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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디디 Jul 07. 2020

MBTI 신봉자들에게

인간의 성질머리와 MBTI에 대한 가벼운 고찰

얼마 전에 재미로 가족들 모두가 MBTI 검사를 했다. 우리 엄마는 ESFJ, 아빠는 INTP. 30년을 넘게 함께 살아온 부부의 MBTI는 말 그대로 정 반대. 엄마랑 아빠가 워낙에 다른 사람인 건 알고 있었지만, 단 한 글자도 일치하지 않는 저 조합을 보면서 '어떻게 둘이 결혼해서 사는 거지?'라는 생각과 함께 ‘극과 극은 끌린다’는 말이 다시금 떠올랐다. 와 신기하다 하고 말았던 나와는 달리 엄마는 한참 생각에 빠졌다. 그러고 나서 말했다. 30년을 아빠를 이해하지 못했다고. 저 사람은 왜 저렇게 말할까, 왜 저렇게 말해서 나에게 상처를 줄까. 따져 묻지도 못하고 혼자서 끙끙 앓았다고. 근데 이 MBTI라는 걸 보니 그 이유를 알겠다고. 간단하다. 그냥 아빠는 그렇게 생겨먹은 사람이었다는 거다. 어떠한 의도도, 악의도 없이 그냥 그게 아빠의 삶의 방식이었다는 거. 아빠에겐 당연한 사고의 흐름이 엄마에겐 너무 비정상적이었고, 물론 반대도 마찬가지였을 테다. 엄마는 결혼 생활 내내 아빠의 방식을 공감하고 이해하기 위해 애썼다. 사실 그건 서로 공감하고 이해해서 될 일이 아니다.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인간의 성질머리는 제각각 다르게 생겨먹었다는, 그 지당한 사실을 MBTI는 굳이 굳이 길게 풀어내 분류하려 애쓴다. 성격이란 한 줄로 규정할 수도 없고, 나와 완전히 같은 성격의 사람이 존재할 수도 없기에 불명확하다. MBTI는 그 추상적인 것을 어떻게든 분류해서 묶고, 묶인 이들끼리 공감하고 소속감을 느끼게 하기 위한 일종의 의식 같기도 하다. 나의 지극히 평범한, 혹은 지랄 맞게 독특한 성격 또한 16개의 MBTI 유형 중 하나일 뿐이라는 안정감을 느끼려는 욕망의 산물 같기도 하고 말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MBTI가 지금처럼 유행하는 것도 이해할 만하다. 사람은 어떻게든 자기 정체성을 규명하려 하고, 동시에 소속감을 느끼길 원하니까. 그리고 '인간관계'나 '성격' 따위의 것들은 소시오패스가 아닌 이상 누구나 평생 흥미를 느낄 소재니까. 아니나 다를까, 정신 차려 보니 나도 어느새 MBTI 신봉자 중 한 명이 되어 있었다. 


구글에 mbti를 검색하면 나오는 수많은 짤방들. 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MBTI 테스트를 처음 해봤던 건 2년 전 동아리에서 밤샘 편집을 하던 중이었다. 나를 포함해서 다들 미쳐가던 중이었고... 다 같이 뜬금없이 새벽에 MBTI를 해보고 낄낄댔던 기억이 있다. 그때만 해도 지금처럼 MBTI가 인기 많은 인터넷 밈은 아니었다. 그러다가 최근 MBTI 붐이 일면서 나도 몇 달마다 주기적으로 검사를 해 봤다. 거의 항상 ENTJ가 나온다. 몇몇 가지 항목들은 왔다리 갔다리 하는 것도 있다. 검사 당시의 컨디션이나 사회적 상황에 따라 외향성/내향성이 특히 많이 달라지는 것 같았다. 아무래도 MBTI의 묘미는 인터넷에 올라오는 각종 공감 썰을 찾아보는 일이다. ENTJ 관련 썰을 찾아보면 대개 나랑 맞는 것도 같다. 내 실제 모습, 또는 내가 되고자 하는 모습과 얼추 비슷하다.


