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어썸준 Sep 29. 2020

일본 가고시마 한 달 살기 : Day18

평생 기억에 남을만한 미나미사쓰마 해안도로 라이딩

2019.4.5 (금)


일어날 때가 됐나 싶어 몸을 뒤척거리다 눈을 떴다. 방 안이 어두컴컴하길래 아직 새벽인가 하고 시계를 확인했더니 7시, 7시인데 왜 이렇게 어둡지 싶어 2층 침실에서 계단을 내려와 창 밖을 보니 비가 주룩주룩 내리고 있었다. 어제 날이 너무 맑아 오늘 비가 올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는데 아침부터 비가 주룩주룩 내리고 있으니 오늘 라이딩을 어떡해야 하나 걱정이 밀려왔다. 


어제 직원분께서 8시까지 아침 식사를 하러 내려오라고 하셔서, 그전에 대욕장에 가서 몸을 씻은 후 어느 정도 짐을 정리한 후에 식당으로 내려갔다. 

어제저녁 식사를 했던 사람들 모두 어제와 같은 테이블에 앉아 아침식사를 하였는데, 한 가지 재밌었던 것은 투숙객들 국적에 따라 식당 도착 시간이 달랐다는 것이었다. 내가 식당에 도착했을 때가 8시가 조금 넘었을 때였는데, 도착했을 때 이미 일본인 두 테이블은 자리에 앉아 식사를 하고 있었고, 내가 앉아서 식사를 중간쯤 하고 있을 때, 중국인 커플이 뒤늦게 식당에 도착하였는데, 한중일 세 국가 사람들 간에 시간 개념이 어떻게 다른지 한 곳에서 엿볼 수 있어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내가 일본인과 중국인을 보면서 차이를 느꼈던 거처럼 나의 작은 행동 하나가 다른 나라 사람들의 한국과 한국인에 대한 인식 형성에 미치는 영향이 생각보다 크겠구나 싶어, 특히 한국에 대한 정보가 부족한 곳일수록 해외 현지에서 행동거지에 좀 더 신경을 써야겠구나 싶었다.   


식사를 마치고 방에 올라왔다. 출발 채비를 하고 있는데 빗방울은 잠잠해지기는 커녕 더욱 거세지는 거 같았다. 이 날씨에 라이딩을 할 수 있을까, 비를 맞더라도 그냥 가야 하나 아니면 그칠 때까지 기다려야 하나, 그치지 않고 하루 종일 내리면 어떡해야 하나, 여기선 가고시마까지 갈 수 있는 대중교통도 없는데 등등 시나리오 별 대응 전략 구상에 머릿속이 지끈거렸다. 


일단 먼저 체크아웃 후, 어제 문을 닫아 가보지 못했던 호텔 내 박물관을 둘러보면서 비가 좀 잠잠해지길 기다려보기로 하였다. 박물관 내에는 카사사 어촌 마을의 역사와 문화를 알 수 있는 사진과 사료들이 전시되어 있었는데, 보는 것만으로도 이들의 생활터전인 바다에 대한 열정과 헌신을 느낄 수 있었다. 

내부 전시물과 외부 건축물 디자인을 둘러보고 나왔다. 여전히 비가 내리고 있긴 했지만 그래도 아까보단 조금 잠잠해졌다.   


어떻게 해야 하나 하면서 하늘을 보았다. 고민 끝에 계속 기다린다고 해도 비가 완전히 그칠 거 같지도 않고 비가 많이 와서 중간에 라이딩을 잠시 멈췄다 다시 가더라도 최소한 가고시마까지 기차점프를 할 수 있는 마쿠라자키까지는 무조건 간 후에 거기서 상황을 보고 다시 결정하자라는 결론에 이르렀다. 


호텔 입구 앞 자판기에서 물과 캔커피 등을 구매한 후에, 본격적인 출발에 앞서 카사사 항구 주변을 잠깐 둘러보기로 하였다.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바다 건너 보이는 카사사 에비수 호텔 모습이 운치 있었고, 언제 다시 올지 모를 이 곳을 떠나려고 하니 왠지 이유 없이 아쉬웠다. 


