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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석진 Dec 02. 2024

눈 덮인 불암산 속으로

폭설 속으로 산행

눈으로 겨울 산의 정취가 가득한 산행은 신선했고 즐거웠다.

폭설로 푹푹 발이 빠질 것 같았지만 아니었다. 부지런한 이들이 많이 지나다녀 길은 뚜렷했다. 눈이 사라지고 맨 땅이 드러난 길에 솔잎이 깔렸다. 한 사람은 미약하지만 여러 사람의 힘은 대단하다. 그래서 '나 한 사람인데 어때?' 하는 생각은 위험한 것이다.

화랑대 근처에서 출발한 산길 사방에는 눈이 지천이었다.

길에 남은 눈은 얼어서 발자국을 뗄 때마다 이젠을 착용한 탓에 얼음 부서지는 소리가 크게 울린다. 쿡쿡 밟히는 촉감에 개구쟁이처럼 신이 난다. 일부러 힘을 주고 요란하게 걷는다. 기온이 떨어졌다고 중무장을 한 까닭인지 추위는 달아나고 기분이 아주 상쾌다. 산행 출발이 좋다.

오늘은 합창단 동료 명과 함께 셋이 호젓하게 가는 등반이다. 두 분은 윗 연배로 나와는 다른 사회경험을 한 분들이다. 외 건축현장을 누빈 이력과 전주 공장에서 겪었던 많은 이야기들 이어진다. 내가 경험해 보지 못한 색다른 직장 이야기들이 흥미롭다. 직접 겪지 않아도 듣는 것만으로도 삶의 경륜을 배울 수 있다. 모두가 나의 스승이라는 말은 허언이 아니다. 겸손은 배움의 열쇠다. 한 직장에만 머물러 대부분 서울에서 직장생활을 해온 나와 해외 체류와 지방 근무로 결이 다른 삶의 행로가 어쩐지 부럽다. 사람이란 의례  남의 떡이 커 보이는 탓일 게다.

눈이 내린 지 며칠이 지나 눈이 상당 부분 녹았지만 많은 폭설이 내린 후라 여전히 눈의 위세가 당당하다. 나뭇가지 위에도 여태 많은 눈이 쌓여있다. 멀리 보이는 봉우리도 흰 눈으로 옷을 입어 눈 내린 산의 자취가 선명하다. 눈 무게로 인하여 힘겹게 소나무 가지가 늘어졌다. 심지어 가지가 심하게 부러진 소나무도 많다. 우리가 시야에는 보기 좋고 아름다운 눈이 나무에게는 견디고 이겨내야 하는 힘든 짐이요 고난인 것이다. 항상 모든 것이 다 좋을 수만은 없다.

산으로 오르는 길이 지속된다. 이야기 삼매경에 빠져 힘든 줄도 모르고 산을 오른다. 계속 오르다 보면 발걸음도 무거워지고 행동도 느려진다. 호흡도 가팔라지며 몸에는 열기가 오른다. 추위를 피해 입은 방한복이 이제는 거추장스럽다. 땀구멍이 열려 후덥지근한 기운이 온몸을 감싼다. 이제는 두꺼운 옷을 벗어야 할 때다. 적당히 큰 배낭은 겨울 산행에 유리하다. 언제든 외투를 벗어 가방에 넣을 수 있기 때문이다. 간편해진 복장으로 배어 나온 땀이 말라 몸의 끈적한 느낌이 사라진다. 일행 중 한 분이 무릎이 안 좋다고 하시면서도 힘든 내색 없이 꾸준히 잘 따라오신다. 함께 등반하기에 가능한 상황이다.  눈 쌓인 고요한 산길의 맑은 기운에 몸도 마음도 가볍다.


