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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어썸준 Oct 02. 2020

일본 가고시마 한 달 살기 : Day21

복잡미묘한 감정이 교차했던 니시오야마역, 다음을 기약하기로 한 모래찜질

2019.4.8 (월)


가고시마 '육지' 라이딩 플랜의 마지막 퍼즐인 이부스키로 출격하는 날의 아침이 밝았다. 가고시마에서 한 달 살기를 하기로 결정하고 가고시마현 지도를 보면서 어느 지역을 라이딩할지 고민했던 게 불과 한 달 전인데, 지난 20일 동안 사쿠라지마, 카노야, 지란, 미야마, 이치끼쿠시쿠노, 기리시마, 카사사, 마쿠라자키 지역에 이어, '육지'에서 계획했던 마지막 남은 지역인 이부스키로 라이딩을 나선다고 하니, 언제 그 많은 곳을 갔다 왔나 싶기도 하고, 오늘 라이딩이 끝나면 '육지' 라이딩은 미션 클리어구나라는 생각에 뿌듯하기도 하다가, 반대로 곧 그 얘기는 여행의 막바지를 향해간다는 뜻이기도 해 아쉽기도 하다가 출발 전 아침부터 만감이 교차하였다. 


이번 이부스키 라이딩은 가고시마중앙역에서 이부스키역으로 기차점프를 한 후, 이부스키역에서부터 북동쪽에 위치한 치린가시마섬(知林ヶ島)을 시작으로 사쓰마 덴쇼칸 박물관(薩摩伝承館), 이와사키 미술관(岩崎美術館), JR 최남단역인 니시오야마역(西大山駅), 이케다 호수(池田湖)를 둘러보고, 마지막에 지난번 라이딩 때 타이어 펑크로 가지 못했던 헬씨랜드에서 검은 모래찜질을 한 후, 다시 이부스키역으로 돌아와 가고시마중앙역으로 기차점프를 하는 일정이다. 그리고 식사는 라이딩 상황을 보면서 이부스키 지역 명물인 회전소바와 온타마란동을 맛볼 예정이다.  


오전 9시 20분에 출발하는 이부스키행 기차를 타기 위해, 나갈 채비를 모두 마친 후 조금 여유 있게 8시 반 경에 호텔을 나섰다. 

중앙역으로 가는 길에 벚꽃 구경도 할 겸 고쓰키 강변 쪽을 지나갔다. 주말 동안 많은 인파들이 하나미를 즐기다 갔다는 걸 증명이라도 하듯 공원 구석 한편에는 많은 양의 쓰레기들이 쌓여 있었다. 벚나무에 푸른 새싹들이 조금씩 나와 있는 걸 봐선 곧 머지않아 질 거 같긴 하나 그래도 푸른 하늘 아래 활짝 피어있는 벚꽃들은 여전히 아름다웠다.   


역에 도착해서 자전거 분해 및 패킹을 마치고 승강장으로 이동하였다. 가고시마 시내 쪽이 아닌 교외 밖으로 나가는 방향이라 출근(등교) 시간대에는 사람들이 별로 없을 줄 알았는데, 의외로 꽤 많은 사람들이 승강장에서 이부스키행 기차를 기다리고 있었다.

열차 출발 시간이 거의 다 될 때쯤 반대 방향에서 기차 한 대가 들어오고 있는데, 역무원이 누군가와 무전을 긴박하게 주고받으며 부산하게 움직였다. 무슨 사고라도 났나 싶어 유심히 살펴보았는데, 승강장에 도착한 기차 문이 열리자 역무원이 발판을 깔고 차내에 휠체어를 탄 사람이 안전하게 하차할 수 있게 도와주는 것이었다. 아까 그 무전은 몇 번 칸에 도움이 필요한 휠체어 승객이 있으니 도착 예정 시간에 맞춰 대기해달라고 하는 기관사의 요청이지 않았나 싶었다. 교통 약자에 대한 배려가 제도적으로  촘촘하게 잘 갖춰져 있는 거 같아 인상적이었고, 우리도 벤치마킹하면 좋을 거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정시에 기차는 이부스키를 향해 힘찬 출발을 하였다. 출발한 지 20분 정도 지나 사카노우에((坂之上)라는 역에 도착하였는데, 기차 안을 가득 메우고 있던 젊은이들이 이 역에서 우르르 내렸다. 주변에 뭐가 있나 하고 지도를 찾아보니 가고시마 국제대학(鹿児島国際大学)이 역 주변에 있는 것이다. 가고시마 시내 반대 방향인데 아침부터 어딜 가는 사람들일까, 다들 이부스키로 가는 거 같지는 않은데 하는 나의 궁금증은 이들이 가고시마 국제대학으로 등교하는 대학생이었다는 것으로 풀리게 되었다.

