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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젤롯>

이슬람 관점에서 쓴 예수의 이야기

by 나무나비


내가 그를 만난 것은 초등학교 때였다. 달란트 잔치를 한다는 친구의 꼬임에 처음 교회에 발을 들였다. 지금 하는 달란트 잔치와는 다르게 그때는 매주 선생님이 물건을 가져와서 달란트로 사라고 했다. 매주 일요일 새 학용품이 늘어갔고 나는 교회를 다니는 데에 재미를 붙였다. 그러다가 듣게 되었다. 예수님이라는 사람이 있다고 했고(처음에는 성이 무엇인지는 알지 못했다. 그냥 이름이 예수라고 했다. 김예수인지 이예수인지 잘 몰랐는데 예수 그리스도라고 해서 미국식으로 이름이 예수고 성이 그리스도인 줄 알았다.) 그 사람이 십자가에 달려서 죽었다고 했다. 우리는 매주 예수님 이름을 불렀고 댓가로 학용품을 받았다.


중학교 때 이사를 하면서 교회를 안 다니게 되었다. 혼자 아무도 모르는 교회에 가기가 낯설었다.(그런데 놀랍게도 중학교 1,2,3학년 때 내내 같은 반이었던 친구가 교회를 열심히 다니는 친구였다. 한 번 초청 받아서 갔었는데 그 후로는 가지 않았다.) 고등학교 때에야 교회에 다니기 시작했다. 십자가에 달리는 게 생각보다 아픈 것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장발의 구불구불한 머리를 한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서 너무 힘들었겠다는 생각을 하자 마음이 아팠다. 몸만 아픈 것이 아니라 제자들도 다 도망가고 로마 군병들은 놀리고 침 뱉고 그래서 정신적으로도 힘들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즈음에 엄마가 점을 보러 갔다. 엄마는 내가 어렸을 때부터 점을 보러 다녔는데, 내가 언니와 오빠 중에서 가장 점괘가 좋았다고 했다. 점쟁이도 깜짝 놀랄 정도로 내가 대성할 운을 지닌 사람이라고 했다. 그런데 고등학교 때, 엄마가 점을 보러 가자 점쟁이가 "딸이 예수님을 믿는다"라고 하면서 방을 나가 버렸다고 했다. 엄마가 그 이야기를 해 주는데 뭔가 기분이 야릇하면서도, 그 장발이 구불구불한 예수님이 지금 나와 함께 계신가 하는 생각에 감사한 기분이 들었다. 한편으로는 그러면 그 좋은 점괘는 끝났구나 하는 생각에 약간은 아쉬운 기분이 들기도 했다.


대학에 갔고, 선교회에 들어갔다. 매주 예배를 드리는 것에 더해서 선교회에서도 예배를 드리고 소그룹 모임을 했다. 교회 수요 예배까지 나가니 거의 한주 내내 예배를 드리다가 끝이 나는 삶을 살게 되었다. 거기에 소그룹 모임을 하기 위해서는 성경공부를 해야 했는데 그게 또 엄청 많은 시간을 들여서 성경을 연구하는 것이었다. 소그룹 모임 리더는 내게 매일 기도하는 삶을 권했고, 나는 예배에 더해서 학교에 있는 기도실에서 죽치고 앉아 자는지 기도를 하는지 모르는 시간을 보냈다.


그것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방학 때는 일주일 동안 수련회를 가야 했는데 거기서는 그야말로 기도하고 설교를 듣는 생활을 일주일 동안 반복해야 했다. 처음에는 벌벌 떨면서 내가 과연 버텨낼 수 있을까를 고민하면서 들어가서, 집에 올 때는 집에 가기 싫다고 하면서 나왔다. 그곳에서, '내가 죄인 되었을 때,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혔다는 사실'을 마음으로 알았고, 그곳에서, 내 죄가 너무 까맣고 커서 내 스스로는 감당하기 힘들다는 사실도 알았다. 그렇게 나는 그를 만났다. 오랜 시간을 들여, 내 삶에 그가 스며들었다.


