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예진아 Jun 16. 2022

나의 첫 연애 이야기-1

A의 여자 친구는 내가 아니야.

서랍을 정리하다가 전하지 못한 편지를 찾았다.

-나는 날아갈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라는 말로 담담하게 시작한 편지는 중반부에 이르러서는 감정이 격해지더니 절정에 이르러서는 슬픔과 분노, 원망과 저주가 가득 담겨 있었다. 

편지를 다 읽고 난 후, 북북 찢어서 쓰레기통에 버리며 이 편지를 보내지 않은 과거의 나에게 진심으로 감사했다. 이성이 없었다고 생각했는데 다행히 있었구나, 과거의 나.


편지의 주인은 대학시절, 4년 동안 만났다 헤어졌다를 반복하며 친구와 연인 사이를 수도 없이 왕복하다 결국 아무도 아니게 된 A였다. 


나의 연애사 중 가장 길었고, 가장 구질구질했으며, 가장 비참한 순감을 경험하게 한 첫 번째 연애.

이제 그만 곱게 접어 기억 밖으로 날려버려야겠다.



편지를 썼던 시기는 A가 입대를 한 직후로, A가 다른 여자 B와 깊은 관계를 가지고 있었다는 걸 알게 된 때이기도 했다. 사실 눈치는 진작 챘었지만 나는 애써 아닐 거라고 부정하면서 A와의 관계를 유지해왔었다. 그러나 A의 입대 후, A의 군부대 소식을 알려주던 사이트에 접속했다가 A의 여자 친구인 양 쓴 B의 글을 발견했고, 미련하게도 나는 그제야 현실을 마주했다. 


그 후, 나는  A에게서 걸려오는 콜렉트콜을 단  받지 않았다.  A의 편지에 답장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매일 아무렇지 않은 척 학교생활을 했다. 약해 보이고 싶지 않아서 평소 하지도 않던 화장을 하고 높은 하이힐을 신고 충동구매한 옷들을 입고 학교를 활보했다. 속이 울렁거려서 잠들 수 없는 나날이었지만 누구에게도 내 상태를 들키고 싶지 않았다. 사랑받지 못한 여자는 비참하고 더없이 초라하다고 생각했던, 어리고 또 그만큼 어리석었던 때였다.


 A의 주변인들은 내가 너무 무심하다고, 어떻게 그럴 수 있냐고 묻곤 했다. 사실, 물었다기 보단 일방적인 추궁에 가까웠다. 그중엔 나의 친구였던 사람들도 있었다. 


-너는 A 군대 갔는데 안 슬퍼? 안 보고 싶어? 어떻게 편지도 한번 안 쓸 수가 있어?

-응. 안 슬퍼. 딱히 안 보고 싶어. 그럴 수도 있지.


나는 최대한 담담한 목소리와 표정으로 앵무새처럼 반복했다. 그러나 백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가 없듯, 하루에도 몇 번씩 가해지던 언어의 난도질에 나는 무너지고 말았다. 


-A의 여자 친구는 내가 아니야. 


이 짧은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울음이 터져 나왔다. 

A의 여자 친구는 내가 아니야. A의 여자 친구는 내가 아니야. A의 여자 친구는 내가 아니야.

입 밖으로 내고 나니 모든 것이 더욱 선명해졌다. 당황해하며 무슨 일인지를 묻는 친구들에게 B가 쓴 글을 보여주었다. 내 친구들을 포함한 A의 주변인들도 이미 둘의 이상한 낌새를 알었기 때문에 별다른 설명은 필요하지 않았다. 다들 설마설마했던 모양이었다. 

이날을 기점으로 나는 나쁜 년에서 불쌍하고 초라한 여자가 되었다. 더 이상 언어의 난도질은 없었다. 그러나 그들의 동정 어린 시선, 안쓰럽다는 눈빛은 내 마음을 다치게 하기 충분했다.

 

작가의 이전글 변곡점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