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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예진아 Jun 11. 2022

변곡점

커피를 마시다 문득, 그릇에 대해 생각한다.

흙이었던 이것이 물에 반죽되고 형태를 갖추고 유약을 입고 불에 구워지기까지, 

얼마나 많은 변화와 시련을 감내해야만 했을까. 

한때는 형체도 없던 흙가루가 그 인고의 시간을 견뎌 마침내 

단단하고 쓸모 있는 그릇이 되어 내 손에 쥐어져 있다. 


어쩌면 나에게 주어진 시련도 나를 더욱 단단하고 쓸모 있게 만드는 게 아닐까.


그러다 또다시 문득, 그릇이 되지 못한, 명명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해 생각한다.

형태가 어긋나 버린 것들과 

높은 온도를 견디지 못하고 터져버리는 것들과

그 모든 걸 견뎌내고도 깨져버려야만 하는 불완전한 것들은 형체도 이름도 얻지 못한 채 버려진다.

가마 뒤편에서 불완전한 것들을 망치로 내려치는 조물주의 어두운 표정은 그것들이 불쌍해서일까 그것들에 투자한 자신의 시간과 정성이 아까워서일까. 


구워지기 전이라면 흙으로 다시 돌아가면 그만이지만, 

높은 온도에 노출된 흙은 더 이상 예전으로 돌아갈 수도 없어서 흙도 그릇도 아닌 분해되지 않는 무언가로 남는다. 차라리 한춤 흙이었다면 꽃이라도 피워냈을 것을.


나는 살면서, 피해 갈 수 없었던 불행을 맞이했고 이후로 다시는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그 불행을 처음 겪었던 날에도, 그것이 무슨 일인지도 몰랐지만, 이제 절대 다시는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생각을 했다. 소리 한번 내지 못하고 몸은 뻣뻣하게 굳은 채 눈을 질끈 감은 채로. 어차피 어두워서 잘 보이지도 않았지만.


사람들은 시련은 나를 더 강하게 한다는 격언은 잘 알지만 그 앞과 뒤에 붙은 말은 좀처럼 언급하지 않는다.

나를 죽이지 못한 모든 시련은, 그리고 살아있는 한 나는 더 강해질 것이다.

그러니 시련이 나를 죽음으로 몰고 간다면, 시련은 그저 시련일 뿐

그 어떤 동기도, 그 어떤 의미도 부여하지 못한다.

나는 죽고 말 것이므로, 그리고 어쩌면 당신들도.


사실 딱히 쓸모 있고 싶었던 것도 딱딱해지고 싶었던 것도 아닌데,

누군가는 그릇이 되지도 흙으로 남지도 못하게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이렇게 커다란 가마에 기어코 들어가고야 마는 우리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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