카사사의 아쉬움을 뒤로한 채 마쿠라자키로 향하기로 하였다. 어제 후기아게하마 해변공원부터 카사사 에비수 호텔까지 달렸던 길도 투르드미나미사쓰마 자전거 대회 루트였지만, 전체 라이딩에서 후반부라 그랬는지 긴장감이 조금 떨어져 대회 코스를 달리고 있다는 생각이 크게 들지는 않았었다. 하지만, 오늘은 어제와 달리 이제 막 라이딩을 시작한다는 것도 있고, 좋지 않은 기상 조건을 뚫고 목적지까지 가야 한다는 부담감도 있어선지, 마치 대회에 참가한 선수가 된 거 마냥 긴장도 되고 마음가짐이 엄숙해졌다.  

마쿠라자키까지는 약 40km. 226번 국도를 쭉 따라가기만 하면 되는데, 아직 몸이 풀리기도 전에 시작부터 꽤 경사도 높은 고개가 딱 버티고 있었다. 저 멀리서 '두둥'하면서 이제 시작이니 어디 한 번 들어와 봐라라고 무언의 메시지를 보내는 거 같아, 초반부터 쉽지 않은 싸움이 되겠구나라는 느낌이 싸악 몰려왔다. 


출발 전에는 비가 그치지 않아 걱정했는데, 부슬부슬 내리는 비가 헉헉거리며 올라갈 때 데워진 몸을 시원하게 해 주어 오히려 라이딩에는 도움이 되었다. 오르막이 힘들긴 해도 고개 굽이를 넘을 때마다 뒤쪽으로 보이는 아름다운 카사사 항구 뷰가 위안이 되었고, 고개를 넘고 얼마 안 있어 나온 전망소에서 본 리아스식 해안 절경도 어제 봤던 바다와는 또 다른 매력을 발산하고 있어 나의 눈을 사로잡기 충분하였다.  


첫 전망소 이후부터는 도로 폭이 조금 좁아졌다. 하지만, 잘 포장된 도로에 지나다니는 차량도 거의 없어 마치 이 길이 오늘 나의 라이딩을 위해 특별히 준비된 거 같았고, 주변 방해 없이 자연 속에서 온전히 나에게만 집중하면서 앞으로 나아갈 수 있어 기분도 좋았다. 또한, 중간중간 보이는 멋진 바다 풍경도 헉헉대며 나아가고 있는 나를 위해 준비된 작은 보상인 거 같아 더욱 힘을 내 앞으로 나갈 수 있었다.


오르막과 내리막이 반복되는 길을 한참을 달리고 나니 공터가 나왔다. '카사사 미술관 전망소(笠沙美術館展望所)'라는 안내판이 세워져 있고, 이 곳이 미나미사쓰마 해도에 있는 해도 8경 중 4번째라는 것도 적혀 있었다. 해도 8경이라는 게 있는지도 몰랐는데, 여기가 4번째면 첫번째부터 세 번째는 어디였었지, 해도 8경을 나타내는 안내판을 본 적이 없는데 언제 지나간 거였는지 몹시 의아하였다. 주변 자원을 방치하지 않고 최대한 활용하는 일본답게 해안도로에 해도 8경까지, 자전거 대회 코스로 활용하거나 관광 상품으로 홍보하기 딱이겠구나 싶었다. 전망소에서 바라보이는 바다 경치를 잠시 감상한 후 다시 출발하였다. 


