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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어썸준 Oct 03. 2020

일본 가고시마 한 달 살기 : Day23

맡은 바 최선을 다하는 개개인들이 모였을 때 비로소 저력이 나오다

2019.4.10 (수)


새벽 5시 20분, 어렴풋이 들려오는 알람 소리에, '이 새벽부터 무슨 소리지, 아 맞다 오늘 산에 가야 하는구나'라는 생각에 뒤척이다가 겨우 몸을 추스려 일어났다. 일어나자마자 가장 먼저 밖에 날씨를 확인하였다. 비가 오지 않고 있으면 바로 준비해서 가이몬다케 등산행을, 비가 오고 있으면 등산은 접고 검은 모래찜질만 하는 것이었다. 긴장되는 마음으로 창문을 열어 밖으로 손을 뻗쳐 보았는데, 비가 우두둑 내리고 있었다. 

한 번쯤은 틀릴 수도 있을 텐데 일기예보 한 번 정확하네라고 중얼거리며 밖을 바라보았다. 가이몬다케는 갑작스럽게 계획했던 거라 비가 오면 깔끔하게 접는 걸로 생각했었지만 막상 못 가게 되니 아쉽기도 하다가, 일어났을 때 컨디션이 생각보다 좋지 않아 갔었더라면 고생이었을 텐데 오히려 비가 오고 있는 게 잘 된 건가 싶기도 해, 이것이 불행인지 다행인지 모르겠다며 나도 모르게 미묘한 웃음을 짓게 되었다.

아무쪼록 등산은 물 건너갔고, 오전에 이부스키로 가서 검은 모래찜질만 하고 오후에 다시 가고시마로 돌아오는 일정으로 정해졌으니, 지금부터 준비해서 나가긴 너무 이르고 해서 두어 시간 정도 더 눈을 붙였다가 일어나기로 하였다. 


아침 8시 반, 다시 알람 소리에 잠이 깨 몸을 뒤척이다 일어났다. 긴 시간은 아니지만 그래도 몇 시간 더 잤다고 몸이 개운하였다. 

비가 올 경우 시나리오로 짠 오늘의 플랜 B는 다음과 같다. 가고시마중앙역에서 오전 10시 기차로 이부스키역으로 이동해서, 2번의 고배를 마셨던 헬씨랜드는 역에서부터 거리가 멀어 그곳이 아닌 이부스키역에서 가까운 사라쿠(砂楽)라는 곳에서 검은 모래찜질을 한 후, 지난번 제대로 맛을 보지 못했던 온타마란동을 다른 곳에서 한 번 더 먹어보고, 이부스키역 주변 지역을 둘러본 후에 기차로 이부스키역에서 타니야마역으로 이동해 '슈퍼돔'이라고 하는 야구 액티비티 시설에서 야구 배팅을 하고, 텐몬칸으로 돌아오는 일정이다. 그리고 가고시마-이부스키 간 기차 이동을 제외한 목적지 간 이동은 자전거로 할 예정이다. 


나갈 채비를 마친 후 9시가 조금 넘어 호텔을 나섰다. 새벽보다는 빗방울이 잦아들긴 했지만 여전히 비가 내리고 있었다. 비가 그쳤다면 가이몬다케 등산을 접은 것에 대해 잠깐이라도 아쉬워했으련만 쉽게 갤 거 같지 않은 거묵한 하늘을 보며 다행이라면서 중앙역으로 힘찬 페달링을 가하였다. 오늘은 장거리 라이딩이 아닌 단순 이동용으로 자전거를 타려다 보니 일반 옷차림으로 나섰는데, 입어야 하는 복장이나 챙겨야 할 장비들도 적고 속도나 이동거리 부담 없이 천천히 달려도 돼서 그런지, 이동할 때 몸과 마음이 홀가분하였다. 

오늘도 중앙역으로 향할 때 고쓰키 강변을 지나쳤다. 밤새 내린 비바람에 벚꽃잎들이 많이 떨어져 있었는데, 이제 벚꽃도 오늘내일이면 끝이겠구나 싶어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역에 도착해 자전거 분해 및 패킹을 마치고 승강장으로 이동하였다. 지난번과는 달리 학생들 대부분이 등교를 마친 시간이라 그런지 승강장 주변은 한산하였다. 


