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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NS에서는 왜 그렇게 예민할까?

스마트폰 속 작은 사회 SNS에는 깊은 짜증과 피로를 몰고 오는 ‘프로 불편러’들이 존재한다. 그들은 ‘일침 댓글’을 날리며 열심히 뭔가를 지적하고, 일침(처럼 보이는 것)을 날린다.


이런 프로 불편러를 보고 싶다면 웃긴 게시글 사이를 떠돌아 보면 된다. 사진과 같은 상황을 금세 마주할 수 있을 것이다. 아래는 일침 글에 일침 댓글이 달린 상황이다.





이런 SNS 속 불편러들의 존재는 조직의 소셜미디어 커뮤니케이션을 어렵게 만든다. 대표적으로 통계청의 UBD(엄복동) 사건이 있다.


깡 뮤직비디오 영상에 남긴 통계청 댓글(출처: 유튜브)

2020년 5월, 통계청이 가수 비의 '깡'(GANG) 뮤직비디오 영상에 남긴 비하 댓글에 대해 공개적으로 사과하는 사건이 있었다. 앞서 통계청은 공공기관으로서 부적절한 댓글을 남겼다는 비판을 받았다. '깡' 뮤비에 당일 오전 10시 기준 조회 수를 적은 후 "39.831 UBD"라고 부연 설명한 것이 발단이었다.


'UBD'는 비가 출연한 영화 '자전차 왕 엄복동'의 관객 수인 17만 2,212명에 빗대어 만들어진 신조어다. 'UBD'는 '엄복동'의 영문 이니셜로 1UBD는 17만을 뜻한다.


네티즌들은 한때 해당 용어를 관객 수를 세는, 즉 '놀리는' 단위로 사용했다. 다만 공공기관인 통계청이 'UBD'를 언급한 것에 대해 무례하다는 지적이 이어진 것이다.

통계청 유튜브 공식 사과글(출처: 유튜브)

통계청은 우선 ‘불편함’을 느꼈다고 ‘주장’하는 대중에게 용서를 구했다. 그들은 "국민들과 스스럼없이 소통하고자 비 뮤비에 댓글을 쓰면서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지 못했다. 사과의 말씀드린다"라고 전했다.


이어 비하 논란에 대해 해명했다. "높은 영상 조회수를 UBD로 언급한 점 반성하고 있다"며 "부정적 의도로 언급한 것은 아니지만 심려 끼쳐드린 점 죄송하다"라고 말했다.


물론 놀림을 받는 당사자나 관계자가 지적을 한 것은 아니었다. 익명의 몇 명인지 모를 네티즌이 ‘공공기관은 조롱의 의미가 담긴 표현을 사용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어떤 기관도 누군가를 기분 나쁘게 할 권리가 없기 때문이다’라는 반박 불가의 명제를 들고 왔을 뿐이다.



사실 통계청이 사과를 올렸던 당시, 필자는 조금(사실 많이) 의아했다. 나는 되고, 너는 안 된다는 잣대의 기준은 무엇인가?


기업이 트렌드를 쫓아가면 진중해야 한다고 충고하고, 따라가지 않으면 노잼이다.


어쨌든 불만의 댓글을 남겼던 누군가는 통계청의 사과로 통제감을 느꼈을 것이고, 어쩌면 사과가 오히려 불만을 공고히 한 것 같기도 하다.


소수의 악플처럼 보였던 것이 수많은 ‘좋아요’와 기업의 사과로 실제 도덕적 기준이 되어버리는 경우도 많다. 몇 년 전부터 윤리의식이 이상하게 뻗어나간다는 느낌을 받았다면, 인터넷이 그 근원이다.


생각해보면 SNS 댓글은 나만 보는, 자신만의 일기장이 아니다. 자신이 쓴 댓글을 누군가 볼 것이라는 것을 뻔히 알고, 알아주기를 바라는 의도적인 사회적 행동이다.


그렇다면 이 불편러들도 분명 어떤 의도 혹은 동기에 의해 그런 글을 쓸 것이다. 필자는 자아효능감과 통제감의 관점에서 그 실마리를 찾아 나섰다.


자기 효능감은 흔히 자존감이라고 불리는 자기 존중감과 비슷하다. 일을 해도 완성되는 게 없고, 내가 움직여도 삶이 함께 움직여주지 않고, 늘 기대 밖의 상황만 벌어질 때, 우리는 자존감(자기 존중감)이 떨어진다고 느낀다. 글을 아무리 수정해도 노잼인 지금처럼 말이다.


실제로 정신과에서 자존감(자기 존중감) 측정을 할 때 쓰는 설문에는 ‘내가 내 주변에서 벌어지는 상황에 영향력이 있는 인물인지’, ‘그 상황을 통제할 수 있다고 느끼는지’ 등을 포함한다.


우리 주변의 상황을 통제하고 일을 잘 해결해냈을 때 우리는 자기 존중감이 높아진다고 할 수 있다. 자기 효능감의 정의는 복잡하게 있는데(자신이 어떤 목표를 성취하기 위해 필요한 과정을 조직하고 실행해 원하는 결과를 얻어낼 수 있다는, 자신에 대한 기대 또는 신념) 그냥 자존감이랑 비슷한 녀석이라 알아두면 된다.


