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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숲 May 05. 2023

see you again

뮤직 에세이

2016. 12. 23. 0:12


걸었다. 빗길을 천천히, 오래오래. 


우산에 부딪히는 빗방울이 잘게 부서지면서 부드럽게 감기는 소리를 냈다. 손이 시리고 볼이 얼얼했지만 차가운 공기의 감촉이 제법 괜찮았다. 뒤늦게 떨어진 낙엽들이 빗물에 잠겼고 익명의 발자국들 아래로 짓밟혔다. 내 발의 움직임을 보라보며 걷다 발밑에 깔리는 낙엽을 보며 걷다 낮게 흐르는 빗물을 따라 걸었다. 


겨울의 중심이었다. 발꿈치에 매달리는 발자국 소리가 낯설었다. 잔뜩 움츠린 사람들은 빠르게 걸었고 네온사인과 차량이 내뿜는 불빛이 비바람에 섞여 소란스런 밤을 만들었다. 가로등이 하나둘 켜지고 나는 내 그림자와 앞서거니 뒤서거니 걸음을 옮겼다.


아무 생각이 나지 않았다. 아무 생각을 할 수 없었다. 아무 생각도 하기 싫었다. 그런 상태를 권태라 명명할 수 있을까. 욕망의 부재는 무엇을 의미할까. 한 가지 생각에 끈질기게 매달렸다. 나는 정말 원하는 것이 없는 걸까. 그게 가능한가. 


어느새 내가 사는 집 근처였고, 나는 재빨리 다른 방향으로 몸을 돌렸다. 외면하고 싶었다. 


내가 아는 많은 것들이, 익숙한 사물과 풍경들이 왜곡된 상태로 시야에 잡혔다. 세상은 그다지 말랑거리지 않았다. 경직된 근육만큼이나 딱딱했다. 그냥 걷기로 했다.


음악전문서점에서 만난 아가씨는,  첫 단어 옆 쉼표의 의미에 대해 말했다. 무수히 많은 문장으로 이루어진 책을 만든 작가들의 노고와 정신을 사람들이 너무 쉽게 받아들이는 거 같아서, 작가들의 그런 정신을 알아주었으면 하고, 또 잠깐 한 호흡 쉬면서 작가들의 깊은 사유와 고통을 한 번쯤 생각해 달라는 의미로 쉼표를 찍었다고. 아무것도 아닌, 아주 사소한 쉼표 하나에 그런 깊은 의미가 담겨 있었다니.


지미핸드릭스와 커트코베인과 존레논을 기타처럼 옆구리에 낀채, 밤이 익어 조금은 더 짙어진 그림자를 밟으며 빗길을 돌아왔다.




"See You Again" 

https://youtu.be/KzARx0EuDg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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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 5. 5


오늘도 그날처럼 비가 내린다. 그날처럼 찬비가 아닌 시원한 봄비.


현대경제 신춘문예 대상을 받은 장편 '세상 끝에서 부르는 노래'를 쓰기 전 단계에 쓴 메모다. 벌써 햇수로 7년이 지났다. 기타를 막 배우기 시작했던 시기, 중고상품점에서 우연히 만난 중고 기타와 그 근천의 음악서점을 들락거리며 소설의 발상이 시작되었다. 


소설이 발상이란 거창한 것에서 비롯되는 건 아니다. 아주 사소한 발견, 엉뚱한 상상력이 서로 점화가 되었을 때 이야기는 시작되는 것 같다. 

쉽게 시작했지만 어렵게 마무리한 장편은 출렁이는 고무줄처럼 응모할 때마다 매수를 올렸다 내렸다를 반복했다. 2020년도 문학사상 최종심에서 언급이 된 뒤, 희망을 갖고 몇 군데 더 응모했다. 하지만 이후 더 이상의 언급도 되지 못한 소설. 

이젠 이 작품을 버려야 하나 고민했고,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현대경제에 응모했다. 그곳에서도 언급이 안 되면 공모전을 포기하고 다른 방법을 찾자고 결심했다.

 

2022년 크리스마스 역시 쓰리고 아픈 날이었다. 모든 걸 포기한 채 아이들과 일본으로 여행을 떠났다. 


2023년 1월 3일, 전화를 받던 날 아침을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단편이 당선됐을 때도 그정도의 벅찬 감정을 느끼지 못했다. 어쩌면 나의 간절함이 통했다는 데서 오는 감격 때문이었을 것이다.

나는 엉엉 울었고, 당황한 기자는 나를 달래며 말했다. 


"저기 진정 좀 하시구요. 메모가 필요한데 10분 뒤에 전화드리면 될까요?"


그렇게 나의 장편 '세상 끝에서 부르는 노래'가 세상 밖으로 나오게 되었다. 처음 소설의 발상 시기 동안 매일 듣던 음악이다. 


'see you again' 

'다시 만나요'


작별인사지만, 

또다른 시작을 의미하는 인사로 생각하고 싶다. 

책이 출간되어 작품을 다시 만나는 날을 기다리며! 


        

원곡

https://youtu.be/RgKAFK5djSk




#see_you_again #뮤직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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