ENTJ는 공감 능력이 좀 떨어지고, 성공과 돈에 미친 자낳괴(이렇게 심한 텍스트는 없었지만, 요약하자면)라고 소개되곤 한다. 확실히 나는 살면서 한 번도 '돈보다 사랑'이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긴 하다. 사실 진심으로 돈보다 사랑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주변에 꽤 많아서 놀랐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게 내가 공감 능력이 떨어지거나 성공을 1순위로 여겨서라고 생각한 적은 없었는데, 왠지 ENTJ 설명글을 읽으면 읽을수록 ‘아, 내가 성공이 1순위인 자낳괴인가 보다’ 하고 생각하게 된다. 그러니까 내 MBTI에 대한 내용을 스스로 내재화시키는 거다. 타인의 고민을 들어줄 때 점점 딴생각을 하고 귀찮아하는 나를 보며, ‘아 나는 ENTJ라 그런 듯’ 하면서 합리화한다든가, 심심해서 사람을 만나고 싶어질 때면 ‘아 역시 나는 I가 아니라 E이긴 한 듯’ 따위의 생각을 한다든가 말이다. 분명 예전엔 아니었는데, 도대체 언제 이렇게... M며들었는지 모르겠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정확히 종잡을 수 없었던, 그리고 별로 종잡을 필요성도 못 느꼈던 예전에는 내가 어떤 방향으로 행동하든 그냥 그게 ‘나’였는데, 지금은 ENTJ 스러운 행동을 하면 나다운 거고, 아닌 행동을 하면 나답지 않은 행동을 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확실히 과몰입이 맞다. 어떤 연예인은 이렇게 결과에 자신을 맞춰가는 게 싫어서 MBTI 검사를 안 한다고 했다는데, 과연 타당한 이유다. 


대담한 통솔자....? 내가..?;; (출처 : www.16personalities.com/ko)


아 그래서 싫다는 뜻은 아니다. 과몰입이라곤 했지만 일상생활을 방해할 수준인 것도 아니거니와 MBTI는 어쨌든 혈액형이나, 별자리 등에 비하면 내 실제 행동 양식에 크게 근거하고 있지 않나(검사를 바탕으로 하니까). 그래서 내 성격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보는 데 큰 도움이 된 건 분명한 사실이다. F와 T의 차이, 특정 상황에서 각 유형이 하는 생각 등등... 16개의 유형을 가르는 수많은 차이를 보면서 어떤 성격도 이상할 건 없고, 그냥 인간이란 이렇게 서로 다르게 타고난 거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서 내 성격에 대한 정리나 객관화가 이뤄지기도 했는데, 나로선 긍정적인 방향이었다. 스스로 납득하기 힘들었거나, 남들과 비교하며 무조건 개선해야만 한다고 느꼈던 내 성격의 어떤 부분들이 ‘난 원래 그런가 봐’라는 간단한 말로 이해되었기 때문이다. 나는 이렇고 너는 저렇고. 뭐가 더 나을 것도 모자랄 것도 없는 건데 괜히 모나게만 보였던 것들 말이다. YOLO는 고사하고 집에서 쉬는 것도 메모장에 계획해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라든지, 그런 와중에도 딱히 부지런하진 않은 여유로운(게으른ㅎ) 성격이라든지, 새로운 일을 시작할 때면 얻게 될 이익보다 잃게 될 기회비용부터 떠올리는 계산적인 사고방식 등등. 괜히 내 인생만 노잼인 것 같고 그랬는데 이젠 이게 내 성질머리에 맞는 삶의 방식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마음이 편하다. 괜히 나한테 맞지 않는 그럴싸해 보이는 옷에 나를 끼워다 맞추겠다는 억지도 부리지 않게 되었다. 이것도 MBTI의 순기능일까, 아니면 그냥 내가 나이가 들면서 자기 고찰이 깊어진 걸까. 그래도 계획만 세우고 실행력 부족한 건 좀 고쳐지면 좋겠긴 하다.