열차 문이 닫히고 기차는 이부스키를 향해 출발하였다. 두 번째 타는 이부스키행 기차라고 현재 위치가 어딘지 주변에 뭐가 있는지 바쁘게 찾아봤던 처음 때와는 달리, 심적으로 여유도 생기고 이동할 때 보이는 주변 풍경도 좀 더 익숙하게 느껴졌다

기차가 해안에 접어들자 자동으로 시선이 창문 너머로 고정되었다. 맑은 날 반짝거리는 바다가 아름다웠다면, 흐린 날 구름이 자욱한 바다는 운치가 있었다. 


이부스키에 거의 다다렀을 무렵, 일본인의 기차에서의 전화 예절을 보고 이들의 의식 수준에 감탄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건너편에 앉아 있던 여학생 휴대폰에 전화가 오자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기차 맨 끝으로 이동해서 작은 목소리로 말하면서 전화를 받는 것이었다. 순간 우리나라 지하철이나 버스 안에서 본인 사생활을 생중계하듯 큰 소리로 전화를 하는 사람들의 모습과 오버랩되었는데, 자리에서 작게 얘기해도 대단하다고 생각했을 텐데, 아예 자리를 이동해서 거기서도 심지어 작게 얘기하는 것을 보고, 남에게 폐를 끼쳐서는 안 된다는 교육을 어렸을 때부터 체계적으로 받았음을 볼 수 있었다. 우리도 어렸을 때부터 공공예절 나아가 인성 교육에 더욱 신경 쓸 필요가 있겠다 싶었다.  


11시 반쯤 이부스키역에 도착하였다. 비가 그치긴 했지만, 언제라도 다시 비가 내릴 듯 하늘은 여전히 흐렸다.


자전거를 조립하고 출발하려는데, 중국인 관광객들이 어디선가 안내 책자를 받고 우르르 나오길래 안에 뭐가 있나 하고 들어가 보니 이부스키 관광 안내소가 있었다. 역 주변에 혹시 미처 몰랐던 갈 만한 곳이 있는지 책자를 살펴본 후 나오는 길에 직원에게 추천해줄 만한 온타마란동 맛집이 있는지 여쭤보았다. 옆에 있는 직원과 잠깐 얘기를 나누더니 다 괜찮은데 본인은 '사츠마아지'라는 곳을 추천한다고 하여, 대략적인 식당 위치를 구글맵에서 확인 후 감사의 인사를 전하고 역 건물을 빠져나왔다.  

모래찜질 후 갈 식당 정보까지 확보하니 마음이 든든해졌다. 식당이 역 바로 주변에 있고 마침 사라쿠 모래찜질로 가는 길목에 있어, 식당 위치도 미리 확인하고 역 주변 지역도 둘러보기 위해 식당으로 먼저 향하기로 하였다. 


이부스키가 휴양지로 유명한 곳이라 역 주변 중심 상권은 뭔가 근사하고 사람들로 북적거릴 줄 알았는데, 예상외로 이 곳에 사람들은 있는지 장사는 하는지 의문이 들 정도로 거리가 횅하고 건물이나 시설물들도 방치된 거 같이 낙후되었다. 옛 것을 그대로 보존하고자 하는 이들의 의지인가, 그런 거 치고는 고풍스럽다기 보단 흉물스러운데 이렇게 해놓은 이유가 뭐지, 이부스키도 지방 소멸 앞에선 어쩔 수 없는 건가 하는 생각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사츠마아지(さつま味) 식당은 길가 바로 옆에 위치해 있어 찾는데 어려움은 없었다. 위치를 확인했으니 사라쿠 모래찜질로 가기 위해 구글맵에 목적지 설정을 하려고 하는데, 사라쿠가 '영업 종료'로 되어 있는 것이었다. 오늘 휴업이라는 건 못 봤는데, 설마 잘못 봤나 싶어 깊은숨을 들이마신 후 다시 확인해보았다. 다행히도 12시부터 1시 사이가 브레이크 타임이어서 영업 종료 나왔던 것이었다. 이제 막 12시가 됐는데 1시간 동안 주변을 배회하는 건 아닌 거 같아서, 여기서 먼저 식사를 하고 모래찜질을 하는 것으로 일정을 바꾸기로 하였다. 

