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chosen 시즌 1 1화 후기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가 지금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지으신 이가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가 지금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지으신 이가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예수님의 생애나 십자가 사건을 다룬 영화는 많이 있으나, 예수님과 그 주변 인물들을 성경에 나오지 않은 부분까지 상상하여 드라마화한 것은 이 작품이 처음이라고 한다. 현대 드라마의 방식과 성경이 만났을 때, 그것이 어떻게 하나의 이야기가 될 수 있는지 the chosen은 보여주는 것 같다. 특히 시즌1의 1화가 나는 매우 인상적이고 충격적이며 감동적이었는데, 그 이야기를 풀어보고자 한다.
귀신들린 릴리는 창고 같은 곳에서 짐승처럼 뒹굴고 있다. 저명한 학자인 바리새인 니고데모가 가도 그녀를 낫게 하지 못한다. 릴리는 정신이 돌아왔을 때, 저에게 온정을 보여주는 남자의 술집에서 술을 마시는 것 외에는 다른 식으로 제 아픔을 다스리지 못한다. 돌아가신 아버지는, 릴리가 두려울 때마다 다음의 성경 구절을 읽으라고 했었다.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가 지금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지으신 이가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이사야 43:1)
귀신 들린 릴리는 성경을 읽지만, 도중에 저를 겁탈했던 로마 군인을 생각하며 흐느낀다. 그녀는 결국 제 목숨을 끝내기로 결정하고 절벽에서 아버지가 주신 성경 구절이 적힌 쪽지를 버린다. 그러나 막 떨어지려는 순간 새 한 마리가 공중을 나는 것을 보고, 그 새를 따라 돌아온다. 그녀는 저에게 안정을 주었던 술집으로 들어와 술을 마시려고 한다. 그런데 그녀의 손을 누군가 막는다.
돌아보니 처음 보는 수염쟁이 남자가 있다. 모르는 사람이다. 그런데 그 사람이, 릴리에게 '그건 네 것이 아니다'라고 말한다. 릴리는 저도 모를 충동에 남자를 거부한다. 그녀는 쫓아오지 말라며 도망치고, 남자는 그녀를 따르며 말한다.
마리아.
릴리는 멈추어 서서 남자를 본다. 내 이름을 어떻게 아냐고. 당황한 릴리에게 남자는 계속 말한다.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가 지금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지으신 이가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드라마는 주인공인 예수를 처음부터 전면에 드러내지 않는다. 대부분의 예수가 주인공인 영화에서는 가장 먼저 등장하는 인물이 예수일 것이다. 그런데 이 드라마는 마지막 5분 전까지 변죽만 울린다. 베드로도, 마태도, 니고데모도 등장하는데 예수만 나오지 않는다. 이제 드라마는 끝나가는데, 예수는 커녕 그 비슷한 인물조차 나오지 않아 시청자들은 초조해진다. 이거, 예수님 나오는 드라마 아니었나? 어리둥절한 찰나 웬 수염쟁이가 자기가 누구라는 소개도 없이 등장한다. 첫 등장은 너무도 평범해서, 그리고 하필 술을 먹으려던 손을 잡고 하는 말이라서 주정뱅이가 '이거 내 술이야' 하는 말로도 들리기도 한다. 그런데 마지막 3분을 남기고 드라마는 이 평범한 수염쟁이를 비범한 신으로 바꾸어 버린다. 바로 그가 '말씀'이 '사람'이 된 인물임을 밝히면서.
릴리, 아니 마리아는 결국 그 남자, 아니 예수에게 항복한다. 너는 내 것이라고, 이제는 종이가 아니라 사람이 되어 나타나 이야기하는 하나님에게 마리아는 안기고, 드라마는 더는 설명 없이 끝나버린다. 1화는 다소 산만하여 중간에 이탈하는 사람들이 많이 발생할 지도 모르지만, 1화 끝까지 본 사람이라면 2화는 보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마지막을 강렬하게 장식한 예수의 활약이 궁금해지기 때문이다.