출발한 지 얼마 안 돼 전망소가 또 나오길래 해도 8경 중 5번째인 곳인가 하고 잠시 멈춰 섰다. 해도 8경은 아니고, 'You only live once'라는 007 영화(1967년 개봉)의 촬영 장소로 사용된 오키아키메섬(沖秋目島)을 전망할 수 있는 곳이었다. 아름다운 경관도 경관이지만, 67년 그 옛날에 007과 같은 영화가 일본에서 촬영됐다는 것도 놀라웠고, 더욱이 그 장소가 일본에서도 가고시마 최남단 미나미사쓰마라는 것도 놀라웠다. 영화의 배경으로 등장할 정도면 당시 세계적으로 일본에 대한 관심과 위상이 그만큼 높았다는 건데, 이것 하나만 봐도 당시 우리와의 격차가 정말 컸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우리나라도 최근 할리우드 영화 촬영 배경으로 종종 등장하는데, 더욱 활성화돼서 외국인들이 관심도 갖고 많이 방문해서 그곳에서 우리의 달리진 위상도 느낄 수 있었으면 좋겠다 싶었다.


오키아키메섬 전망소 이후부터는 해도 8경 관련 이정표 설치가 잘 되어 있었다. 다음 해도 8경까지는 7km 남았다는 이정표가 보였는데, 전망소 간 거리를 고려했을 때 다음 전망소가 나오면 구경도 하고 한 번씩 잠깐 쉬었다 가면 체력 보충도 할 수 있어 괜찮을 거 같았다.  


얼마 안 가 작은 항구가 하나 나왔다. 규모는 작았지만 항구 특유의 비린내도 없고 깔끔하게 잘 정돈된 항구 모습에 역시 일본답다 싶었다. 

항구를 끼고 언덕을 올라가자마자, 007 You only live twice 영화 촬영 기념비가 서있었다. 아까 지나쳤던 아래 보이는 항구 마을도 영화 촬영 장소로 사용되었다고 적혀있었는데, 촬영 당시 모습과 비교해봤을 때 방파제와 건물이 새로 들어서긴 했으나 동네 모습은 예전과 거의 유사해 계속 보고 있으니 그 당시로 잠깐 시간여행을 온 거 같았다. 


해안 8경 중 5번째인 오치미즈 전망소(落水展望所)에 도착하였다. 오치미즈는 한자로 '낙수'인데, 어디 물이 떨어지는 폭포 같은 게 있나 주위를 둘러봐도 없고, 이 곳에서 뭘 전망해야 할지 잘 모르겠었다. 분명 이유가 있을 텐데 왜 이 곳에 전망소를 만들어놨을까 의아한 마음을 갖은 채 다시 바로 출발하였다.  


잠잠했던 빗방울이 다시 굵어지기 시작하였다. 헬멧 위에서 빗방울이 뚝뚝 떨어지는 소리를 들으며 고글에 들이닥치는 비바람을 맞으며 달리니 집중도도 높아지고 라이딩하는 재미가 좋았다. 하지만, 비가 그치지 않고 계속 오면 어떡하나라는 걱정에 일단은 마쿠라자키까지 최대한 빨리 도착해야겠다는 생각에 좀 더 속도를 올려 보기로 하였다. 


미나미사쓰마와 마쿠라자키 방향으로 갈라지는 삼거리를 지나니 작은 마을 하나가 나왔다. 쿠시우라(久志)라는 동네였는데, 길가에 차량이 있는 걸 봐 선 사람이 살고 있는 건 맞는 거 같은데 오랜 시간 방치되어 온 거 같은 주변 분위기가 비가 와서 그런지 더욱 을씨년스럽게 느껴졌다.


자판기 하나가 보여 잠시 비도 피할 겸 보급을 하면서 쉬었다 가기로 하였다. 12시 반이 조금 지났을 때였는데, 이 곳에서 마쿠라자키까지 남은 거리가 15km 정도이니, 예상 이동 시간을 고려했을 때 생각했던 거보다 조금 이른 시간에 마쿠라자키에 도착할 수 있을 거 같았다. 점심 식사는 마쿠라자키에 도착해서 하면 딱 좋겠구나 혼잣말을 하면서 비가 좀 잦아들기를 기다렸다.