식당으로 들어가는 길에 이 곳 점심 운영시간을 보니 오후 3시까지였다. 모래찜질을 하고 식사를 하러 왔더라면 반대로 여기 브레이크 타임에 걸려 온타란마동 맛을 못 볼 뻔했는데, 특히 지방 여행 일정 짤 때는 이동 경로뿐만 아니라 영업시간도 철저히 확인해야겠구나라는 것을 다시 한번 체감할 수 있었다. 구글맵 덕분에 순서는 바뀌었지만 다행히도 두 마리 토끼 다 놓치지 않게 되었다. 


식당에 들어가 바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대를 이어 가족이 운영하는 식당 같았는데, 주방에서 각자의 역할에 맡게 숙련된 자세로 재료 손질을 하시는 할아버지와 아저씨(아들)의 모습에서 무림의 고수 같은 포스가 느껴졌고 그로 인한 가게 내 공기의 무게감도 뭔가 다르게 느껴졌다. 주문 및 서빙을 담당하시는 할머니께서 내가 딱 봐도 내국인이 아닌 거처럼 보였는지 영어 메뉴를 건네주셨는데, 곧바로 온타마란동 하나를 주문하였다. 15분 정도 소요된다는 할머니의 말씀을 듣고 음식이 나오길 기다리고 있는데, 옆 자리 손님이 먹고 있는 스시도 먹음직스럽고 생선을 손질하는 주방장님의 스킬도 예사롭지 않아 보였다. 오늘 여기서 생선회를 먹지 않으면 왠지 나중에 후회할 거 같은 느낌이 확 들어 오늘의 추천 회를 여쭤본 후, 생선회도 추가로 주문을 하였다. 

온타마란동이 먼저 나왔다. 가운데 반숙 온천 계란이 있다는 걸 제외하고는 지난번 것과 다르게 재료가 생선회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왠지 온타마란동은 만들 때 정해진 재료가 있는 게 아니라 계란을 중심으로 가게 혹은 집집마다 그날 있는 재료를 얹어먹는 음식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음식이 그릇에 정갈하게 담겨 있어 만든 이의 정성을 느낄 수 있었는데, 활어가 아닌 절인 회를 계란, 밥과 같이 곁들여 먹는 것이 별미였다. 

곧이어 오늘의 추천 생선회도 나왔다. '하타'라고 우리로 치면 능성어라는 생선이었데, 맛이 깔끔하고 우리보다 회를 더 얇게 떠서 그런지 식감이 부드러웠다. 회와 같이 곁들이는 파, 붉은 와사비도 평소에 접하지 못했던 것들이라 색다른 생선회 맛을 경험할 수 있었다.  

점심식사 치고 지출이 좀 있긴 했으나, 돈이 아깝다기 보단 오히려 장인의 혼이 담긴 음식을 제대로 맛볼 수 있어서 만족스러웠다. 


기분 좋게 식당을 나와 자전거로 10여분 정도 이동해 사라쿠 모래찜질에 도착하였다. 이부스키는 세계적으로 드물게 천연 모래찜질을 할 수 있는 곳으로, 내륙의 원천에서 만들어진 뜨거운 지하수가 해안가로 흘러들어 모래를 뜨겁게 데우고 그 데워진 모래로 찜질을 하는 것이라고 하는데, 일반 온천 대비 혈액 순환이나 노폐물 배출 면에서 3배 이상의 효능을 갖고 있다고 한다. 

자전거를 주차하고 건물로 들어가는 길에 바닷가 쪽에서 쓱 불어오는 후덥지근한 공기 속에서 유황 냄새를 맡을 수 있었는데, 모래찜질이 어떨지에 대한 기대감과 궁금증이 한층 커졌다.  


