절하게 체감하는 것에 집중하기를 좋아한다. 온전히 나만을 위해 게으름 피우고, 욕심부릴 수 있는 시간이 다 지나갔구나 싶어 아쉽다. 좋았던 순간, 아쉬웠던 순간들을 하나씩 곱씹어보고 미래로 가서 이번 여행을 미리 그리워해 보기도 한다. 모든 여행의 종착점인 나의 집으로 돌아가, 편안한 내 침대에 몸을 뉘일 생각에 깊은 안도감도 느낀다.


원래의 자리로 가는 순간 앞에서만 마주할 수 있는 한 데 뒤섞인 이질적인 감정들이, 있는 그대로 참 좋다. 온갖 감정들 속에서 나 이외의 것을 생각할 겨를이 없고, 나 이외의 다른 것을 생각하지 않을 수 있어 오직 나에게만 침잠할 수 있기 때문이다.


포르투갈 여행의 시작과 끝을 늘 함께한 리스본 공항


언니와 동행하기 전의 나에게 여행은 내 삶의 사람들로부터 거리를 두는 나만의 시간이었다. 집으로 돌아가기 직전에서야 일상의 사람들이 떠오르곤 했다. 홀로 하는 여행에서 외로움이 켜켜이 누적되면 내 사람들이 새삼 그리워진다. 항상 그 자리에 있어 때로는 지루하고 버겁기도 한 그 사람들이, 사랑으로만 느껴지게 된다.


여행에서 에너지를 재충전하고, 새로워진 마음을 안고 일상으로 돌아가면 그들에 대한 내 사랑을 표현하고 더 아껴줄 수 있었다. 이 패턴이 몇 번 반복되자 이제는 이렇게 하기 위해서라도 여행에서만큼은 끝까지 나만을 챙겨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언니와의 동행을 통해 언니의 따뜻한 세상으로 초대받으며, 사람들을 위하고 그들과 함께 하고자 하는 언니의 뜨거운 마음을 느꼈다. 나 혼자, 나만을 위한 여행이었건만 여행을 하면서 사람들을 위해 내가 무엇인가를 할 수 있다는 것이 큰 기쁨임을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었다.


도시락을 풀어보며 놀라는 안토니오의 모습, 디아고의 사진 속에서 환하게 웃고 있던 사람들, 디아고의 사진을 받고 부리나케 내게 전해주며 무척이나 신나 하던 언니, 통 김밥을 대충 잡아 뜯어먹으면서도 깔깔거리기를 멈추지 않았던 우리. 언니와의 리스본 여행을 떠올릴 때마다 이 모든 순간들이 겹쳐져서 행복이 덧대어진다.


한국으로 돌아온 후 언니를 만나며 아직도 종종 리스본에서 헤어지던 순간을 이야기하곤 한다. "정윤씨, 한국 가서 계속 볼 거지만 그래도 한 번 안아봅시다." 하고 인사를 나눌 때, 언니를 이렇게나 자주 볼 줄 알았으면 그렇게까지 철철 눈물을 흘렸을까 싶기도 하다. 그 때를 떠올리면 코끝이 찡하다가도 길 한복판에서 언니를 껴안고 세기의 마지막 인사인냥 찔찔거리던 내가 우습기도 하다.


언니와 함께 다시 포르투갈 여행을 하게 될 날이 빨리 왔으면, 오늘도 바래본다.


언니가 나에게 준 모든 물품들은 나, 나와 함께한 사람들에게 따뜻한 도움이 되어주었다.




리스본 Martim Moniz 역 인근

한국 식자재 취급 슈퍼 정보


아래의 네 군데를 다 들르면 웬만한 한국 요리는 다 가능할 것 같다.


1. Amanhecer

 (Mercado Oriental Martim Moniz 지하 1층)

R. Palma 41 A 1o andar, 1100-390 Lisboa, 포르투갈

아시아의 식자재를 살 수 있는 제일 큰 슈퍼이다. 한국산 제품으로는 소불고기 간장/고추장 양념, 돼지불고기 간장/고추장 양념, 초장, 고추장, 쌈장, 고춧가루, 쌀엿, 초장, 컵밥, 라면, 떡볶이용 떡, 젓가락, 김밥용 발, 비비고 제품(밥, 만두, 김치 등이 있었다. 비비고 제품은 아직은 이곳에서만 구입할 수 있는 것 같다.) 등의 상당한 수의 품목을 갖추었다. 딱 하나 아쉬운 것이 김밥용 단무지이다. 구색을 잘 갖춰서인지 같은 품목이라도 이곳의 가격이 제일 비싼 편인 것 같다. 큰 단가 차이는 아니지만, 여러 가지를 구입하면 그 차이가 꽤 될 것이다. 예를 들어 다른 곳이면 1 유로면 구입할 라면이 이곳에서는 1.2유로 정도 한다.


2. Chen

R. Palma 216, 1100-394 Lisboa, 포르투갈

내가 장을 볼 당시에

한국산 단무지를 판매하던 유일한 슈퍼이다.


3. Supermercado Wang

R. Palma 266, 1100-394 Lisboa, 포르투갈


4. Hua Ta Li

R. Fernandes da Fonseca 14, 1100-341 Lisboa, 포르투갈


네 군데 슈퍼의 야채 재고는 때마다 달랐다. 파가 있으면 마늘이 없거나, 마늘이 있으면 파가 없거나 하는 식이다. 그래도 이 슈퍼들이 가까이에 있어서 이동하기 어렵지 않았다.


매거진의 이전글 포르투갈의 패러 글라이딩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