비가 좀 수그러들어 다시 출발에 나섰다. 색감이 짙어 좀 더 아름다워 보이는 해안가를 지나자, 지속적인 언덕길이 나오고 그 끝에 터널이 하나 있었는데, 터널 진입 직전에 6번째 전망소를 안내하는 이정표가 보였다. 터널이 아닌 경사가 심한 구불구불한 옛길로 가라고 하는데, 터널로 가면 마쿠라자키까지 금방일 텐데 전망소 가려고 저 험한 언덕길을 타야 하나 고민하다가, 언제 또 여기 와보겠냐는 생각에 이왕 라이딩하는 거 좀 더 힘을 내서 가보자며 옛길로 방향을 틀기로 하였다.  


언덕길을 헉헉 끙끙대며 달린 끝에 해안 8경 중 6번째인 마루키자키 전망소(丸木崎展望所)에 도착하였다. 고진감래라고 했던가, 그냥 터널로 갔으면 어쩔 뻔했냐라는 생각이 확 들 정도로, 눈 앞에 펼쳐진 평온한 바다와 어촌 광경, 그리고 양식장 주변을 돌고 있는 어선들의 활기찬 모습들을 바라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졌고, 괜히 8경이 아니구나라는 생각도 전망소를 하나하나 들를 때마다 더욱 강해졌다.  


한 참을 바라본 후 다시 마쿠라자키를 향하였다. 오르막이 있으면 내리막도 있는 법. 구불구불해도 아래 동네까지 내리막이 계속되었는데, 빠른 속도로 단숨에 내려올 때의 기분이 정말 짜릿하였다. 


신나게 내려와서 만나게 된 동네는 보노츠(坊津)라는 곳이었다. 양식장이 있을 정도니 당연한 거지만, 아까 지나쳤던 마을들보다는 사람들이 꽤 모여사는 큰 규모의 마을이었고, 이 곳에서 보이는 바다 풍경도 그 어느 곳 못지않게 아름다웠다.  


속도감 있게 보노츠 중심지를 관통한 후 얼마 안 있어, (7번째 전망소는 오는 경로 상에 이정표가 보이지 않아 들르진 못했고) 해안 8경의 마지막 8번째인 미미토리패스 전망소(耳取峠展望所)에 도착하였다. 전망소에서 저 멀리 마을이 하나 보였는데 남은 거리 상 마쿠라자키 같았다. 곧 정복할 점령지를 얼마 남겨 두지 않은 장수가 된 거 마냥 한 동안 응시를 하면서 잠시 숨을 고른 후, 마쿠라자키 입성을 위해 다시 출발하였다. 


전망소에서 마쿠라자키까지는 약 5km. 계속되는 내리막 길을 시원하게 달린 끝에, 오후 2시쯤에 마침내 마쿠라자키에 입성하였다. 예상보다 조금 일찍 도착하였는데, 마침 배가 고프기도 해서 여유 있게, 점심식사를 하면서 오늘의 남은 일정을 어떻게 운영할지 고민해 보는 게 좋겠다 싶었다. 


마쿠라자키는 가다랑어가 많이 잡히는 곳으로 가다랑어 어획뿐만 아니라 가다랑어포(가쓰오)와 같은 가공품도 많이 생산하는 '가다랑어의 고장'이라고 한다. 가다랑어 고장에서 가다랑어를 안 먹어보는 건 있을 수 없기에, 어디로 갈까 고민하다가 가다랑어 맛도 볼 수 있으면서 동시에 가다랑어를 포함한 수산물도 구경할 수 있는 마쿠라자키 생선센터(枕崎お魚センター)가 최적이겠다 싶어 바로 그리로 향하였다.  


마쿠라자키 생선센터에 도착하였다. 수산물이 유명한 지역의 명성 치고는 생선센터 건물도 낡고 규모도 그리 크지 않을뿐더러 주변에 인적도 거의 없었다. 내가 제대로 찾아온 게 맞나 싶은 생각이 들었지만, 일단 건물 밖에 자전거를 세워놓고 생선센터 안으로 들어가 보기로 하였다. 


