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설이 내린 날, 경복궁 설경을 실컷 보았다. 날도 춥고 젖은 발은 얼어서 따뜻한 실내가 그리웠다. 점심시간도 다 되어 배도 고팠다. 서촌에서 주꾸미볶음을 맛있게 먹은 기억이 있어 그곳을 찾아갔다. 경복궁을 나설 때는 날이 개어 인왕산이 선명하게 보였다. 점심 후에 인왕산에 갈 계획을 세웠다. 다행히 식당은 금방 찾았고 매콤하고 쫄깃한 주꾸미와 푸짐한 계란찜으로 입이 즐거웠다. 식사 내내 창 밖으로 함박눈이 내려 분위기도 좋았다.
배부르게 식사를 마치고 나오니 개었던 하늘이 어느새 잿빛으로 변해버렸고 인왕산은 운무에 가려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피곤도 몰려와 인왕산 풍경은 포기하고 집에 가기로 했다. 그사이 친한 교회자매가 경복궁 나들이 소식을 듣고 고맙게도 스타벅스 쿠폰을 보냈다. 사랑이 담긴 커피에 마음도 따스하다.
집으로 가는 길에 경동시장에 들러 김장에 필요한 재료를 구입해야 했다. 시장에 가는 김에 소문만 듣고 가보지 못한 경동시장 스타벅스를 가기로 했다. 이곳은 스타벅스 '경동 1960점'으로 1960년대에 지어진 후 방치되었던 경동극장을 개조해 스타벅스 카페로 탈바꿈한 곳으로 젊은 세대들뿐 아니라 중년들이 많이 찾는 명소가 되었다.
제기동 전철역에 내려 한참을 걸어야 했다. 경동시장이 넓어서 찾기가 쉽지 않았다. 더구나 카페가 시장 한복판에 위치해서 나 같은 길치는 혼자 가기는 어려울 것이다. 다행히 아내가 한 번 가본 곳이라 맘 편히 따라갔다. 카페 로고가 새겨진 입구에 들어섰지만 카페가 있을 것 같지 않은 분위기다.
카페 출입구에 들어서는 데 지나간 시절의 브랜드 금성전파사가 자리했다. LG 전자의 복합문화공간이다. 이곳은 다채로운 LG전자의 신제품을 경험할 수 있을 뿐 아니라 방문객이 직접 다양한 체험을 할 수 있는 공간이다. 간단히 회원 가입만 하면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다. 그중 팔찌 만들기는 해보고 싶은 활동이었다.
카페 문을 열고 들어서자 음악소리가 울려 퍼진다. 영화관 출입구라 좁은 복도를 지나야 했고 비로소 널찍한 카페가 보였다. 확 트인 공간이 신선하게 다가왔다. 영화관 관람석을 개조해 좌석을 마련해서 경사진 계단식으로 좌석이 구비되었다. 편안한 소파와 의자를 적절히 배치해 아늑해 보인다. 놀랍게도 그 넓은 공간에 사람들이 다 들어차 자리가 없을 정도로 빼곡했다. 규모로는 우리나라뿐 아니라 전 세계에서도 가장 넓은 좌석이 아닐까 궁금했다.
카페의 고객층을 보니 연령층이 다양했다. 젊은 커플들도 많이 보이고 중년여성들과 나이 든 남성들도 많았다. 친구들과 가족들도 보였다. 그만큼 이 장소가 많이 알려져 있고 사랑받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많은 이들로 북적였지만 공간이 넓어서인지 듣기 싫은 소음은 아니었고 일반 카페보다는 덜 시끄러운 분위기다.
인테리어는 특별하지 않은 게 오히려 특별하게 보였다. 영화관 느낌을 그대로 살렸고 심지어 낡은 벽도 그대로다. 천정도 유행 따라 철골과 서까래를 그대로 드러내어 거칠고 낡은 느낌을 살렸다. 매장은 여느 스타벅스와 같다. 레트로 감성을 제대로 살린 곳이다. 매장 천정에 종이공예로 설치한 조형물이 유일하게 눈에 띄는 장식이다.
벽면에 글자들이 영상으로 송출 중이어서 직원에게 물어보니 주문한 고객의 닉네임이었다. 닉네임이 없는 이들은 주문번호가 영상으로 뜬다. 재미있는 아이디어가 분명하지만 여기서 좀 더 나아가면 고객들의 의미를 담은 메시지나 감성을 울리는 시를 올려 주어도 좋을 것 같았다.
우리 부부도 뱅쇼와 카페라테를 주문해서 느긋하게 차를 즐겼다. 물론 나는 여기저기 사진에 담느라 분주했다. 낡은 건물 그대로라 누추할 것 같아도 안락한 의자에 앉아 즐기는 커피와 음료로 오히려 안온한 느낌이다. 충분히 여유롭고 편안한 공간을 만들어 놓았다.
버려지고 방치된 공간을 많은 이들이 즐겨 찾는 활기차고 멋진 공간으로 탄생시킨 이들의 창의력이 참으로 놀랍다. 평일 오후인데도 이 정도로 붐빈다는 것은 주말에는 자리가 없을 게 분명하다. 하루 매출액도 엄청날 것 같다. 깨어있는 사고의 혁신 현장이 바로 이곳이다. 이렇게 아이디어를 내고 실행에 옮긴 이들에게 찬사를 보내고 싶다. 비단 카페 영업만이 아니고 재래시장인 경동시장도 젊은이들이 찾는 곳이 되어 시장 상권에도 큰 기여가 될 것으로 보인다.
일본에 가보면 별 것 아닌 것들로 관광상품을 개발하여 사람들을 끄는 것을 많이 본다. 우리는 많은 자원이 있음에도 활용을 못하는 형편이고 무엇 하나가 알려지고 잘 되면 천편일률적으로 다 따라 해서 그 가치와 관심을 떨어뜨린다. 창의성과 아이디어가 사회 전반에 필요하다. 우리는 개성을 튀는 것으로 회피하는 문화다. 그런 시대는 지났다. 독특한 자신을 적극적으로 발현할 수 있는 사회가 되어야 창의성도 살아난다. 튀는 사람들이 환영받는 사회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