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을 나서는 아침, 바람이 차다. 두꺼운 옷차림 하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절로 든다. 냉기가 휘감는 분위기에도 싱그러움을 잃지않는 식물이 눈에 들어온다. 활짝 피어있는 국화다. 심지가 단단한 녀석임에 틀림이 없다. 대부분 나무들이시들어 낙엽을 떨구고 겨울차비가 한창이지만 당당하게 꽃을 달고 있는 기개가 놀랍다.
세계적인 건축가 데이비드 치퍼필드가 설계한 용산의 아모레 퍼시픽 빌딩을 찾았다. 차를 타고 지나가며 깔끔하고 단순한 듯하면서도 화려함이 눈에 띄는 외관의 건물을 자주 본 적이 있지만 오늘에야 처음 방문이다.
인천을 다녀오는 길에 용산에 사시는 화백님의 연락을 받고 가게 되었다. 오랜만에 통화라 반가웠다. 그분은 화랑에서 인연이 되어 꾸준히 교류를 하는 분으로 서투른 나의 글을 좋아해 주시는 애독자 중 한 분이다.
눈발이 날리는 용산광장에서 만나 지하를 통해 사옥에 입장했다.
건물에 들어서자 실내의 사각진 너른 광장이 시원하게 다가온다. 용산의 금싸라기 땅에 이렇게 넓은 공간이 건물 안에 존재한다는 사실이 놀랍다. 경제적인 시각으로 보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층고도 3층이상이어서 건물 안이라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는다. 오히려 야외의 광장이나 진배없다. 호기심을 안고 화백님이 좋아하시는 2층 테라스로 향했다.
꽃가게에 전시된 크리스마스트리가 방문객들을 사랑스러운 자태로 맞는다. 다채로운 조명을 쓰지 않고 단순한 불빛이 오히려 화려하다. 품격이란 결코 요란하지 않다는 사실을 넌지시 알려주는 것 같다.
2층 테라스에는 방문객들이 편하게 앉아 쉴 수 있는 의자와 테이블이 놓여있다. 원색의 의자들이 공간을 채색하고 있다. 알록달록한 의자들이 설치 작품 같다.
의자에 앉아보니 화백님이 애정하는 공간이라는 의미를 알 것 같다. 분주한 도심 속에 세련된 여유로움이 느껴진다. 환하고 깨끗하고 단정한 분위기에 마음이 편안하다. 마주 보이는 테라스에 앉아있는 이들의 느긋한 모습이 보이는 풍경도 유럽의 카페 같은 분위기를 풍긴다.
반듯한 네모의 공간이 주는 획일적인 단조로움을 중심에 원을 설치하여 긴장감을 해소시킨 점도 눈에 띈다. 실내를 구성하고 있는 주류의 색은 회색 콘크리트 자체 그대로다. 밝은 창을 통한 자연 채광과 하얀 조명들이 정갈한 분위기다.
실내 장식은 아주 단순하다. 그저 무심하게 금속재질의 선을 그어 놓아 심심함을 달래는 수준이고, 입구에 설치된 출입구도 각진 디자인으로 북유럽의 단순하면서 모던하고 세련된 감성을 담았다.
중정에는 격자무늬의 천장이 조성되었고 그 위에 물이 넘실댄다. 건축작가는 우리 고유의 아름다움을 디자인에 담았다. 이 건물은 ''동양의 전통적인 창호에서 영감을 받은 수직과 수평의 패턴이 특징"이라고 한다.
건축가 치퍼필드에 대해 런던 가디언지에서는 그의 작업에 대해 진중하고 견고하며, 화려하거나 극단적이진 않지만 역사적 문화적인 맥락에 들어맞는다고 평을 했는데 이 사옥은 확실히 그의 건축관이 뚜렷하게 반영이 된 듯하다. 3층에 올라가면 매혹적인 공간을 만날 수 있다는데 아쉽게도 일반인에게는 개방이 되지 않는다.
2층에 위치한 공예품 가게에 들렀다. 뛰어난 디자인 제품이 즐비하다. 외국과 우리나라 작가들의 작품이 섞여있다. 박민숙 작가의 머그잔이 독특한 디자인으로 눈길을 끈다. 일일이 상감기법으로 새긴 문양이 친근하고 재미가 있다.
가장 매력적인 작품은 모래로 빚은 그릇이었다. 프랑스 작가의 작품인데 자연이 용기 안에 그대로 담겼다. 첫눈에 제주도가 연상되는 아름다운 작품이다. 회화와 공예가 어우러진 멋진 솜씨에 감탄이 인다.
전광영 작품
전광영 작가의 작품도 걸려있다. 그는 세계적인 한지작가다. 한지 집합 작업의 일환의 작품으로 전통이 담겨있지만 현대미술의 진수를 그대로 보여주는 작품인데 붉은빛이강렬하다. 우리나라 고서가 작품의 주재료다. 묶여있으면서도 사방으로 뻗고 있는 작품이 자유를 갈구하는 사람들의 의지를 드러내는 것 같다.
지하에는 식당이 있다. 주변에 장신구나 장식품 가게가 흥미를 끈다. 목재 오르골에서 아름다운 선율이 흘러난다. 웨이팅 하면서 주변을 돌아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이른 저녁을 맛있는 돈가스로 먹고 건물 주변을 돌아보았다. 수많은 선들이 중첩되어 있는 외관은 하나의 설치 작품이다. 조명이 들어오면 또 다른 분위기를 풍긴다. 용산의 랜드마크로 당당히 자리매김을 할 만큼 독특한 외관이다.
정영선 조경가가 꾸민 외부 조경에 설치된 조형도 인상적이다. 건물 디자인에 어울리게 백합나무 단일 수종으로 꾸민 정원은 수직선으로 단순한 선구성을 보여 준다. 그곳에 곡선으로 이루어진 설치물이 물에 반영되어 신비로움을 안긴다. 사색의 공간으로도 손색이 없다.
어둠의 장막이 드리운 곳에 조명이 환하다. 중정에 반짝이는 영상물에 자연스럽게 몰입이 된다. 쉼 없이 변화하는 명멸하는 불빛들이 자유로운 상상을 불러낸다.
즐거운 시간이 흐르고 돌아가는 길, 빌딩의 자태가 까만 밤에 따스함을 전한다. 용산의 상징 튤립 조형물이 꽃으로 피어났다. 용산역에 '꽃보다 예쁜 그대가 있어 좋다' 문구에 기분이 좋아진다. 화백님 덕분에 감성이 충만한 시간을 보냈다. 사람은 꽃보다 아름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