졸업하고 나서 바쁜 삶 속에서 예배를 소홀히하기도 하고, 오래 기도 생활을 쉬기도 했다. 그러다가 다시 그가 그리워졌다. 막막하고 괴로울 때, 그는 성경의 구절을 통해 내 손을 잡아 주었고 내게 힘을 주었다. 그리고 최근에는, 다시 한 번 내 죄를 고백하고 그를 주인으로 모시겠다고 했을 때 그는 내게 와서 내 삶에 상관하기 시작했다. 남편과의 관계에 상관했고 아이와의 관계에도 상관했다. 몰랐던 내 모습을 깨닫게 하고 나의 작은 투덜거림과 응석에도 반응했다.


그러다가 문득, 그의 이야기를 쓰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정확히 말하면 그의 이야기가 아니라 그를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였다. 결심도 기도도 했지만 행동에는 옮기지 않고 1년이 지났다. 그러고 나면 잊혀질 줄 알았는데 그는 그 이야기를 또 생각나게 했다. 그 약속을 기다렸던 것처럼. 어차피 내 글이야, 너무나도 보잘 것 없을 것이다. 웹소설 말고 일반 소설은 출간한 적도 없는 나인데, 당연히 엉망일 것이었다. 그래도 그는 원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 이 책 저 책을 뒤지기 시작했다. 이러다 10년 걸리지... 투덜대면서. 책을 사는 것만으로 감당이 되지 않아서 도서관을 뒤졌다.


<젤롯>은 나와는 관점이 다른 책이라는 것을 알았다. 두렵고 무서웠지만 역사적 배경을 알아야 하기에 빌려서 읽기 시작했다. 대중적으로 쓰여진 책이라 그런지 매우 흥미롭게 잘 읽혔다. 하지만 그 책에서는, 나의 주인, 내가 죄인되었을 때 나를 먼저 사랑하신 분, 그리고 이제까지 내 삶을 이끌어오신 그분이 그저 이스라엘의 민족주의자로 그려져 있었다. 내가 판단하기에 안중근보다 못한(이 말을 천주교 신자인 안중근은 인정하지 않겠지만) 사람이었다. 안중근은 그래도 총독을 죽이는 데 성공했지만 그는 빌라도를 죽이지 못했으니까.


<젤롯>의 결론은 이러하다. 예수는 이스라엘의 민족주의자로 로마의 압제에서, 그리고 제사장들의 압제에서 가난하고 고난 받은 민중이 승리하기를 바랐다. 그가 말한 하나님 나라는 바로 이 땅에 이루어지는 나라이다. 하지만 그는 실패했고 십자가에 달려 죽고 말았다. 하지만 그를 오늘날의 '예수 그리스도'로 만든 이가 있었으니 바로 바울이다. 바울은 예수의 사상을 민족을 넘어선 초월적인 사상으로 승화시켰고, 당시에는 예수의 동생인 야고보의 힘이 너무 강했기 때문에 그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러다가 주후 70년, 이스라엘 성전이 로마에 의해 함락되고 나서 예수를 믿는 유대 민족도 죽거나 뿔뿔이 흩어지고 나자, 주로 이방 민족들에게 복음을 전하며 그들과 함께 했던 바울의 메시지가 남아 오늘에 이르렀다.


이 책에 따르면 예수는 아무것도 아니다. 그저 2000년 전에 살았던, 로마와 가진 자들의 손에서 못 가지고 병든 자들을 해방시키고 싶었던 한 사람일 뿐이다. 가난하게 태어나 그런 가르침을 전한 것 자체는 대단한 일이지만 또 그의 가르침이 2000년 동안이나 지속되면서 전 세계의 1/3이 그 가르침에 따를 만큼은 아니다. 이 책에 따르면 나 역시, 이제까지의 삶에서 단단히 속은 셈이다. 유대 민족의 해방에만 관심이 있었던 예수가 내 주인이네 따르네 함께 있네 어쩌네 하는 것은 나 혼자 북 치고 장구 치고 노는 것과 다름이 없다.