결론은 ‘우리 정신건강의 근간은 영향력과 통제력, 즉 자기 효능감과 통제력이다’


자기 효능감은 오늘날의 커뮤니케이션 환경을 설명하는 데에 중요한 단서가 된다. 특히 자기 효능감은 소셜미디어 연구에서 관심의 대상이다. 사람들이 소셜미디어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이유를 설명하는 가장 중요한 변수로 자기 효능감이 등장(최은정, 2012;이수범과 김 동우, 2011)한다.


생각해보면 나 혼자 보자고 SNS를 쓰는 경우는 많지 않다. 게시글 작성, 댓글 달기 등은 모두 리액션을 바라는, 즉 영향력이 있길 바라는 액션들이다.


이는 ‘내가 구독함으로써 내가 좋아하는 이 유튜버는 곧 골드 버튼을 받을 수 있게 돼’라는 구체적이고 의식적인 동기로 나타날 수도 있지만 대부분은 무의식적이다.


좋아요 버튼을 누르면 버튼 색이 새파랗게 바뀌는데, 이러한 상호작용 역시 ‘기대한 만큼 반응하는 느낌’을 선사하는 장치다. 오늘날 반응형 UI/UX가 뜨는 것은 비단 예쁘기 때문만은 아니다. 영향력과 통제력에 목마른 이들에게 주는 임시처방으로 볼 수도 있겠다.



이제 프로 불편러 이야기로 돌아와 보자.


가상의 은둔형 외톨이 A 씨는 평소에 잘못된 상사의 지시에는 아무 말 못 하는 성격이다. 그리고 가끔 의견을 내지만 동료들은 별 피드백이 없다. 하지만 SNS에서는 유명 인플루언서의 게시글에 사소한 도덕적 문제를 지적하며 상황을 휘어잡을 수 있다.  


그리고 그의 의견에 ‘아 그래’하고 넘어가는 사람은 안 보이고 오직 좋아요와 하트 숫자만이 공개된다. 잘하는 과목만 계속 공부하고 싶은 마음처럼, 영향을 더 많이 끼칠 수 있는 환경, 더 통제 가능한 환경에 점차 빠져든다.


일상과 거리는 점차 멀어지고 SNS에서는 기업이나 인플루언서 등에게 감 놔라 배 놔라 하는 게 자연스러워진다. 그리고 사람들은 반응한다. 이렇게 얻어낸 통제감은 심리적 보상이 되어 프로 불편러를 만들어내지 않을까- 생각한다.


집중해야 하는 점은, 이러한 댓글을 다는 문화가 소수에 의해 일어난다는 점이다.


와튼스쿨의 불만 고객 연구 보고서에 따르면 94%의 고객들이 불만을 느껴도 불만을 표출하지 않는다고 한다. 하지만 그 6%가 적는 ‘심판의 댓글’은 아래와 같은 과정을 통해 세상을 병들게 한다.


1) 효능감과 통제감을 얻으려는 소수가 ‘심판의 댓글’을 작성한다.


2) 지나가던 이들이 이 댓글에 공감, 좋아요, 리플라이 등의 반응을 보이며 이를 게시물 최상단에 올려놓게 된다. 게시물을 지나친 이들이 1만 명이라도, 불편러의 댓글에 백여 명이 좋아요를 누르면 그것은 마치 여론이 된 것처럼 모든 이들의 스마트폰 상단에 제시된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게시물 내에서는 모두가 동의하고 당연시 여기는 '것처럼 보이는' 의견이 탄생하게 된다. 동시에 불편을 느끼지 않던, 지나가던 사람도 괜히 불편해야 할 것 같은 생각을 들게 만든다.


3) 이 가상의 여론이 조직의 커뮤니케이션 위기를 야기하거나 위기가 아님에도 조직이 많은 자원을 투입해 관리하도록 만든다.


4) 이러한 과정이 대중에게 비치며 대중은 하나의 댓글이 기업의 큰 반응을 일으킬 수 있음을 학습한다. 게다가 누군가는 '아, 이런 것도 누군가에게 불편할 수 있구나'라며 평소에는 느끼지 못했던 불편 요소를 학습한다.


5) 이러한 잣대는 다른 조직에게도 작용하여 예측이 불가능한 불편 요소가 확장된다.



이 일련의 과정은 큰 문제가 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허상인 경우도 더러 있다. 이러한 댓글의 특징은


첫째, 그들이 제시하는 도덕적 기준이 일상의 도덕적 기준보다 지나치게 높은 이상적인 기준이라는 것이며,


둘째, '이상적인 도덕적 기준'은 결코 틀린 내용을 담고 있지 않아 '그걸 어떻게 다 지키고 사냐'는 식의 편리성을 근거로 쉽게 반박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이제는 프로 불편러를 벗어나려는 움직임으로서 ‘화이트 불편러’라는 말까지 생겨났다. 사회 부조리에 맞서 당당히 자신의 주장을 펼치는 사람이라고 하는데, 프로 불편러들 역시 자신이 꼬집은 것들이 정당한 ‘사회 부조리’라고 생각할 것이기에 의미 있는 구분 같지는 않다.


이렇게 올바름을 위시한 의견 제시는 사실상 개선이 아니라 분노 자체가 목적이다. 문제는 이 인터넷상의 도덕적 기준이 실제 세상으로 내려와 말도 안 되는 세상을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과정을 도덕의 버블, 즉 Moral Bubble이라 부르고 싶다.


곧 꺼질지도 모르는 거품을 굳게 만드는 건 뭘까? 기업의 사과인가, 우리의 좋아요와 댓글인가.

ps. 나는 결코 기업의 SNS를 관리하는 부서에서 일하지 않을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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