1시 재개장 직전 시간대라 그런지 로비에는 재개장을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리셉션에서 입장권과 타월을 구매해서 탈의실로 이동한 후 모래찜질 때 입는 일본 전통 의상인 유카타로 옷을 갈아입고 야외 찜질장으로 이동하였다. 탈의실에서 찜질장까지는 이동 경로를 한눈에 알기 쉽게 벽면에 1번부터 순서대로 안내가 되어 있었다. 처음 와봤지만 어색함 없이 안내에 따라 자연스럽게 이동할 수 있어서, 역시 '디테일의 일본'이구나를 다시 한번 느낄 수 있었다. 


찜질장에 도착하였다. 직원분이 친절하게 맞아주시면서 찜질 자리로 안내해주셨다. 미리 어느 정도 모래를 파놓은 자리에 몸을 뉘우니 직원분들이 일사 분란하게 삽으로 모래를 떠서 몸 위에 뿌려주셨는데, 눈을 뜬 채로 몸 위에 모래가 점점 쌓여가는 기분이 뭔가 살짝 묘했다. 

찜질은 15분 정도 진행되었다. 뜨거운 모래가 무게감 있게 위에서 몸을 지그시 눌러주니 몸이 어딘가에 떠있는 거처럼 편안하였고, 얼굴에 땀도 송골송골 맺히는 게 찜질을 하고 났을 때 기분이 개운하였다. 


모래찜질의 목적지가 바뀌긴 했지만, 2전 3기 끝에 이부스키에서만 할 수 있는 특별한 경험을 할 수 있어 모래찜질만을 위해 이 곳에 다시 한번 더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고, 이부스키에서의 계획했던 일정도 모두 수행했구나라는 생각에 뭔가 뿌듯하면서 성취감도 들었다.  


온천탕에서 몸을 씻고 옷을 갈아입은 후, 매점에서 이부스키 온천수로 만들었다는 이부스키 사이다를 하나 사서 마셨다. 목이 타들어갈 때까지 들이켰는데, 목욕 후라 그런지 사이다의 청량감이 평소보다 더 좋게 느껴졌다.  


건물 밖으로 나오니 오후 2시 반이었다. 이부스키역에서 출발하는 가고시마행 기차는 4시쯤에 있어, 한 시간 정도 이부스키역 주변을 둘러보기로 하였다.

먼저 사라쿠 모래찜질에서 해안도로를 따라 북쪽 방향으로 이동하였다. 방파제와 그 주변으로 보이는 바다 모습이 우리나라 동해안 분위기와 놀라울 정도로 흡사하였는데, 바다를 보고 있으니 우리와 '가깝고도 먼 나라'가 아니라 '가깝고 친한 나라'가 될 수 있을 텐데 하는 안타까운 생각이 들었다.  

좀 더 올라가니 야쿠시마나 가고시마행 고속 페리를 탈 수 있는 터미널이 보여 잠깐 둘러보았다. 터미널이라고 하기에는 규모가 작은, 페리에서 타고 내릴 수 있는 승강장 수준의 규모였다. 페리 터미널을 보니 며칠 안 있어 떠날 타네가시마나 야쿠시마가 생각 나 기대감에 가슴이 뜨거워지기 시작하였다. 


북쪽으로는 더 이상 특별히 볼 게 없을 거 같아 역 쪽으로 방향을 틀기로 하였다. 가는 동안 이 곳에서도 주택과 주택 사이에 나 있는 골목길에 주차되어 있는 차를 단 한 대도 볼 수 없었는데, 시원하게 뻗어 있는 길과 깔끔하게 잘 정비되어 있는 동네를 보고 우리도 차고지 증명제 도입에 대해 진지하게 사회적 논의를 할 필요가 있겠다는 생각을 다시 한번 하게 되었다.   


역 남쪽에 위치한 주거지를 둘러보다가 우연히 소학교(초등학교)를 지나치게 되었다. 마침 하교 시간이라 교문을 나와 이동하는 학생들을 볼 수 있었는데, 교복을 입고 있진 않았지만, 하얀 모자에 동일한 형태의 가방을 메고 2명 이상 짝 지어 다니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요즘 우리 기준으로 봤을 때는 아이들의 개성이나 창의성을 방해하는 것으로 볼 수도 있겠지만, 오히려 학생이 학생답게 보여 보기 좋았고 아이들이 사회적으로 정한 규범을 따르는 것이 무엇인지 자연스럽게 익힐 수 있을 거 같아, 교육의 목적이 사회의 참구성원을 양성하는 것이라는 관점에서 봤을 때는 장기적으로 교육에 더 좋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해보았다. 