사카노우에역에서 학생들이 내리고 나니 기차 안은 한산 해졌다. 기차는 얼마 안 있어 해안으로 접어든 후 226번 국도 옆을 따라 유유히 남쪽으로 달렸다. 저번에 이부스키에서 가고시마로 기차 타고 올 때는 어두워서 몰랐는데, 기차 창문 너머로 보이는 반짝이는 바다를 바라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았고, 처컥처컥하며 달리는 기차 레일 소리마저도 뭔가 낭만적으로 다가왔다.  


1시간 20여분 정도 지나 마침내 이부스키역에 도착하였다. 달력 일자가 하루하루 앞으로 갈수록 점점 따뜻해지는 게 당연한 이치지만, 가고시마보다 위도가 좀 더 아래라 그런지 날도 좀 더 따뜻한 거 같고 햇살도 더 강렬하게 느껴졌다.  


자전거 조립 및 출발 준비를 마친 후, 오늘의 첫 번째 행선지인 치린가시마섬으로 출발하였다.

따스한 햇살 아래 산들산들 부는 바람을 맞으며 자전거를 타니 기분이 좋았고, 잘 포장된 깨끗한 도로 위를 달리니 더욱더 달릴 맛이 났다. 아무리 시골이라도 잘 정비된 도로 하나가 그곳을 전혀 시골로 느껴지지 않게 하고, 오히려 그곳의 격을 높여 다시금 찾고 싶게끔 만들 수 있구나를 다시 한번 느낄 수 있었다. 


치린가시마섬에 거의 다다렀을 때 왼편으로 웬 골프 코스가 보였다. 자세히 보니 노인분들이 잘 관리된 잔디밭 위에서 게이트볼을 즐기시고 계셨는데, 이부스키가 PGA를 개최하는 곳이라 그런지 몰라도, 게이트볼을 즐기는 주변 환경이나 게임에 임하는 노인분들의 옷차림이나 이동하는 모습이 다른 지역보다는 왠지 좀 더 격식 있어 보였다. 

게이트볼을 즐기는 친구들끼리 활짝 웃으면서 얘기하시는 모습을 보면서, 몸에 무리가 가지 않는 선에서 적절히 운동을 하면서 건강도 챙기고, 같이 운동하는 친구들끼리 교제를 하면서 노년의 고독함에서 벗어날 수도 있을 거 같아, 저것이 건강하고 이상적인 노후 생활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다시 한번 하게 되었다. 

노인 복지에 그리 대단한 게 필요할 거 같지는 않았다. 게이트볼이던 아니던 종목을 떠나, 우리도 노인분들이 동네 주변에서 쉽고 재밌게 운동하면서 사람들과 교류를 할 수 있는 인프라 구축과 행정적 지원이 좀 더 체계적으로 이뤄지면 좋을 거 같다는 생각을 해보았다.  


치린가시마섬 주변에 도착하였다. 치린가시마섬은 무인도로 썰물 때 물이 빠지면 육지와 연결되는 길이 생기는데, 육지와 섬이 연결된다는 점에서 연인들의 연분을 맺어주는 장소로 유명하다고 한다. 이 정도로 유명한 곳이면 당연히 섬 쪽으로 바로 갈 수 있는 도로가 있을 거 같은데 주변을 한참 둘러봐도 그 길이 보이지 않았다. 잠시 정차해서 지도를 살펴보니, 바로 가는 길은 없었고 에코 캠핑 그라운드(指宿エコキャンプ場)라는 곳을 관통해야만 섬으로 향할 수 있었다.