나는 허무해졌다. 이 책이 정말이라면, 내 삶은 무엇인가? 나는 왜 이렇게 살아 있나? 교회는 왜 가고 교회 학교 교사는 왜 하는가? 한 편으로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내 삶의 한 축이 우르르 무너지는 것을 보고 싶지 않았다. 마음이 괴로웠지만 기도조차 할 수 없었다. 유대 민족주의자에게 한국에 사는 주부가 왜 기도를 한다는 말인가. 이 책에 따르면, 그는 한국의 존재조차 모를 텐데. 관심도 없을 텐데. 무엇보다 그는 이미 2000년 전에 죽어서 썩어서 완전히 사라져 버렸을 텐데.


습관적으로 성경을 펼쳤다. 매일 읽는 요한복음 한 장을 읽었다. 어제는 날 때부터 눈이 먼 사람을 실로암에서 고치시는 예수의 이야기였고 오늘은 그런 예수의 말씀이 이어지는 부분이었다. 그는 말했다. 내 말을 믿지 않거든, 내가 하는 것을 보고 나를 믿어라. 그러면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꼭 내 지금의 상황을 보고서 하시는 말씀 같았다. 그가 했던 것. 수많은 기적과, 마지막의 부활. 그래, 안중근은 부활하지 않았다. 세상 그 누구도 완전히 죽고 나서 부활하지는 않는다. 묵묵히 생각하다 보니, 문득 내가 그리고 싶은 예수는 누구일까 하는 데에 생각이 미쳤다. 나는 왜 소설을 쓰고 싶어하는가. 내 소설 속의 예수는 어떤 사람인가. 그저 나는 유대의 민족주의자를 쓰려고 이런 준비를 하는 것인가.


그는 이런 말씀도 하셨다. 너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그 말씀을 하기 전에 그는 제자들에게 묻는다.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두 개의 대답은 다르다. 사람들이 그를 무어라고 하는 것과, 제자들이 그를 무어라고 하는 것은 다르다. 그리고 나 역시 그를 무어라고 하는 것이 다르다. 두껍고 세련된 어휘로, 엄청난 배경지식을 통해 그가 어떤 사람인지 규정한들, 그것은 그의 입장일 뿐이다. 그리고 정작 어떤 말을 해도 기적과 부활은 증명할 수없다. 증명할 수 없으니 믿든지 믿지 못하든지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나는 그를 좋아한다. 고불고불한 머리카락과 늘 입고 다니는 치렁치렁한 하얀 옷을 좋아한다. 물론 이런 겉모습은 우리가 아는 그런 모습이 아닐 수도 있다. 나는 그가 점쟁이를 쫓아주고, 내게 때로는 깊은 감동으로 말을 걸면서, 내가 먼저 낮아졌을 때 부드럽게 내게 임재하는 것을 좋아한다. 내 삶에 상관하면서, 남편과 싸우지 말라고 말리기도 하시고, 씩씩거리는 나를 달래기도 하시는 것을 좋아한다. 그리고 나는, 죄인된 나를 그가 구원했음을 믿는다. 그저 저항하다가 붙잡혀서 가장 잔인한 형벌을 받은 것이 아니라 인간들을 위해, 나를 위해 그가 그 끔찍하고 잔인한 길을 선택했음을 믿는다. 그리고 그런 그를 사랑한다.


그에 대한 많은 이야기가 있을 것이다. 그것은 2000년 전에도 그랬다. 나는 또 흔들릴 것이다. 파도를 탄 것처럼 이리저리 휘둘릴 것이다. 그리고 그때마다, 그는 스스로 파도 속으로 걸어갈 것이다. 그리고 그 안에서 휘청대는 나를 끌어올릴 것이다. 겁에 질려 파르르 떠는 나를 보고 그는 말할 것이다. 자애롭고도 다정한 음성으로, 믿음이 없는 자여 왜 의심하였냐고. 나는 또 의심할 건데, 아마도 그럴 때마다 그는 그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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