이 이야기는 진실을 포함하고 있으나 진실은 아니다. 일곱 귀신 들렸던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님께 치유 받았다는 전승이 있기는 하지만 어떻게 어디서 치유받았는지는 모른다. 그녀가 술집에 드나들었는지도, 니고데모가 먼저 치료를 하려고 시도했었는지도 알 수 없다. 아마 이것은 사실이 아닐 것이다. 그럼에도 이 드라마는 진실을 함축하고 있는데 그 이유는 누구나 서게 되는 낭떠러지, 그 주변에서 만나는 예수님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릴 적, 나는 아이들이 때리면 그냥 맞고 오는 아이였다. 엄마는 그런 내가 답답했던지, 아직 여섯 살에 불과한 나에게 소리를 지르면서 막대기로 바닥을 탁탁 내리치고, 계속 이런 식으로 하면 다 벗겨서 내쫓겠다고 엄포를 놓았다. 그러나 그 엄포로 성격이 고쳐지겠는가. 처음 몇 번은 엄마가 시키는 대로 했으나 본래의 성격대로 나는 다시 아무 대응도 하지 못하는 아이가 되었고, 초등학교 2학년 때에 하필 전혀 학급 관리를 하지 않는 담임을 만나 지옥을 경험하게 되었다.
아이들의 집단 괴롭힘은 점점 더 악질적으로 변해갔고, 가방이 숨겨지거나 하는 것은 그저 헤프닝으로 끝날 정도로 나는 지독한 괴롭힘 속에서 스스로를 더 잃어갔다. 그 속에서 나는 더 어린 날의, 엄마가 나를 내쫓겠다는 엄포를 떠올렸다. 이 정도도 스스로 해결하지 못하는 나는 정말로 내쫓겨야 겠구나. 죽어야 겠구나. 나는 내가 자살하면 신문에 나올까를 궁금해하며 학교에 갔고, 절망적인 시간을 보낸 후에 지쳐서 집으로 돌아오곤 했다. 끝나지 않을 1년이 그렇게 흘러갔고 그 이후로 그토록 심한 괴롭힘은 당한 적이 없으나 내 삶에서 그 날들은 인처럼 박혀서 좀처럼 지워지지 않았다. 나는 늘, 이 세상에 부적합한 자였고 없어져야 하는 이였다.
그 삶은 망령처럼 내게 붙어다녀서 나는 자라서도 일상처럼 죽음을 생각했다. 그것은 꼭 버릇 같았다. 무슨 큰 일이 없어도 내가 삶을 사는 것이 버겁게 느껴져서 죽고 싶었다. 나이가 들수록, 너무 많이 오래 살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죽지 못하는 것은 살고 싶어서가 아니라 다만 죽을 용기가 없어서였다. 그런 중에 꾸준히 교회를 나갔다. 그리고 수능 보는 날, 평소처럼 큐티집에서 성경을 읽다가 신기한 체험을 했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시편 23편 4절 상반)
지금도 나는 이 구절을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기억하고 있는데, 그 이유는 그때에 이 성경 구절이 내게 도장을 찍듯이 박혀버렸기 때문이었다. 동시에 나는 거짓말 같은 '편안함'을 느꼈다. 수능 날이니 평소보다 더 떨리기 마련인데 마음이 너무나 차분했고 어떻게든 되겠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날 나는 시험을 그 동안의 시험과는 비교도 되지 않게 최고로 잘 치렀다.
그후로도 순간순간 괴로울 때는 많이 있었다. 결혼을 하고 나서도 나는 자주 죽음을 생각하곤 했다. 어느 순간 그것이 죄라는 것을 깨닫고 고쳐달라고 기도하였다. 그렇게 지내다가 알았다. 수능 날에, 그 중요한 날에 그 성경 구절을 내게 주신 것은 나 수능 잘 보라고 하신 것만은 아니었음을. 중요한 날이니 기억할 수밖에 없을 것이고, 그러니 평생 너는 이 구절을 기억하면서 나와 함께 하라는 뜻이었음을. 죽고 싶어하는 내게 그분은 그렇게 살아갈 이유를 주셨다.
마리아를 안아주신 예수님처럼, 내게도 귀신 들린 과거가 있었고 괴로움에 몸부림치던 날들이 있었다. 하지만 그것을 모두 아시는 예수님이 나에게 다가오셨다. 내가 너와 항상 함께 있다는 말씀을 들려 주시면서. 이 드라마를 보면서 나는 그 예수님을 기억했다. 나의 낭떠러지로 오신 예수님,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함께 걸어주신 예수님, 그리고 지금도 함께 계시는 예수님. 아직 나의 상처를 기억하면 아프지만, 결국은 나는 나을 것임을 안다. 그것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예수님의 또다른 말씀을 믿기 때문이다.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란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요한복음 16:33 일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