캠핑장 안쪽으로 들어간 후 섬으로 향하는 입구 주변에 자전거를 대고 백사장 쪽으로 나가보았다. 섬까지 연결되어 있는 길의 형태가 어렴풋이 보이긴 했으나 아직 길이 열릴 시간대가 아닌지 물이 빠지지 않아 건너갈 순 없었다. 뭔가 그 길을 기준으로 양 옆의 바다가 서로 다른 바다인 거처럼 분리되어 보이는 게 신기하였다. 치린기사마섬을 바라보며 우리나라에 견우직녀 설화가 있는 거처럼 왠지 일본에도 이 곳을 배경으로 한 남녀 간의 애틋한 사랑을 다룬 설화가 있지 않을까 하는 재밌는 상상을 해본 후 치린기사마를 뒤로 한 채 다시 캠핑장 쪽으로 나왔다. 


생각보다 캠핑장 부지가 꽤 넓어 안 쪽에 뭐가 있나 쓱 둘러보았다. 텐트가 쳐져 있는 곳이 있어 그쪽으로 가보았는데, 현지인은 아니고 백인 커플이 일광욕을 즐기고 있었다. 내가 먼저 인사를 하면서 한국에서 왔고 한 달 동안 가고시마에서 거주하면서 자전거를 타고 있다고 하니, 자기들은 오스트리아에서 왔고 캠핑카로 일본 전역을 돌고 있다고 하였다. 캠핑카 핸들이 왼쪽에 있는 걸 봐선 일본 밖에서 차를 가져왔고 꽤 장기간 캠핑 여행을 하고 있다는 얘기인데, 역시 여행 문화나 인생을 대하는 가치관이 우리와는 다르구나를 느낄 수 있었다. 

이들과 작별 인사를 하고 캠핑장 주변을 다시 쭉 둘러봤는데, 나도 캠핑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주변이 아름답고 힐링하기 좋은 곳이었다. 

사실 개인적으로 예전에는 일본 하면 지진, 쓰나미, 화산과 같은 자연재해가 많은 '불운한 섬 나라'라는 인식이 없지 않았다. 하지만 이번 여행을 통해 느낀 것은 그것을 반대로 생각해보면, 일본은 그러한 자연재해가 있게 한 주체인 산과 바다라는 자연 자원이 그만큼 풍부한 '축복받은 나라'지 않을까, 그 자원을 방치하지 않고 개발과 관리를 잘하고 있는 관광대국이 아닐까 하는 것이었다. 

지역 경제 활성화의 핵심 요소가 관광자원이라고 했을 때, 아무리 일본 경제가 장기침체를 겪고 있다고 해도 이 관광자원 때문이라도 일본은 망하지 않고 오래가겠구나 싶었고, 결국 우리도 지속적인 성장을 하려면 지역에 있는 우리의 아름다운 자연 자원을 잘 개발하고 활용해 그것을 관광 상품화하는 것이 정말 중요하고 필요하겠구나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강타하였다.  


에코 캠핑 그라운드를 빠져나와 약 1.5km 정도 남쪽으로 이동해 사쓰마 덴쇼칸(薩摩伝承館) 박물관에 도착하였다. 사쓰마 덴쇼칸은 하쿠스이칸(指宿白水館) 호텔 바로 옆에 위치해 있는데, 이 곳은 에도 시대 말기부터 메이지 시대까지 일본 근대화에 중요한 역할을 한 사쓰마 지역(현 가고시마)의 역사를 볼 수 있는 박물관으로, 하쿠스이칸에서 지난 60년 이상 동안 사쓰마 자기를 포함해 수집한 3,000여 점 정도의 사쓰마 관련 유물들이 이 곳에 전시되어 있다고 한다. 

박물관 건물을 처음 봤을 때는 외관이 우리나라 기와집과 느낌이 비슷해 의아했는데, 자세히 보니 디테일은 일본 느낌이었다. 한국과 일본 건축의 특징을 융합해놓을 거 같아 친근한 거 같으면서도 이색적으로 느껴졌는데 분위기는 역사박물관이라 그런지 뭔가 절제되고 위압적이었다.


자전거를 주차한 후 박물관 입구에서 입장권을 구매하였다. 한국에서 왔다고 하니 직원분이 배우 이병헌 씨도 여기 왔다 갔다면서 친근하게 응대해주셨다.  

