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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소소 Nov 13. 2020

아이폰12 현대소비주의 소비자정체성에 관한 진지한 고찰

아~~~~~~~~~~~~~~~~~~~~~~~~~~~이폰 사고싶다~~

나는 어제 저녁부터 심각한 고민에 빠져 있다. 아이폰12 미니를 사느냐, 프로를 사느냐, 아니면 사지 않느냐. 미니를 사야 할 이유, 프로를 사야 할 이유, 혹은 아무 것도 사지 말아야 할 이유에 대해 적어보는 것만으로도 이 장을 다 채울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건 표면적인 것이다. 진짜 문제는 존재론적인 얘기다. 미니냐 프로냐, 아니면 사지 않느냐는 동시대인들이, 적어도 스마트폰과 하루도 떨어져 있을 수 없는 나에게는 자신의 라이프스타일과 추구하는 가치, 그리고 존재론적인 본질과 맞닿아 있는 아주 중요한 문제라고 나는 확신한다. 미니를 사는 것은 합리성의 표상이다. 나는 쓸데없이 많은 돈을 쓰길 원치 않고(가장 적은 용량이 95만 원이니 이미 비싸다) 쓸데없이 큰 화면도 원치 않는다(물론 미니를 사는 사람들의 절반 정도는 이미 패드를 가지고 있을 것이다). 나는 가볍고, 한 손에 착 들어오고, 그래서 어디든 편하게 들고다니고 편하게 쓸 수 있는 미니를 원한다. 물론 가슴 한 구석에 유튜브나 넷플릭스 혹은 사진을 볼 때 답답해서 뒤지면 어떡하냐는 근원적인 불안을 품은 채로. 그렇기에 많은 사람들이 불안에 굴복한다. 프로는 불안을 먹고 사는 존재다. 모든 프로들이, 적어도 아이폰 프로에게는 그렇다. 아이패드나 맥북이야 생산적으로 사용할 “수도 있는” 도구이니까 그렇다 치자. 아이폰을 이용하는 프로들이란 어떤 직업군의 사람들인가? 또는, 아이폰이 아닌 프로를 써야만 자신의 생산성이 올라가는 직군이란 어떤 것일까(패드나 맥북을 쓰면 더 효율적이지 않을까?). 아직도 힙스터의 주류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서 그런 건지, 나로서는 쉬이 상상이 되지 않는다. 물론, 소수, 소수 중의 소수는 자신의 직업이나 생산성을 위해서 프로가 필요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이용자들이 프로를 사는 근본적인 이유는 불안해서일 것이다. 아, 디자인. 디자인이 이뻐서 20만원을 더 주고 프로를 산다? 비합리적이지만 어쩌면 가장 합리적인 이유일 수도 있다. 적어도 디자인의 차이는 실존하는 차이이니까. 하지만 만약에 이런 생각이라면, 그냥 아이폰을 샀는데 밤에 사진이 잘 안 찍히면 어떡하지? 그냥 아이폰을 샀는데 더 느리면 어떡하지? 그냥 아이폰을 샀는데 옆자리에 꼴보기 싫은 그놈이 프로를 샀으면 어떡하지? 결국, 그냥 아이폰을 샀는데 프로를 살걸 그랬나 하는 생각이 들면 어떡하지? 라는 생각이 드는 그 날이 너무 끔찍해 사람들은 프로를 산다. 프로가 되고 싶어서가 아니라, 아마추어로 남는 게 불안해서.