내가 상상했던 우리나라 노량진 수산시장처럼 시끌벅적한 분위기 속에서 다양한 살아있는 수산물들을 어항이나 좌판에 놓고 파는 곳이 아닌, 가다랑어의 고장이라 그런지 가다랑어 중심으로 손질한 생선 혹은 수산물 가공품을 파는 상점들이 모여있는, 수산시장이라 하기보다는 '가다랑어 마트'에 좀 더 가까운 곳이었다. 기대했던 거와 달라 조금 아쉽긴 했지만, 가다랑어포와 같은 가공품들을 쓱 둘러보고, 식당이 있는 2층으로 올라갔다.  


안내받은 자리에 앉아 가다랑어 회 정식 메뉴를 주문하였다. 가다랑 회 신선도도 좋고 큼직하게 썰은 식감도 좋았다. 물론 맛있기도 했지만 배가 고팠는지 음식이 나오자마자 게 눈 감추듯 식사를 마쳤다. 

식사를 거의 다 했을 때가 오후 3시였는데, 오늘 1차 목표였던 마쿠라자키 입성까지는 무사히 미션 클리어를 하였고, 오늘 남은 일정을 어떻게 운영하는 게 좋을지 고민해보았다. 

지금 바로 마쿠라자키에서 가고시마로 기차점프를 해서 가기엔 너무 시간이 이른 거 같았고, 그렇다고 저녁 시간까지 마쿠라자키 주변을 둘러볼 정도로 이 주변에 볼 게 있는 건 아니었다. 마쿠라자키에서 이브스키까지는 약 40km였는데, 오늘 페이스를 봤을 때 40km면 3시간 정도면 갈 수 있을 거 같았다. 도착하면 6시쯤이라 시간 상으로도 아주 늦지 않을 거 같았고, 이브스키까지 라이딩해서 가는 것이 원래 구상했던 계획이었기도 해서 결국 이브스키까지 라이딩해서 가는 것으로 정하였다.

하지만 이브스키에는 가볼만한 명소가 많은데 계속 라이딩만 해서 가면 좀 아쉬울 거 같아 가는 길에 뭐라도 하나 하고 싶었다. 나중에 이브스키를 한 번 더 올 거니 박물관이나 식당 같은 곳은 그때 들리는 것으로 하고, 이브스키의 명물인 검은 모래찜질로 오늘 라이딩을 마무리하면 라이딩에 지친 몸도 쫙 풀 수 있고 찜질 후 주변에 가까운 역에서 바로 가고시마로 갈 수도 있고 해서 여러모로 알찰 거 같았다. 

검은 모래찜질을 할 수 있는 헬씨랜드(ヘルシーランド)라는 곳을 찾아보니 다행히 영업시간도 오후 7시 반 까지라, 즉흥적으로 세운 계획이 착착 잘 맞아떨어지는 거 같아 기분이 좋았다.  


출발 채비를 마치고 생선센터를 빠져나왔다. 출발에 앞서 마쿠라자키역을 잠깐 둘러보고 가기로 하였다. 마쿠라자키역은 일본 최남단 시발역이자 종착역이라고 하는데, 이상하게 '최'라는 단어가 들어가 있어 그런지 뭔가 사연이 있거나 애환이 있는 역처럼 느껴졌다. 

(이때까지만 해도 내가 마쿠라자키역으로 다시 올 거라는 건 상상도 못 했었지만) 앞으로 마쿠라자키를 또 올 일이 있을까라는 생각에 아쉬움을 마쿠라자키역에 묻어두고, 다시 출발하기로 하였다. 


본격적인 출발 전에 역 주변 편의점에서 보급품을 사고, 목적지를 헬씨랜드로 맞춰놓은 후, 힘찬 페달링을 하며 앞으로 나아갔다. 

마쿠라자키에서 이부스키까지 가는 길은 중간중간 오르막과 내리막이 있긴 해도 전반적으로는 평지라 크게 힘들진 않았다. 빨리 가서 모래찜질을 하고 싶다는 생각에 페달링을 힘껏 했는지 오히려 마쿠라자키로 이동할 때보다도 이동 속도가 빨랐다.  