1층 메인 홀에는 사쓰마 자기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전시되어 있는 사쓰마 자기들도 아름다웠지만, 무엇보다 뭔가 넘볼 수 없을 거 같은 고급스럽고 압도적인 실내 분위기가 인상적이었는데, 그러한 분위기 때문인지 전시되어 있는 작품들도 좀 더 있어 보이고 가치 있게 느껴졌다. 실내 건축 디자인에서도 관람 오감을 자극한다는 면에서 우리보다는 좀 더 디테일하고 세심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2층에 사쓰마 자기 역사에 대한 컨텐츠는 지난번 센간엔 쇼코슈세이칸에서 느꼈던 거처럼 보고 나서 기분이 몹시 좋지 않았다. 조선에서 잡아온 도공으로부터 시작한 사쓰마 자기가 에도시대를 거쳐 한 층 더 진화했다는 내용이 있었는데, 뭐 맞는 내용이긴 하나 느껴지는 뉘앙스에서 조선에 있었으면 그저 그랬을 기술이지만 우리니깐 그 기술을 한층 더 진화시켜 세계 도자기 시장으로 나갈 수 있었다, 조선은 기술이 있어도 활용하지 못했을 테니 우리가 그 기술을 가져와 사용한 건 전혀 잘못이 아니다, 고로 조선의 것은 우리 마음대로 해도 전혀 문제 되지 않는다, 조선(한국)은 우리보다 아래다라는 인식이 들게 끔 교묘하게 설명을 해놨기 때문이었다. 특히, 동양 역사를 잘 모르는 서양인들 눈에는 더 그렇게 느껴질 거 같았는데, 내가 예민하게 반응하는걸 수도 있겠지만, 일본이 이런 인식 자체를 갖지 못하도록 과거의 교훈을 잊지 않고 일본보다 더 강한 나라가 돼야겠다는 생각을 여기서 또 다시금 하게 되었다. 


씁쓸하면서도 비장한 마음가짐을 한 채 박물관을 나와, 하쿠스이칸을 둘러보기로 하였다. 하쿠스이칸은 내국인뿐만 아니라 외국인들도 숙박하길 선호하는 유명 전통 료칸이기도 하지만, 우리에게는 2004년에 노무현 대통령과 고이즈미 총리가 한일 정상회담을 한 곳으로도 잘 알려져 있는 곳이다. 한일 정상회담이 진행되었된 역사적인 장소라 하루 묵어보고 싶긴 했으나 일정상 여의치 않아 다음을 기약하기로 하고, 이번에는 호텔 내외부만 둘러보기로 하였다. 마침 아까 박물관 입장권 구매 시 호텔 커피 1잔 무료 이용권을 받은 게 있어, 먼저 커피 한잔할 겸 1층 카페로 이동하였다.


호텔 내부는 시설이 오래돼 보이긴 했으나 이 곳의 역사와 전통에 걸맞게 격조 있고 고풍스러웠다. 커피 한잔을 하며 창문 너머 잘 조경된 정원을 바라보면서, 당시 한일 정상 간 오갔던 주요 안건에 대해 찾아보았다. 북핵 문제 해결을 위한 한일(한미일) 공조, 한일 FTA 체결 시 범위와 조건, 과거사 문제, 양국 우호 증진 및 교류 활성화를 위한 항구적 비자면제 추진, 김포-하네다 항공기 증편 등에 대한 논의가 이뤄졌다고 하는데, 그로부터 15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 되돌아봤을 때, 우리 국민들의 일본 왕래를 위한 문턱은 현저히 낮아졌으나 여전히 양국 간 정치, 경제적인 사안에 대해서는 제자리거나 오히려 후퇴한 건 아닌가 싶었다. 한국과 일본은 가깝지만 여전히 아직은 먼 나라구나하는 생각이 들다가도, 하긴 양국 간의 역사가 있는데 하루아침에 바뀌면 그게 더 이상하겠네라는 생각도 들었다.