주변을 둘러보고 이부스키역으로 돌아와 타니야마행 표를 구매하였다. 자전거 분해 및 패킹 작업을 마친 후 탑승 전 시간이 조금 남아 역 앞에 무료로 이용할 수 있는 족욕탕에서 족욕을 하며 기다렸다. 이부스키 온천을 홍보하는 효과도 있고 기차가 오길 기다리는 관광객들의 지루함도 달래줄 수 있는 거 같아 괜찮은 아이디어다 싶었다. 


이부스키역에서 기차에 몸을 실은지 1시간 정도 지나 타니야마역에 도착하였다. 트램역과는 달리 타니야마 기차역은 지어진 지 얼마 안 됐는지, 건물 내부에서 가고시마 분위기와 어울리지 않게 대도시 느낌이 물씬 풍겼다. 중고등학생 하교 시간과 맞물려 역사 내에는 학생들로 북적거렸고, 그들을 픽업 나온 학부모님들도 뒤섞여 있었다. 역사 한 켠에서 어린 학생들의 뜨거운 시선을 받으며 자전거를 조립한 후, 슈퍼돔으로 이동하였다.  


슈퍼돔은 예전에 방문했던 아마미노사토 바로 옆에 위치해 있었다. 아마미사토 방문 시 큰 규모의 인도어(In-door) 야구 액티비티 시설이 있는 것을 보고, 평소 야구를 좋아하다 보니 일본의 야구 액티비티 시설은 어떤지 체험해보고 싶어 가고시마에 있는 동안 꼭 한 번 가봐야지 했었는데, 텐몬칸에서 이 곳까지 거리도 있고 아무래도 넓은 부지가 필요하다 보니 도심지역에는 시설이 없어 못 해보고 있다가, 여행 막바지 돼서야 발등에 불이 떨어져 비로소 오게 된 것이었다.  


주변에 자전거를 주차해놓고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야구만 할 수 있는 시설인 줄 알았는데 내부에는 야구 외에도 암벽 등반, 탁구, 포켓볼 등 다양한 스포츠를 즐길 수 있는 시설들도 함께 있었다.  

먼저 야구 배팅부터 해보기 위해 현금을 코인으로 바꾼 후 배팅 케이지 쪽으로 이동하였다. 역시 야구 강국답게 규모나 시설 수준 면에서 우리보다 앞서 있었다. 인상적이었던 것은 공이 날라 올 때 우리처럼 구멍에서 대포 쏘듯 공을 쏴주는 게 아니라, 공을 담고 있는 것이 아래에 있다가 위로 반 바퀴 회전하면서 공을 쏴줘 실제 사람이 던지는 거 같은 느낌을 주었는데, 실제와 비슷한 투타 환경을 구현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고심을 했는지 그 흔적을 엿볼 수 있었다. 또한, 비거리는 길지 않아도 '슈퍼돔'이라는 이름처럼 천장이 높아 타격 후 공이 날아가는 궤적도 주변 간섭 없이 볼 수 있어 실제 경기를 하는 거 같은 생동감도 느낄 수 있었다.    

신기하고 재밌어 배팅을 2번 더 하고, 건물 밖에 있는 볼 피칭도 해보았다. 볼 피칭은 국내에도 있는 것이라 새로운 것은 아니었는데, 재밌었던 건 실제 경기에서 투수 피칭 전에 포수가 투수에게 공을 던져주는 거처럼 왼쪽 아래 부분에서 매 투구마다 공을 쏴주는 것이었다. 공을 던져주는 인터벌도 꽤 짧아 속도감이 있게 빨리빨리 던져야 했는데 실제 경기를 하는 거 같은 긴장감도 들게 하였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배팅과 피칭을 즐겼는데, 국내에서도 시설 제조업체던 운영자던 이용자의 재미와 몰입감을 높여주는 이들의 디테일함을 벤치마킹 삼으면 좋겠다 싶었다. 또한, 우리도 미세먼지와 같이 자연환경적인 이슈로 인해 앞으로 다양한 스포츠나 엔터테인터먼트를 한 곳에서 즐길 수 있는 실내 복합 스포츠 시설에 대한 수요가 지금보다 더 늘어나지 않을까하는 생각도 하게 되었다. 