한 15km 정도 달렸나, 저 멀리 봉긋 솟은 산이 하나 보였다. 자세히 보니 가이몬다케였다. '사쓰마의 후지' 가이몬다케를 보니 미미토패스 전망소에서 마쿠라자키를 보면서 느꼈던 거처럼, 나도 모르게 전투력이 상승되었고 내가 곧 정복하겠노라라는 생각에 페달링에 좀 더 힘이 들어갔다. 


자판기가 보이길래 물도 살 겸 잠시 쉬었다 가기로 하였다. 목을 축이고 다시 출발하였는데 얼마 안돼 자전거가 뭔가 이상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페달링 한 만큼 자전거가 잘 나가지도 않고 뒷바퀴도 울렁거렸다. 설마 타이어에 펑크가 났나 싶어 불안한 마음을 안고 길가에 자전거를 세워 뒷바퀴를 확인해보니 아니나 다를까 정말 펑크가 난 것이었다. 라이딩하면서 흔히 있는 일이긴 하지만, 그래도 타이어에 손상이 안 가게 하려고 조심히 탓건만, 왜 하필 이 시점에 펑크가 난 건지 야속하게 느껴졌다. 

혹시 모를 펑크에 대비해 여분의 튜브를 가져온지라 교체한 후 다시 출발하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교체하는 동안 지체되는 시간 때문에 일정이 계획대로 안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갑자기 짜증이 확 밀려왔다. 


현재 시각은 오후 4시 반, 헬씨랜드까지는 약 20km. 일단 숨을 고른 후 이 상황을 어떻게 극복할지 생각해보았다. 우선, 튜브 교체라는 옵션밖에 없다면 당연히 지금 당장 튜브 교체 작업에 들어가는 게 맞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내가 있는 도로 옆으로 기차 노선이 있고 인근에 기차역이 있어, 튜브 교체 없이 바로 기차점프를 할 수 있는 옵션이 하나 있었다. 반대로 튜브 교체 후 계획대로 헬씨랜드까지 옵션도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했을 시 교체 소요 시간과 이동 시간을 고려했을 때 헬씨랜드에 도착했을 때는 너무 늦어 모래찜질을 못할 수도 있는 리스크가 있고, 튜브 교체를 해도 타이어는 여전히 찢어져 있는 상태인 거라 이동 중에 또다시 펑크가 난다면 오히려 교체 작업을 안 한 만 못한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었다. 고민 끝에 오늘 마무리를 검은 모래찜질로 못하는 아쉽지만 다음을 기약하는 것으로 하고, 인근에 있는 기차역으로 이동해서 거기서 바로 가고시마로 이동하기로 하였다.  


구글 맵에 확인해보니, 현재 내가 있는 위치에서 가장 가까운 역은 1.3km 떨어져 있는 고료역(御領駅)이었다. 신발을 운동화로 갈아 신은 후 자전거를 끌고 고료역으로 향하였다. 고료역 이정표가 나와 길 안쪽으로 들어서는데 가이몬다케 모습이 보였다. 말머리를 돌려 후퇴하는 장수가 된 거 같은 씁쓸한 마음이었는데 이번엔 그냥 돌아가지만 다음번엔 꼭 가겠노라 다짐을 하며 역으로 향하였다. 

위치 상으로는 주변에 역사가 보여야 하는데 아무리 찾아봐도 건물이 보이지 않았다. 분명 이정표를 보고 들어왔는데 잘못 들어왔나 주변을 살피다가 '고료'라고 쓰여있는 안내판이 보였다. 자전거 분해 패킹을 하려면 아무래도 건물 안에서 하는 게 나을 거 같아 안내판 뒤쪽으로 건물이 있나 하고 그쪽으로 가보았다. 