차를 마신 후 하쿠스이칸 정원 주변을 둘러보기 위해 밖으로 나갔다. 해안로에서 북쪽으로 바라보이는 치린가시마섬 뿐만 아니라 남쪽으로 해안선을 따라 들어선 건물들이 바다와 잘 어울려 멋진 광경을 연출하고 있었고, 정원 옆에 설치된 수영장, 벤치, 해먹 등도 이 곳의 평온하고 여유로운 분위기를 한 껏 더 살리고 있었다.  

다시 호텔 건물로 돌아가는 길에 아까 정상회담 기사를 검색하다가 본 양국 정상이 담소를 나눈 사진 속 배경을 찾게 되었다. 반가운 마음에 잠시 그곳을 둘러보았는데, 당시 양국 정상이 이 곳에서 어떠한 대화를 나눴을까, 회담 안건 내용들과 같이 곱씹어보며 잠시 상상을 해보았다. 


호텔을 나와 출발 채비를 하였다. 시간을 보니 벌써 오후 1시 반이 넘었다. 기사 검색에 호텔 주변 구경까지 하다 보니 하쿠이스칸에서 계획했던 것보다 많은 시간을 보낸 것이었다. 

다음 목적지는 하쿠이스칸에서 남쪽으로 5km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한 이와사키 미술관(岩崎美術館)인데, 이동 시간 단축을 위해 속도감 있게 이동하기로 하였다. 


20여분 정도 달려 이와사키 미술관에 도착하였다. 미술관은 이와사키 호텔 인근에 위치해 있었는데, 이와사키 호텔 창업자인 이와사키 요하치로가 평생 수집해 온 해외뿐만 아니라 가고시마 출신 작가들의 다양한 작품들을 전시해놓은 곳이라고 한다. 


오래되고 살짝 촌스러워 보이는 호텔과는 달리 미술관 외관은 모던하고 감각적이었다. 월요일 낮 시간이라 그런지 방문객이 한 명도 없어 마치 미술관 전체를 전세 낸 거 마냥 혼자 여유 있게 작품들을 둘러볼 수 있었는데, 둘러보는 동안 작품 앞 쪽에 의자와 쇼파들이 비치되어 있는 걸 보고 관람객들이 편하게 앉아 오랜 시간 작품에 몰입할 수 있게 배려한 것이 인상적이었다. 

관람 마지막 즈음에는 이와사키 요하치로에 대한 인물 소개를 보고 감동을 받았다. 개인이 다양한 장르의 작품을 수집하고 미술관까지 만들어 수집한 작품을 일반에게 공개하는 것도 아무나 할 수 없는 대단한 일인데, 미술관을 설립한 취지가 가고시마 출신으로 가고시마 지역을 홍보하고 발전하는데 기여하기 위함이라는 것이었다. 평소에 생각해보지 못한 것이라 그의 취지가 남다르고 멋있게 느껴졌고, 나도 나중에 내 고향의 홍보와 발전에 조금이라도 기여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겠다는 다짐도 하게 되었다.  


미술관을 둘러보고 나오니 오후 2시 반이었다. 슬슬 허기가 지기 시작해, 점심 식사로 정해놓은 '도센쿄 소멘나가시'라고 하는 회전 소바집으로 바로 갈까 했으나, 지도를 보니 JR 최남단역 니시오시마역에 먼저 들렀다 가는 것이 이동 경로 상 효율적일 거 같았다. 우선은 에너지 젤리로 간단하게 허기를 달랜 후 니시오야마역으로 라이딩을 시작하였다.  


미술관을 출발한 지 얼마 안돼 해안도로로 접어들었다. 햇살이 반짝이는 바다를 바라보며 바닷바람을 맞으며 시원하게 내달리는 맛이 끝내줬다. 

다시 내륙 쪽으로 접어들어 니시오야마역에 다다렀을 무렵, 저 멀리 사쓰마의 후지 가이몬다케가 보이기 시작하였다. 저번에는 타이어 펑크로 전장에서 후퇴하는 장수의 심정으로 가까이 가진 못했지만, 이번에는 반드시 정복하겠다는 마음으로 전투력을 불태우며 앞으로 속도감 있게 나아갔다. 점점 가까워질수록 점점 더 크게 다가오는 우뚝 솟은 가이몬다케가 멋있고 웅장하였다.  