어느덧 오후 6시가 되었다. 슬슬 허기가 지기 시작했는데, 저녁은 텐몬칸 주변에서 먹는 게 좋을 거 같아 우선 호텔로 복귀하기로 하였다. 

타니야마에서 자전거로 30여분 정도 달려 고쓰키 강변에 다다렀다. 아침에 벚꽃이 많이 떨어져 사람들이 있을까 했는데, 벚꽃이 다 지기 전 마지막 하나미를 즐기기 위해서인지 강변에는 꽤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그중에서 퇴근 후 하나미를 즐기고 있는 직장인들의 모습이 재밌어서 한참을 지켜보았는데, 이들도 우리와 같이 직장 내 위계질서가 있다 보니, 앉아 있는 자세나 하고 있는 행동만 보고서도 누가 상사고 부하인지 바로 알 수 있었다. 자리에 앉지도 못하고 부지런히 고기를 구워 나르는 막내 직원이 내년에는 올해보다 좀 더 여유 있는 하나미를 즐길 수 있기를 기원해 보았다.  


호텔에 도착하였다. 방에서 짐을 정리한 후 어디로 갈까 잠시 고민하다가 사까나창(さかなちゃん)이라고 하는 횟집으로 가기로 하였다. 

현지인만 간다는 유명 횟집이라고 알고 있어 한 번 가봐야지 생각만 하고 여태 못 가보고 있었는데, 오늘 점심때 회를 맛있게 먹어서 그런지 회가 땡기기도 하고, 내일은 모레 새벽에 일찍 일어나야 하니 술 마시기는 부담스럽고, 오늘 밤이 어떻게 보면 맘 편하게 술 한잔 할 수 있는 가고시마에서의 마지막 날인데, 그 술안주로 사까나창에서의 회가 제격일 거 같았기 때문이었다.  


호텔에서 한 10분 정도 걸어 사까나창에 도착하였다. 이 곳도 할아버지, 아저씨(아들)가 같이 운영하는 가족 비즈니스였는데, 가게 외관은 평범했으나 내부 구조가 지금까지 가봤던 횟집과는 달라 인상적이었다. ㄷ자 모양 테이블 가운데 바닥을 깊게 파서 만든 생선을 보관하는 어항이 있고, 주문이 들어가면 눈 앞에서 해당 생선을 뜰채로 바로 떠서 조리를 시작하였는데, 살아있는 생선을 볼 수 있어 신기하기도 하고 내가 먹을 재료에 대한 안심과 신뢰도 생겨 횟집 구조로 벤치마킹하면 좋을 거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메뉴는 오늘의 추천 중 하나인 아지(전갱이) 활어회와 소주 한잔을 주문하였다. 오또시로 나온 기본 안주에 소주를 한 모금 들이키며 맛을 음미하고 있은지 얼마 안 돼 기다리던 아지회가 나왔다. 살점만 회를 떠서 주는 우리와 달리, 회를 뜬 생선의 머리와 꼬리 부분을 버리지 않고 장식으로 사용하면서 배 부분에 회 뜬 살점을 올려두었는데, 생선이 아직 살아 있는 거처럼 뭔가 더 싱싱하고 맛있게 보였다. 