삶에는 반드시 쉼표가 필요하다. 산행도 중간에 휴식을 해야 더 높이 오를 수 있다. 간식을 서로 나누며 원기를 보충한다. 나는 순천 처가에서 올라온 단감을 준비했다. 달고 깊은 맛이 간식으로 그만이다. 산행전문가는 산행 시 필수 간식으로 초콜릿과 바나나를 추천했다. 우리가 흔히 준비하는 오이나 과일보다는 열량을 바로 낼 수 있는 음식이 준비해야 할 필수품이라고 했다. 일리가 있는 조언이다. 겨울이라서 잠깐 쉬었음에도 더워진 몸과 땀은 금방 식어버리고 곧바로 추위가 파고든다. 방한복을 바로 챙겨 입는다. 한겨울 산행 시에는 체온 관리가 중요하다. 수시로 옷을 벗고 입는 것이 번거로울 수 있지만 일정한 컨디션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필요한 과정이다.

높은 곳에 오를수록 조망은 좋아진다. 불암산 정상도 보이고 북한산의 위용도 눈에 들어온다. 멀리 롯데타워도 아스라이 보인다. 날이 금세 흐려져 마치 운무가 낀 것 같다. 높은 산에 오르는 이유 한 가지는 탁 트인 전망을 내려다볼 수 있어서다. 발아래 펼쳐진 세상을 보면서 사소한 것에 연연하는 어리석음을 돌아보며 호연지기를 기르게 된다.


헬리콥터 착륙장에서 간단한 점심을 먹었다. 마트에서 사 온 김밥인데 제법 맛이 있다. 한 분은 힘들어서 정상에 오르는 것을 포기하려 했는데 김밥이 자양분이 되어 정상으로 향했다. 제 때 음식은 확실히 보약이다.

이제는 정상이다. 가파른 길이 위험해 보이지만 튼튼하고 안전한 계단이어서 안심하고 오른다. 아래로 내려다 보이는 산의 자취가 웅장하다. 서울 근처 산들은 어디를 둘러봐도 산세가 아름답다. 너무 가까이 있어 우리가 진가를 인식하지 못한 탓이다.  

좁은 바위 정상에 올랐다. 산 정상에 올라 사방을 발아래 두니 쾌감이 밀려오고 성취감에 가슴이 뿌듯하다. 고소공포증이 있어 울렁거리지만 올라온 노력을 헛되이 하지 않으려 용감해진다. 먼저 온 아가씨가 용감무쌍하게 바위에 올라서서 멋진 폼을 잡고 사진을 찍어달라고 한다. 나도 이에 질세라 무서움을 뒤로하고 용기를 낸다. 깃대를 잡은 손이 떨리지만 웃는 표정을 짓는다. 산 허리 풍경이 마치 설탕시럽을 뿌려놓은 것 같다. 정상에 오른 기쁨을 만끽하고 이제는 하산이다. 산은 내려갈 때 더 조심해야 한다. 성취 후에 긴장해야 하는 이유인 것이다.

하산길에는 눈이 더 많아졌다. 올라오는 길에는 햇빛을 받아 눈이 사라진 면을 보았지만 내려갈 때는 눈이 남은 부분을 바라보고 가는 까닭이다. 나무 기둥에도 선을 그은 듯 눈의 자취가 선명하다. 흐려진 하늘에 눈송이가 하늘거리며 날린다. 산속에서 눈이 내리는 풍경은 훨씬 더 섬세한 감정을 불러낸다. 고요하고 평화롭고 아늑하다. 자연 속에 하나가 된 느낌이다.

바위에 고드름도 달렸다. 고드름이 영화에 나오는 괴물 베놈의 이빨같이 괴기스럽다. 소나무와 흰 눈은 잘 어울리는 한 쌍이다. 푸른빛과 흰빛의 조화가 깨끗한 이미지를 부각한다. 그래서 소나무가 절개를 상징하는 의미를 지녔을 것이다. 하산 끄트머리에 은행잎이 눈 위에 수북하다. 가는 가을의 마지막 인사가 눈부시다.


짧지 않은 산행길이지만 능선으로 다녀와서인지 힘들지 않고 편안한 산행이었다. 한겨울의 정취를 충분히 즐기고 누린 시간이다. 좋은 분들과 사이좋게 다녀오니 즐거움이 더 크다. 하산해서 함께 나눈 두부요리는 몸과 마음을 풍성하게 채워주었다. 멋진 겨울날이다.

#산행 #폭설 #설산 #불암산 #등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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