40분쯤 달린 끝에 JR 최남단역 니시오야마역에 도착하였다. 여기도 고료역과 같이 역사도 없고 승강장 달랑 하나 있는 간이역이었지만, 'JR 최남단역'이라는 상징성 때문인지 주차장도 역 규모 치고는 꽤 컸고 역 소개 홍보물도 여기저기 잘 설치되어 있었다. 


자전거를 주차하고 승강장 쪽으로 이동하였다. 승강장에 서서 우뚝 솟은 가이몬다케, 그 아래 펼쳐져 있는 철로, 그리고 'JR 일본 최남단역'이라고 쓰여있는 설치물을 바라보고 있으니, 갑자기 심장이 요동치며 온 몸에 전율이 느껴지기 시작하였다.    

'가고시마 한 달 살기'라는 여행 계획 전에, 사실 처음에 구상했던 계획은 3개월 동안 일본 최남단에서 최북단까지 자전거로 일본 열도를 종단하는 것이었다. 열도 종단을 했었더라면 최남단에서의 시작점을 이 곳 니시오야마역으로 생각했었던 터라, 당시 여행 계획을 하며 찾아봤던 사진 속 니시오야마역을 실제로 보니 복잡 미묘한 생각들이 머릿속을 마구 스쳐갔다. 비록 현실적 제약 때문에 여행의 기간과 방향을 변경하긴 했지만, 내 인생 전체에서 그 3개월이 뭐라고 어찌 보면 나 스스로 만들어 놓은 제약 때문에 스스로 그 계획을 접은 건 아닐까 하는 후회 섞인 아쉬움이 들다가도, 그래도 현실적 제약을 무시할 수 없는 상황에서 이렇게 한 달 동안 자유롭게 여행하고 있는 게 어디냐, 게다가 로망으로 생각했던 여행의 시작점에 직접 이렇게 와보지 않았느냐며 그 씁쓸한 마음을 위로하다가도, 쉽게 얻을 수 있는 기회가 아닌 만큼 이번 여행에서 많은 것을 보고 느끼고 한국에 돌아가서도 그 기반 위에서 계속 성장할 수 있도록 더 열심히 살아야겠구나라는 다짐도 하게 되었다. 


니시오야역에서 나와 다시 전열을 가다듬고, 도센쿄 소멘나가시(唐船峡そうめん流し)를 향해 힘찬 페달링을 시작하였다. 가이몬다케 입구 방향으로 길을 따라 쭉 가다가 입구 삼거리에서 이케다 호수 방향으로 꺾어 올라가는 길이었다. 입구에 다다라서 산을 올려다봤을 때 뿜어져 나오는 위압감이 대단했는데, 이래서 사쓰마의 후지인가, 실제 후지산은 어떨까 하며 이동하였다. 


30여분 정도 달린 끝에 오후 4시쯤 도센쿄 소멘나가시에 도착하였다. 점심식사 시간대가 지나서 그런지 식당 내는 한산 하였다. 

식당 내에는 처음 방문하는 사람도 쉽게 주문할 수 있게 주문 절차에 대한 설명이 잘 되어 있었다. 1번 섹션에서 먼저 메뉴 선정 및 결제를 하고, 2번 섹션에 가서 결제한 영수증을 보여주면서 원하는 자리 번호를 얘기한 후, 그 자리에 가서 앉아 있으면 직원이 그곳으로 음식을 가져다주는 구조였다. 

자리에 앉은 후 얼마 안 있어 주문한 'A정식'이 나왔다. 물이 계속 회전할 수 있게 특별히 제작된 테이블에 앉아서 흐르는 차가운 물에 삶은 소면을 넣으면 그 소면이 물을 타고 계속 도는데 젓가락으로 돌고 있는 소면을 빠르게 건져 양념장에 담갔다가 먹는 방식이었다.   