근데 이 글을 쓰게 된 이유는 타인을 대할 때 MBTI라는 기준을 대입하기 시작한 내 모습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이미 오랫동안 친했던 친구와의 주요 대화 주제나 공유하는 행동 양식 등을 이제 와서(!) MBTI로 정리하기 시작했다. 나랑 가장 친한 친구 중 한 명은 F 유형, 다른 한 명은 T 유형인데 F 유형인 친구와는 서로 안 좋은 일이 생겼을 때 위로하는 반면 T 유형인 친구와는 일단 같이 욕을 한다. 이 친구도 MBTI 신봉자인 터라 같이 서로의 대화 패턴을 분석하면서 얘기를 나눴는데, 한참 하다 보니 이걸 왜 하고 있나 싶었다. 그리고 새로운 사람을 만날 때도 그렇다. 새로 알게 되어 가까워진 사람이 ENTJ라고 하면, 왠지 나랑 비슷해서 안 맞을 것 같고, INTP라고 하면 나랑 INTP의 궁합이 좋다던데 그래서 왠지 나랑 잘 맞을 것 같고. 어떠한 경험적 이유도 없이 나도 모르게 MBTI에 의존해서 상대를 판단하고 있었다. 그 사실을 깨닫는 순간 이제 MBTI를 놓아줘야 할 때가 왔구나, 싶었다. 위에서 언급한 순기능들은 언제까지나 MBTI가 재미로, 그리고 자기 고찰로서의 수단으로써 기능할 때만 유효한 거다. 이게 타인을 가르는 구획이 되는 순간 너무 많은 예외와 변수가 생기게 된다. 그리고 그건 인격체가 얽힌 일이기에 단순한 변수가 아니라 누군가에게 상처를 줄 수 있다는 위험성을 내포하게 된다. 내가 ENTJ라는 이유로 누군가 나를 공감 능력이 떨어지는 사람이라고 속으로 생각하고 있다면 얼마나 억울할까...


만약 엄마랑 아빠가 젊을 때 MBTI가 유행했다면, 그래서 서로가 너무 다르다는 걸 당연히 받아들이고 재미 소재로 활용할 수 있었다면 엄마는 조금 덜 애써도 되었을까? 답은 '아니'다. 엄마는 아픈 자신에게 ‘병원에 가’라고 말하는 아빠에게 한치의 악의가 없다는 것을 알고 난 지금도 여전히 아빠와 너무 다르다. 다른 걸 알고 받아들인다 해도 다른 건 다른 거다. 그렇다고 해서 같은 사람만 골라 사귈 수도 없다. 희한하게도 MBTI 궁합표를 보면 같은 유형끼리 최상의 궁합을 보이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생각해 보니 나도 나랑 같은 성격의 사람과는 잘 맞지 않을 것 같다. 뭐 물론 나랑 완전히 같은 성격의 사람이 존재하진 않겠지만 말이다. 


인간의 성질머리란 결국 겪어봐야 알고, 정의할 수 없고, 분류할 수 없다. MBTI든 뭐든, 아무리 많은 기준을 들어서 묶고 나누려고 해도 삐져나오는 개개인의 변수가 너무 많기 때문에. 그러니까 MBTI도 딱 그 변수를 묵살하지 않는 선에서 즐기는 것이 좋을 듯싶다. 이건 나를 포함한 수많은 MBTI 신봉자들에게 하는 말이기도 하다. MBTI가 한물가면 또 다른 분류법이 등장해서 새로운 밈이 되겠지. 제아무리 정교하고 복잡한 검사가 개발된다 한들 인간 성격의 변수를 모두 반영할 수는 없을 거다. 그리고 반영해서도 안 되고. 어차피 이 쪼끄만 세상에서 지루하지 않게 살 수 있는 이유는 나와 다른 거, 내가 몰랐던 것들을 발견해나가는 재미인데. 그 변수들이 없어지면 도대체 뭔 재미로 산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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