회 맛 참 싱싱하네 감탄하면서 한 점, 두 점 먹고 있는데, 갑자기 옆에 있는 사람이 나를 툭 치는 것이었다. 내가 뭐 잘못했나 싶어 옆을 보니 혼자 온 아저씨였다. 외국인처럼 보이는 사람이 이 곳에 앉아 있는 게 신기했는지 아니면 본인처럼 이 곳에 혼자 온 남자에게 동질감을 느꼈는지, 나한테 어디서 왔냐고 물어보았다. 한국 서울에서 왔다고 하니깐 반가워하면서 자기는 도쿄 옆 사이타마라고 하는 곳에서 왔고, 부동산 중개업을 하며, 1박 2일로 혼자 가고시마에 여행을 왔다고 자기소개를 하였다. 나도 한 달 동안 일본을 이해하고 배우기 위해 가고시마에서 한 달 동안 여행하고 있다고 소개를 하였는데, 나를 범상치 않게 쳐다보더니, 너가 주문한 아지는 맛이 없는 생선이다, 내가 사 줄 테니 에비(새우)회를 먹어봐라, 너가 주문한 소주보다는 이게 더 맛있으니 이거 한 병 먹어봐라 라면서 부담스러울 정도로 호의를 베푸는 것이었다. 여행지에서 현지인과의 우연한 만남 그리고 예상치 못한 호의, 이것도 혼자 여행할 때만 경험할 수 있는 호사인가라는 생각을 하면서 같이 한잔 두잔 술잔을 기울였다. 얼마 안 있어 본인은 내일 새벽 비행기로 다시 도쿄로 돌아가야 한다며 먼저 일어나겠다고 하였다. 연락처를 교환하고 나중에 서울이던 도쿄던 둘 중 하나가 오게 되면 다시 한번 더 만나자는 결의를 맺으며 헤어지게 되었다. 

그분이 가게를 떠나고 아지와 에비 회를 거의 다 먹어갈 무렵, 직원분이 머리와 꼬리만 남은 생선과 에비 껍질을 갖고 가셨다. 얼마 안 있어 생선은 튀김으로, 에비껍질은 미소 된장국 재료로 활용되어 다시 음식으로 나왔는데, 생선뼈를 튀긴 게 맞나 싶을 정도로 식감이 바삭하였고, '에비껍질 된장국'도 시원 구수하게 맛있었다. 일본인들은 먹는 것도 버리는 거 하나 없이 재료 활용을 정말 잘하는구나, 우리가 다양한 분야에서 여전히 배울 게 많구나라는 생각을 다시 한번 더 하게 되었다.  


맛있는 음식을 먹으면서, 오늘도 고객에게 맛있는 음식을 선사하기 위해 열심히 일하시는 사까나창의 '아버지'와 '아들'의 모습을 보고 있으니, 지금까지 식당, 자전거 샵, 호텔 등을 방문하면서 만났던 장인정신으로 무장된 사람들의 얼굴도 같이 떠오르면서,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맨 처음에는 일본이라는 선진국에 사는 일본인들은 모든 분야에서 만능일 거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지금까지의 일본 여행과 이번 한 달 살기를 통해 본 일본인은 전체적인 역량면에서 봤을 때 그리 대단하지 않고 오히려 어딘가 모자라고 부족해 보였다. 다만 모든 분야가 아닌 특정 분야, 예를 들어 세상 돌아가는 물정에는 어둡지만, 본인이 종사하는 직업 혹은 관심 있는 취미 분야에서는 '장인정신' 혹은 '오타쿠' 정신을 바탕으로 타의 추종을 불허할 만큼 전문적인 모습을 볼 수 있었는데, 이런 사회 구성원 개개인이 모두 모여 하나의 나라를 구성한다면 어떻게 될까, 특정 분야에서 전문성을 갖고 있는 개개인 모두가 모였으니 나라 전체 관점에서 봤을 때는 강한 나라이지 않겠는가, 그렇다면 일본의 저력은 다양한 분야에서 특출난 개개인이 아닌 각자 분야에서 최선을 다하는 개개인들이 모였을 때 비로소 발휘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들이 뇌리를 스쳐 머릿속에 계속 맴돌았다. 


사까나창에서 마무리 후 방으로 돌아왔다. 좋은 안주에 좋은 술을 먹어 기분이 좋았는지, 아니면 오늘 밤은 긴장의 끈을 놓고 뭔가 좀 더 취하고 싶었는지, 지금 이 순간만큼은 내일 일정이나 남은 일정에 대해 고민하고 싶지 않아 방에 남아 있는 술과 마른안주를 먹으며 오늘 하루를 마무리하기로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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