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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예진아 Dec 01. 2021

사랑니를 뽑던 날

뽑아진 것은 사랑니만이 아니었다

마지막 남은 사랑니를 뺐다.


사랑니가 하나도 안 나는 사람도 있다던데 나는 진화를 덜 해서인지 양쪽 위아래에 각각 하나씩, 총 4개의 사랑니가 났다. 

  처음 사랑니가 난 것은 15살 무렵이었다. 윗니 왼쪽을 제외한 세 군데에서 통증과 함께 무언가 올라오는 것이 느껴졌다. 치과에 가서 엑스레이를 찍어보니 잇몸 속에서 잇몸 밖으로 나오려고 기를 쓰고 있는 사랑니들이 보였다. 당시 의사 선생님은 나에게 선택의 여지를 주지 않고 무조건 발치를 해야 한다고 했다. 그도 그럴 것이, 나는 하관이 좁아서 원래 있던 치아들도 옥신각신하며 간신히 자기 자리를 유지하고 있는 형상이었기 때문에 갑자기 튀어나온, 그것도 3개나 되는 치아에게 나눠줄 공간이 없었다. 그렇게 사랑니들은 바깥세상에 나오기 전에, 온전한 형태를 갖추기도 전에 하나씩 제거되었다. 사랑니를 빼며 -자리 잡을 공간이 준비되지 않은 것들은 이 세상에서 완전히 제거되고야 만다- 고 생각했던 건 아마 그때 내가 지독한 사춘기에 시달리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20대 중반쯤에, 나는 다시 한번 윗니 왼쪽에서 무언가가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사랑니였다. 그러나 이번엔 그때와 달랐다. 그동안 나는 치아교정을 했기 때문에 겹쳐있고 비뚤어져 있던 치아들이 고르게 자리를 잡은 상태여서, 다행히 사랑니 하나 정도는 날 수 있는 공간이 있었다. 그리고 윗니 왼쪽 사랑니는 아주 조용히, 아주 천천히 잇몸을 뚫고 올라오고 있었기 때문에 통증이 없었고 불편하지도 않았다. 그래서 나는 마지막 남은 사랑니를 제거하지 않고 입안 깊숙한 곳, 다른 사람은 볼 수 없고 나만 느낄 수 있는 곳에 간직하기로 했다.


사랑, 니. 사랑니.

다른 치아들은 어금니, 송곳니, 앞니 같은 평범하기 그지없는 이름으로 불리는데 사랑니라 불리는 이 치아는 그 이름만으로도 특별하게 다가온다. 아마 나는 이 이름 때문에 사랑니에 애착을 갖게 된 것이리라. 

치아가 날 때 첫사랑을 앓듯이 아파서 사랑니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는데 사랑니가 아프지 않게 나면 첫사랑도 아프지 않을 수 있을까. 말 같지도 않은 우스운 이야기지만, 내 첫 사랑니는 내 첫사랑과 꼭 닮아있었다. 둘 모두 내게 처음 겪는 통증을 선사하고는 다 자라 밖으로 나오기도 전에 뽑혀 나갔다. 그래서 조용히, 소리 없이 올라온 마지막 사랑니는 죽을 때까지 잘 남겨두고 싶었다. 언젠가 하게 될 마지막 사랑은 이렇게 아프지 않고 평온하길 바랐기 때문이었다. 

사랑니, 나는 우습게도 이것을 사랑과 동일시하고 있었다.


내가 사랑니를 빼지 않았다고 하면 사람들은 하나같이 왜 안 빼고 있느냐고 물었다. 빨리 빼라고, 나중에 고생한다고도 했다. 그럴 때마다 나는 웃으면서 말했다.

"아껴뒀다가 나중에 쓰려고요. "

그러면 사람들은 요즘은 임플란트 대신 사랑니를 쓰기도 한다면서 수긍했다.

물리적으로 쓴다는 의미는 아니었지만 굳이 설명하지 않았다. 지나치게 감상적으로 보일 것 같아서였다.


그러나 작년부터 내 마지막 사랑니에 통증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물이 닿기만 해도 시리고 음식을 씹을 때마다 괴로웠다. 그래도 나는 사랑니를 빼고 싶지 않아서 코로나19 핑계를 대며 차일피일 치과 가는 것을 미뤘는데 얼마 전에는 급기야 사랑니가 흔들흔들 몸을 움직이며 잇몸에서 빠져나가려는 시도를 하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우리의 마지막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직감했다. 그리고 오늘, 그날이 오고야 만 것이다.