고백해야겠다. 위에서 자꾸만 ‘사람들은’이라는 불특정 다수의 주어를 사용했지만, 이건 사실 내 얘기다. 나는 아이폰8플러스를 오랫동안 쓰다가, 액정이 깨져버려 얼마 전 아이폰 SE로 폰을 바꿨다. 합리적인 결정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폰을 많이 보지 않고 작은 게 편하니까. 천만에! 나는 폰을 많이 보고 큰 것도 잘 쓰고 있었다. 폰을 많이 보지 않고 작은 걸 편해 하는, 그런 합리적인 인간이 되고 싶었을 뿐이다. 얼마나 큰 꿈인지! SE는 작고 예뻤고 내가 쓰는 기능 중에 불편함을 느끼게 하는 것이란 없지만 – 굳이 따지자면 밥 먹으면서 유튜브를 볼 때 게임 화면의 상태바가 보기 힘들다는 것 정도? – 그럼에도 SE는 어딘가 불편하다. 불편하다고 생각한다. 배터리가 엄청나게 빨리 닳아 없어지는 것부터 시작해서, 구형 LED 화면은 밋밋해 보이고(지난날들 어떻게 아이폰을 쓰면서 살아온 것일까?) 사진은 어딘가 못나 보인다. 아내가 얼마 전에 존버에 성공해 12 프로에 산 이후로 이런 증상이 유난히 심해졌다. 같은 데서 찍은 사진을 옆에 놓고 비교하면서, 대부분의 경우 크게 다르지 않음을, 어떤 경우에는 SE가 더 잘 나오기도 한다는 사실을 보고서도, 그리고 프로의 기능들(주로 저조도 야간 상황에서 빛을 내는 그런 기능들)이 사용되는 경우가 제한적이어서, 특히 요즘 나의 생활패턴 – 밖에 잘 나가지 않는 – 을 봐서는 그런 기능들이 크게 필요가 없다는 걸 알면서도, 심지어 어떤 경우에는 SE로 찍은 야간 사진이 프로보다 낫다는 걸 보면서도! (SE의 카메라가 프로보다 나아서는 아니겠지만) 그런 생각은 사라지지 않는다. 나는 불안에 먹히고 있다. 와구와구. 라이다 센서가 필요할 때가 있지 않을까? 짭짭. 이제 밤이 길어지니 어두울 때 사진을 직을 일이 많지 않을까? 짭짭. 초광각을 활용하면 힙해 보이는 사진이 많이 나오는군? 짭짭. 돌비 동영상이라니! 나는 동영상을 많이 찍고 싶어!(내가 원하는 또 하나의 나) 짭짭 맛있다 꺼억.


나는 합리적인 인간으로 보이고 싶다. 그렇다면 사지 않는 게 정답이겠지. 구형이고 렌즈 경통이 살짝 망가져 줌링이 잘 돌아가지 않지만 어쨌든 폰카보다야 훨씬 센서가 커다란 dslr도 하나 갖고 있고, 비록 화면이 작고 야간 저조도 상황에서 12보다 떨어지고 렌즈도 하나밖에 없고 더러운 구형 LED를 쓰고 있지만 대부분의 일상생활에서 크게 불편함이 느껴지지 않는 SE도 갖고 있으니까. SE의 가장 불편한 점은, 이걸 쓰고 있을 때면 12 미니나 12 프로를 쓰면 더 좋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끊임없이 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나는 합리적인 인간이고, 합리적 소비를 할 줄 아는 인간이고, 이 더러운 소비자본주의에 굴복하지 않는 주체적 인간이다!!!!!!!!!!!!!!!!!!!!!!! 새로운 아이폰을 사지 않음으로써 그걸 증명하겠어!!!!!!!!!!!!!!!!!!!!!!!!!!!


슬쩍. 음. 아이폰12 프로. 더럽게 커다랗군(아이폰8플러스를 2년 넘게 사용했음). 흠. 뭐야. 사진 비교해보니 SE랑 별 차이도 없군. 뭐? 케어까지 가입하면 160만 원? 지쟈스! 새로나운 맥북을 사는 게 낫겠어(소비자본주의가 뭐라고?). 그런데다가 30일까지 기다려야 한다고? 끔찍한 종자구만! 흠. 그런데 확실히 확대해보니 사진이 좀 선명한 것 같기도 하고. 확실히 OLED라 그런가, 뭔가 선명해. 이 꼴보기 싫은 위 아래 노치도 안 보이는군. M자 탈모라고? 사실 난 예전부터 탈모가 이쁘다고 생각했지. 아이폰X가 나왔을 때부터. 남들이 다 놀릴 때 나는 이 탈모가 이쁘다고 생각했다고. 비록 아이폰8을 사긴 했지만. 흠. 깻잎 통조림. 깻~잎 통조림. 저 파란색 깻잎 통조림은 분명 신포도일 거야. 신포도. 그치만.


개소리를 길게 써놨지만, 쓰고 나니 겨우 정리가 된다. 나는 신형 아이폰을 사면 안 되고, 사고 싶다. 결국 뻔한 문제인 것이다. 그리고 이런 경우, 대부분 누가 이겼는지도 뻔하다. 승패는 보고하지 않겠다. 비참하니까. 아무도 내게 돌을 던지지 마라. 더러운 소비자본주의의 첨병의 농간에 농락당한 것도 서러운데 돌까지 맞으면 더 비참하니까. 사도 그만이고 안 사도 그만이다. 그럼에도 사고 싶고 사면 안 된다. 더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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