소면이 차가운 물에 들어가 몇 바퀴 돌고 나와서 그런지 면발이 탱글탱글해 식감이 좋았고, 소면을 회전하는 물이 넣었다가 다시 건져 먹는 것도 재미있었다. 맛과 엔터테인먼트를 동시에 충족시킬 수 있는 거 같아 국내에서도 벤치마킹하면 괜찮을 거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식사를 마치고 나와 다음 목적지인 이케다 호수로 이동하기로 하였다. 하지만 구글맵에 목적지를 설정하고 있는데 예상치 못한 변수가 발생하였다. 휴대폰 배터리가 15%도 안 남아 있는 것이었다. 분명 보조배터리에 계속 충전을 하고 있었는데 왜 이러지 하면서 확인해보니 보조배터리의 배터리가 다 나가 있는 것이었다. 어제 완충한 줄 알았는데 연결이 제대로 안 됐었나, 출발 전에 왜 확인을 못했었을까, 휴대폰 구글맵 없이 오늘 남은 목적지를 잘 찾아갈 수 있을까 하는 짜증과 불안이 동시에 밀려왔다. 

한숨이 나왔지만 혼란스러운 마음을 잠시 진정시키고, 구글맵에서 남은 목적지들의 위치를 쭉 살펴보았다. 우선 여기서 이케다 호수까지는 외길이라 가는데 문제는 없을 거 같았고, 이케다 호수에서 헬씨랜드까지는 가는 길이 복잡하긴 하나 니시오야마역 주변에서 해안 쪽으로 빠지는 경로였다. 일단 지금은 휴대폰을 꺼놓고 지금까지 왔던 길을 잘 기억해놨다가 이따가 니시오야마역 주변에 다다르면 그때 다시 휴대폰을 켜서 헬씨랜드까지 가는 편이 낫겠다 싶었다. 

현재 시간은 4시 45분. 이동해야 하는 거리와 자전거 속도를 고려했을 때 헬씨랜드 영업시간 내에 도착하는 데는 문제가 없을 거 같았으나, 아무래도 내비게이션 도움이 없는 상황에서는 해가 떠 있을 때 이동하는 게 안전할 거 같아 최대한 빨리 달려 이케다 호수에 들렀다가 헬씨랜드로 이동하기로 하였다. 


긴장한 상태에서 라이딩을 해서 그런지 중간에 경사 높은 오르막이 있었음에도, 힘든 줄 모르고 꽤 빨리 이케다 호수를 전망할 수 있는 이케다 호수 공원에 도착하였다. 

규슈에서 가장 큰 규모의 호수라고 하고 지도 상에서도 면적이 상당해 크기가 엄청 날 줄 알았는데, 날이 맑아 호수 건너편이 선명하게 보여 가깝게 느껴져서 그런지 몰라도, 생각보다 그렇게 크지는 않았다. 그래도 전망과 분위기는 일품이었다. 호수와 호수 주변 나무 숲이 아름다웠고 바라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절로 마음이 편안해지고 힐링이 되는 느낌이었다. 


이케다 호수 공원에서는 오랜 시간을 보내지 않고 얼마 안 있어 헬씨랜드로 출발하였다. 

가이몬다케 입구를 지나 아까 지나왔던 길을 잘 떠올리며 니시오야마역 주변에 도착하였고, 거기서 핸드폰을 켠 후 구글맵에서 헬씨랜드를 목적지로 설정한 후에 안내 경로를 따라 헬씨랜드로 이동하였다. 니시오야마역에서 5km 정도 되는 그리 먼 거리는 아니었지만, 배터리가 방전되기 전에 최대한 빨리 도착해야 한다는 압박감과 해안 쪽에서 강하게 불어오는 맞바람으로 인한 체력 저하로 남은 5km가 50km처럼 멀고 지루하게 느껴졌다. 도착해서 모래찜질을 하면서 리커버리도 하고, 찜질하는 동안 휴대폰 배터리 충전도 부탁하면 되겠다는 생각 하나만 하면서 겨우겨우 헬씨랜드에 도착하였다. 


도착했을 때가 6시쯤이었는데, 무사히 도착한 것에 다시 마음의 평정을 되찾고, 7시 반 마감이니 1시간 정도만 하고 나오면 되겠다 하면서 자전거 주차 후 헬씨랜드 입구로 향하였다. 하지만 입구로 걸어가는 동안 뭔가 주변 분위기가 싸했다. 불길한 예감은 항상 적중한다고 설마 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입구에서 티켓을 구매하려고 보니 모래찜질은 이미 마감을 한 것이었다. 분명 7시 반에 닫는 것으로 확인했는데 도대체 무슨 일 일까 하고 구글에 들어가 다시 확인해보니 7시 반에 닫는 건 온천이고 모래찜질은 5시에 닫는다고 되어있었다. 