나는 회사에서 일을 하다 말고 아무래도 이대로는 안 되겠다고 선언한 후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치과로 달려갔다. 치과에 가면서도 한편으로는 혹시 사랑니 때문이 아니라 잇몸이 약해졌거나 충치가 생긴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아둔한 생각이었다. 역시나 사랑니가 문제였다.

-이거 빼야겠는데?-

단호한 의사 선생님의 말에 나는 처음 사랑니를 뽑던 기억이 떠올라 두려움에 몸부림쳤다.


처음으로 사랑니를 뽑을 때, 나는 나의 첫사랑이었던 S오빠를 떠올렸다. 좋아한다는 감정을 깨닫고 난 뒤 부끄러워서 제대로 말도 못 했던 내 첫사랑이 그 사랑니와 함께 뽑혀나갔다. 마취약 기운에 고통은 느끼지 못했지만 사랑니가 뽑혀나가던 때의 느낌은 시간이 흐른 뒤에도 한동안 생생하게 남아있었다. 

당시, 다니던 치과가 멀었기 때문에 사랑니를 뽑고 집에 돌아갈 때 버스를 1시간 정도 타야 했는데, 버스 안에서 마취가 풀려버려 엄청난 통증이 밀려와 엉엉 소리 내어 울어버렸다. 많이 힘들어 보였는지 좌석에 앉아있던 누군가가 일어나 자리를 양보해 주었다. 지금 생각하면 아픈 곳 하나 없어 보이던 아이가 갑자기 울어댔으니 사람들이 얼마나 놀랐을까 싶지만 당시에는 그런 걸 신경 쓸 정신이 없었다. 

집에 도착한 후에도 고통에 몸부림치며 울다가 겨우 잠이 들었다. 다음날 아침에 일어나 보니 얼굴 한쪽이 퉁퉁 부어 네모난 모양이 되어있었다. 그 부기가 빠질 때까지 한동안 밥도 먹지 못하고 앓아누웠다. 마침 다행히 여름방학이었기 때문에 나는 하루 종일 누워서 끙끙거리며 사랑니를 잃은 것을 충분히 아파하며 보낼 수 있었다. 


하지만 마지막 사랑니는 찰나의 순간에 허무하게 빠져버렸다. 마취약 탓이겠지만 나는 처음에 빠졌는지도 몰랐다. 의사 선생님의 다 끝났다는 말을, 마취가 다 되었으니 발치하겠다는 의미로 받아들이고 바짝 긴장하고 있었는데 얼굴을 덮고 있던 천이 시야에서 사라지더니 치과의자의 등받이가 올라와 내 몸을 일으켰다. 내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있자 의사 선생님은 사랑니가 쉽게 잘 뽑혔다고 말했다. 

의사 선생님은 거즈로 감은 솜뭉치를 비어버린 사랑니 자리에 넣었고 나는 시키는 대로 이를 꽉 물었다. 2시간 후면 출혈이 멈출 것이다. 1시간 정도가 더 지나면 마취가 풀리고 간단하게 식사를 할 수 있을 것이다. 통증이 느껴지면 참지 않고 진통제를 먹을 것이고 한숨 자고 일어나면 오늘과 크게 다르지 않은 하루를 맞이할 것이다. 가끔 음식을 먹을 때 비어버린 공간이 느껴질 테지만 불편함은 없을 것이다. 오히려 그동안 느껴오던 미세한 통증이 없어져서 시원하게 느껴질 수도 있을 것이다.


아, 내 인생에서 사랑은 이렇게 끝이 나버렸다. 어른의 사랑은 이런 것이다. 있는 듯 없는 듯 조용하고 평온하게 자리를 잡다가도 언제나 그렇듯 파국으로 치닫는다. 불안과 공포를 제법 그럴싸하게 감추고 아무렇지 않은 척, 망설임 끝에 도려내면 생각보다 아프지 않아서 당혹스럽다. 다시 한번 아픈 감정이라도 느껴보고 싶다고 생각하지만 아주 잠시일 뿐, 이제 아픈 건 싫다고, 쾌감을 주는 일이라도 고통이 동반된다면 피해야 한다고 스스로를 세뇌한다. 


이젠 아프지 않다. 어른이 되어버린 나는 사랑니가 나도, 사랑니를 빼도 아프지 않다. 사랑이 없어도 아프지 않고 사랑이 없어서 아프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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