하지만, 안내판을 돌자마자 보이는 광경을 보고, '이게 역이라고?!' 나도 모르게 소리칠 뻔할 정도로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아무리 시골이라도 그렇지 건물 하나 없이 버스 정류장처럼 승강 플랫폼이 달랑 하나 있었는데, 여기가 기차가 지나가고 타고 내리는 사람들은 정말 있는 곳인지 불안감이 밀려오기 시작하였다. 주변 분위기도 공포 체험장 같이 뭔가 음산했는데 그나마 밝을 때 와서 망정이지 어두컴컴할 때 펑크가 나서 이 곳에 왔었다면 적지 않은 충격에 진짜 멘붕이 왔겠다 싶었다. 


현재 시각은 5시, 구글맵에서 5시 20분에 가고시마행 기차가 온다고 하여 서둘러 자전거 분해 패킹을 끝낸 후 승강장 앞쪽으로 이동하였다. 승강장에 기차 시간표와 노선 정보가 있길래 쓱 보고 있는데 뭔가 느낌이 이상하였다. 자세히 보니 5시 20분 기차는 없고, 여기서 마쿠라자키역으로 가는 기차는 5시 56분에 있고, 가고시마중앙역으로 가는 기차는 7시 4분에 있다고 쓰여 있었다. 구글맵을 다시 확인하니 내가 출발지 설정을 가고시마중앙역으로 잘못해서 엉뚱한 정보를 봤던 것이었다.

다시 습격한 멘붕에 여기서 2시간이나 넋 놓고 기다려야 하나, 7시면 어둡고 꽤 쌀쌀 해질 텐데 계속 여기에 있어도 되려나 또다시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시간표를 다시 자세히 보니, 기차 노선도 단선이고 시간 상 여기서 마쿠라자키역으로 갔던 기차가 다시 이쪽으로 와서 가고시마까지 가는 구조인 거 같았다. 차라리 5시 56분 기차를 타서 마쿠라자키역까지 갔다가 거기서 다시 가고시마중앙역으로 가는 게, 이왕 같은 시간 소모하는 거 기차 안이 덜 춥고 안락할 거 같아, 머지않아 들어오는 56분 마쿠라자키행 기차를 타기로 하였다. 


기차가 들어오길 기다리고 있는데 어떤 아저씨 한 분이 플랫폼 안으로 오셨다. 그분을 보고 여기서 사람이 타긴 타는구나, 현지인이 왔으니 기차도 오긴 오겠구나라는 생각에 다행이다 싶었다. 이 분도 이런 곳에 자전거 복장을 하고 있는 젊은이가 있는 게 신기해 보이셨는지 먼저 인사를 하시면서 어디서 왔는지 어디로 가는지 물어보셨다. 본인은 은퇴 후 고료역 주변에서 가드닝 일을 하고 있고 집이 마쿠로자키라 기차로 출퇴근을 하신다고 하셨다. 영어를 꽤 하셨는데 현역 때는 해외 수산자원 조사 업무를 했었는데 업무 차 인도네시아나 파퓨아뉴기니 같은 동남아 출장을 많이 다녔다고 하셨다.


5시 56분이 되니 저 멀리 경적음을 내며 기차가 들어왔다. 아직 끝이 아니긴 했지만, 그래도 이 기차 안에 계속 있으면 어찌 됐건 가고시마까지는 무사히 갈 수 있겠구나라는 생각에 긴장이 쓱 풀리기 시작하였다. 기차 안에서도 아저씨와 계속 얘기를 나눴는데 너무 친절하게 관심을 가져주셔서 부담스럽긴 했지만, 덕분에 마쿠라자키역까지 가는 내내 심심하진 않았다. 