제대로 확인 못한 내 잘못이지 누굴 탓하랴며 마음을 진정하려고 했지만 밀려오는 허탈감은 어쩔 수 없었다. 오늘은 가이몬다케를 넘어 모래찜질까지 '정복'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설마 시간 착오로 못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며 땅을 쳐다보게 되었다. 한 숨을 내쉬는데 문득 지난번 타이어 펑크 때가 생각났다. 다시 생각해보니 타이어 펑크 없이 이 곳에 잘 도착했다고 해도 도착했을 때는 이미 5시가 넘었을 시간이라 그날도 결국 모래찜질을 못했을 운명이었던 것이었다. 그 때나 오늘이나 나와 모래찜질과는 연이 아닌가 하는 생각에 나도 모르게 허탈한 웃음을 짓게 되었다.  


모래찜질은 물 건너갔으니 이제 남은 일은 다시 이부스키역으로 돌아가는 것인데, 문제는 배터리가 거의 수명을 다했다는 것이었다. 이 곳에서 이부스키역까지 구글맵 도움 없이 어떻게 할까 고민하다가, 돌아가는 길이긴 해도 왔던 길을 잘 떠올려 다시 니시오야마역으로 간 후, 거기서 이부스키역까지 연결되어 있는 큰 도로인 226번 국도를 타고 쭉 가는 것이 가장 안전하고 확실한 방법일 거 같아 그렇게 하기로 하였다. 


헬씨랜드에서 출발해 226번 국도에 안착하였다. 이제 이 길만 쭉 따라가면 된다는 생각에 긴장했던 마음이 다소 안정은 됐으나 날도 점점 저물어 가고 몸도 점점 더 지쳐가 이부스키역까지 가는 길이 녹록치는 않았다. 


이부스키역에 도착하니 6시 40분이었다. 가고시마로 출발하는 기차는 7시 30분에 있었는데, 시간이 비기도 하고 역에 도착하기 전까지는 배가 고픈지도 몰랐는데 긴장이 풀려서인지 갑자기 배가 고프기도 해서 역 주변 식당에서 식사를 하기로 하였다.  

쵸쥬안(長寿庵)이라고 하는 소바 우동 전문점으로 갔다. 메뉴에 '온타마란동'이 있는 걸 보고, 이부스키역까지 오늘 길이 힘들어 온타마란동 존재를 잠시 잊고 있었는데, 이부스키에 왔으니 지역 명물을 맛보는 게 좋을 거 같아 온타마란동을 주문하였다. 온타마란동은 모래찜을 이용해 만든 온천 계란을 올린 덮밥으로 이부스키 지역에서만 맛볼 수 있는 음식이라고 하는데, 기대가 커서 그랬을 수도 있지만 면 전문점이라 그런지 이 곳 온타마란동 맛은 뭔가 특별하진 않았다. 그래도 출발 전에 허기를 달랠 수 있었으니 이만하면 됐다면서 자전거를 이끌고 다시 이부스키역으로 이동하였다. 


가고시마중앙역 행 기차에 몸을 싣었다. 이동하는 동안 오늘 있었던 이부스키 여정을 천천히 곱씹어보았다.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뭔가 많은 걸 한 거 같으면서도 하고 싶은 걸 다 하지는 못했던 만족과 아쉬움이 동시에 교차하는 그런 하루였던 거 같았다. 검은 모래찜질 리벤지는 언제 다시 해야 하나 머릿속으로 남은 일정 구상을 해보았다. 


가고시마중앙역에 도착해서 자전거를 다시 조립한 후 호텔로 이동하였다. 방에서 짐 정리를 하고 뜨거운 물에 샤워를 하고 나오니 몸이 쓱 풀리는 게 졸음이 급격히 밀려왔다. 

내일은 가고시마 시내에 있는 스토어들을 둘러보면서 체력도 회복하고, 아직 상세하게 정리하지 못한 타네가시마와 야쿠시마 여행 계획도 세워볼 예정이다. 타네가시마로 떠나기 전까지 이제 남은 일정은 3일, 시간이 지나가는 속도가 점점 더 빠르게 느껴지는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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