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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틀콜드 Dec 11. 2023

아버지의 일기장을 보았다

아버지 몰래. 그리고 몇 가지를 깨달았다.

이 글은 아버지와 관계가 소원한 분에게 아버지라는 사람을 다시 한번 생각하게 도움을 줄 수 있습니다.



1.

아버지의 일기장을 봤다. 그저께의 일이다. 아버지 생신 차 아내와 함께 방문한 안성의 부모님 집.


2.

금요일에 퇴근하고 부모님과 함께 외식을 했다. 이후 집에서 간단히 2차를 했다. 2차 후에 나와 아내는 아버지가 내준 안방으로 자러 들어갔다.


3.

피곤함에 먼저 잠든 아내. 나도 자려고 했지만 잠이 쉽게 오지 않았다. 이리 뒤척이고 저리 뒤척여도 잠이 오지 않았다. '그것'을 보고 자라는 하늘의 계시였던 걸까.


4.

결국 나는 부모님 방의 이곳저곳을 살펴보았다. 어릴 적 나와 내 동생이 부모님께 올린 반성문이 서랍장 위 유리 사이에 껴져 있었다. 반성문을 시작으로 보이는 부모님의 연애 시절 액자. 아버지 취향의 소품. 아버지가 요즘 다니는 요리책. 그리고 그 옆에 있었다. "요리 레시피"라고 적혀진 서류철 같은 요리책 옆에 놓여, 겉에 아무것도 적히지 않은 검은 다이어리가.


아버지의 일기장이 있던 그 자리


5.

1991년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시작. 내가 태어난 날. 그리고 최근 22년의 내용까지. 다이어리에는 많은 세월이 몇 안 되는 페이지에 담겨 있었다.


6.

그 페이지에는 여러 내용이 쓰여있었다.


누군가의 아버지로서 어떤 부모가 될 것인지 관한 이야기.


부모가 되기 전 수입이 적어 고뇌한 한 남자의 이야기.


자식이 태어난 날의 이야기.


지난날에 대해 후회하는 한 젊은이의 이야기.


자신의 아내에게 미안함과 고마움을 표하는 글.


힘든 직장에서 버텨야 했던 한 가장의 이야기.


그리고 최근에 쓴 예순 전, 50살까지의 인생을 돌아보며 쓴 이야기까지.


7.

내용을 보니 크게 3개로 이루어져 있었다. 나의 이야기. 젊은 날 아버지의 이야기. 최근 자신을 돌아본 이야기 등.


8.

아버지의 일기장 속 3개 영역에서 느낀 점은 다음과 같다.


나에 관해 쓴 이야기에서는 나에 관한 무한한 사랑. 관심이 있었다는 것. 아니 지금도 있다는 것을 느꼈다. 당신이 표현하지 않아도, 표현은커녕 투박한 말투로 내게 말을 해도 나를 사랑한다는 점을 느꼈다.


젊은 날 자신에 관해 쓴 이야기에서는-  당신이 나약한 사람이었다는 것을 알았다. 아버지. 그는 20대까지 내게 한없이 크고 넓은 센 아버지였다. 그러면서 최근 내 나이 30을 넘어 느꼈다. 당신이 작고 나약한.. 존재임을 말이다.  (헬스 많이 하시기에 덩치가 왜소하시진 않다)


일기장을 보며 알게 된 아버지는 '원래 나약한 사람'이었다. 나와 다를 것 없었다. 오지 않은 미래를 두려워하고 불안에 떠는 30대의 아버지가 쓴 일기 내용은 30대 현재 내 모습과 같았다. 신기했다.


가끔. 아버지가 내게 "너는 정신력이 왜 이렇게 약하냐"라며 잔소리했던 적이 있다. 맞다. 그도 별반 다를 게 없었다.


이제 최근 예순을 넘어 50대의 자신을 돌아보며 쓴 이야기에서는 당신이 참 외로운 사람이라는 것. 내가 필요하다는 것을 절실히 느꼈다. 지금 이 부분을 쓰며 그가 쓴 내용을 생각하니 눈물이 나오려고 한다. 그는 실제, 자신의 50인생을 일기장에 다음처럼 썼다.


60 외로운 男子 아버지. 고장 나고 다치고 고치고 통증에 팔 다리가 휘청대어 누워있다. 죄책감? (중략) 내게는 아내가 있다. 사랑스러운. 내 편을 들어주는 사람. 유일한.. 50人生은 병과 치료 그리고 투쟁이었다.


본 글의 주제 전달에 도움이 될 것 같아, 아버지 몰래 일기장 내용을 공유합니다. 이때 수술을 하신 관계로 글씨체가..ㅎ


"얘는 나한테 3개월 넘었다", "(내게) 전화한지 3개월이 넘었더라. 언젠가 통화기록을 보는데 나오더라" 이 글을 쓰며 당신이 어제 터미널에서 아내와 어머니가 있는 앞에서 내게 한 말이 기억났다.


내 아버지 김상철. 그는 아직 우리 앞에서 강한 모습을 보인다. 당신의 투박함을 닮은 검은색 일기장의 내용은 당신이 쓴 것 같지 않아 보인다. 아버지는 강해야 하니까 그런 것일 테다. 한 가장으로서 남편으로서 강해야 우리를 지킬 수 있으니까.


나는 앞으로 그에게 자주 전화하고자 한다. 일주일에 한 번은 꼭.


9.

마지막으로, 여러 글 사이에 내 동생이 학생일 때 쓴 것처럼 보이는 글이 있었다. 글은 쨍한 파란색의 포스트잇에 쓰여 있었다. "시작"이라는 내용이었다.



당신은 저 시작이라는 포스트잇을 왜 붙여놓은 것일까? 생각하건대 두려움과 불안, 슬픔 사이. 그래도 "얼마든지 다시 시작할 수 있다"라는 '희망'을 갖고 싶어서 그랬을 것이다. 왜? 당신의 아들인 내가 저렇게 희망을 갖고 살고 있으니 말이다..


10.

아, 조만간 기회를 잡아 아버지께 말씀드리고 싶은 게 있다. 당신이 "밝게, 희망적인 사고방식을 갖게 하고 싶다"던 "환경에 의해 자신의 이상을 좌절되지 않게 해주고 싶다"라고 하던 그 아이는 그렇게 자랐다고. 아버지 날 '잘 키워주셔서 감사하다'라고, '부모님 두 분 모두 고생하셨다'라고 말이다.




ㅡㅡㅡ

어떠셨나요? 제 글이 아버지와 관계가 소원한 저와 비슷한 누군가에게 관계 회복에 많은 도움이 되길 바라봅니다. 혹여 저처럼 아버지, 또는 어머니의 일기장을 보신 분이 있다면 댓글을 남겨주세요. 함께 무언가를 공감할 수 있으면 좋겠네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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