30여분 달린 끝에 마쿠라자키역에 도착하였다. 기차가 다시 출발하기 전까지 잠깐의 텀이 있어 기차에서 내려 아저씨와 작별 인사를 한 후 기차에 몸을 실었다. 불과 3시간 전만 해도 마쿠라자키에 또 언제 오겠냐면서 이 곳을 떠났는데, 이렇게 다시 이 곳에 돌아올 줄 누가 알았겠냐라는 생각에 뭔가 허탈하였다. 만약 이부스키로 가지 않고 그냥 마쿠라자키 주변을 둘러보다가 바로 여기서 기차점프를 했으면 어땠을까 그럼 지금 이 기차를 탔으려나, 이부스키까지 라이딩하는 것으로 일정 마무리하는 것이 무리스러운 일정은 아니었지만 막상 결과적으로 이렇게 되니 내가 너무 욕심을 냈나 좀 더 여유 있게 일정을 짤 거 그랬나라는 여러 생각들이 교차하였다. 이번 펑크 사건을 통해 한 번에 여러 개를 급하게 하려고 하지 말고, 늦더라도 가끔은 천천히 한 두 개에 집중하면서 앞으로 나아가는 것도 필요하겠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다시 기차는 가고시마를 향해 출발하였다. 30분 정도 간 후 고료역에 정차하였다. 승강장에 불은 켜져 있었으나 주변이 어둡고 날도 추워 아까 마쿠라자키행 기차를 안 타고 지금까지 여기서 기다렸다면 무슨 탈이라도 났었겠구나 싶었다.  

가고시마에 도착하기를 목이 빠지게 기다리고 있는데 기차의 종착지가 가고시마중앙역이 아닌 야마카와역(山川駅)으로 되어 있었다. 이건 또 뭐지라며 구글맵을 다시 검색해보니 마쿠라자키역에서 7시에 출발하는 기차는 야마카와역까지만 운행하고 거기서 다른 기차로 환승을 해서 가고시마로 가야 하는 것이었다. 가고시마까지 가기 참 힘드네라며, 야마카와역에 도착한 후 반대편 플랫폼으로 이동해 가고시마중앙역으로 가는 기차에 다시 몸을 실었다. 


지금부터는 이대로 시간만 지나간다면 가고시마중앙역에 도착이었다. 이동하는 동안 어둡지만 창밖을 응시하며 이번 1박 2일 여정을 돌이켜보았다. 아름다웠던 서부 해안 절경, 투르드미나미사쓰마 대회 코스 라이딩, 미나미사쓰마 해도 8경, 생각지도 못했던 타이어펑크, 음산했던 고료역, 기차점프 등등 고되긴 했지만 인생에 남을 만한 돈 주고도 살 수 없는 값진 경험을 한 거 같아 뿌듯하고 만족스러웠다. 


고료역에서 시작한 약 2시간 반 동안의 의도치 않은 '기차여행' 끝에 마침내 가고시마중앙역에 도착하였다. 이틀밖에 안됐지만 가고시마에 다시 오니 마치 집에 돌아온 거 같이 반가웠다. 

타이어 펑크로 자전거를 타고 갈 수 없어 가고시마중앙역에서 트램을 타고 텐몬칸으로 이동하기로 하였다. 오늘 여정이 고됐는지 손에 들고 있는 자전거가 천근만근처럼 무겁게 느껴졌다. 


자전거와의 마지막 사투 끝에 텐몬칸 호텔로 복귀하였다. 방에 들어오니 이제야 비로소 다 끝났구나라는 생각에 피곤함이 물밀듯 밀려왔다. 그래도 이 순간을 치하하지 않고 그냥 보내긴 아쉬워 편의점에 가서 맥주와 안주류를 사서 먹기로 하였다. 

맥주를 한잔하며 방 안을 둘러보았다. 처음에는 불만 가득했던 호텔 방이 이제는 진짜 내 방처럼 편안하고 일과를 마무리하고 돌아갈 수 있는 소중한 공간이 된 거 같아 묘한 기분이 들었다.


내일은 새벽부터 일전에 예약해둔 가고시마 수산시장 투어를 하는 날이다. 오늘따라 기분이 좋아 그런지 맥주가 술술 넘어갔으나 내일을 위해 늦지 않게 잠자리에 들기로 하였다.  

작가의 이전글 일본 가고시마 한 달 살기 : Day17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