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앤디 골즈워디.
빗 속에 누웠던 ⟨Rain Shadow> 반년 뒤,
이번에는 눈이 내리는
캄브리아의 숲 속에 누웠다.
작가의 기록에 따르면 매우 추웠고,
이미 쌓인 눈은 치워 넓은 공터를 만들었다.
두 번째 시도만에 이 ‘그림자’를
남기는 데 성공했다.
⟨Rain Shadow>처럼 눈이 녹으면,
혹은 오히려 더 내린다면
그림자 또한 흔적 없이 사라질 것이다.
일회적이고 소유 불가능하며,
따로 이 사진과 같이 기록을 남기지 않는다면
개념(concept)으로만 존재할 예술.
어쩌면 이 작품의 진짜 주제는
그림자 자체가 아니라
근본적으로 ‘눕는다’는 행위이며,
그림자란 그 행위가 남긴
아주 한시적인 자취에 불과하다.
‘환경미술 environmental art’은
많은 경우
‘행위예술 performance art’이기도 하다.
그리고 퍼포먼스 아트는 대개
사진이나 비디오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행위의 순간이 지나고
누군가 기억하지 않는다면
그 예술의 행위가 있었다는 사실조차
사라지기 마련이어서,
그리고 내 생각에는
그렇게 사라지는 게 마땅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때 그 일이 있었다”는 증거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다면 그 행위가
예술로서 존재할 수 없는,
또는 기억될 수 없는 아이러니.
순간을 지향하지만
영원히 기억받고 싶은 욕망.
⟨Snow Shahow>를
예술작품으로 관리해야 한다면
그 물리적 형태는
‘코닥크롬 64’로 찍은
35밀리 슬라이드 필름이 될 것이다.
크기는 필름의 사이즈인
24cm × 36cm.
나아가 어쩌면,
사진이라는 예술은 행위예술과
종이 한 장 차이인지도 모른다.
렌즈 앞에서는 아무리 ‘자연스러운’
표정과 포즈라고 해도 결국 어느 정도는
연기(performance)일 수밖에 없으며,
카메라를 들고 움직이는 작가는
다른 시각매체보다 피사체와 풍경에
보다 물리적이고 직접적으로 개입하는
일종의 퍼포먼스를 펼치는 것 아닌가.
더욱이 사진이라는 틀에 담기는 대상은
다큐멘터리건 인물이든 풍경이든
언제나 순간적이며, 찰나의 사건들이다.
사진으로 남지 않는다면 사라질
모종의 사실들, 혹은 진실들.
사진은 언제나,
“그때-그것이-존재했음”의 증거다.
마치 여기에서 보이는,
비어있으나 그가 존재했음을 알리는
앤디 골즈워디의 ‘그림자’,
그리고 그것의 ‘사진-기록물’처럼.
사진은 앤디 골즈워디의 디지털 카탈로그 참고:
https://www.goldsworthy.cc.gla.ac.uk/image/?id=ag_03164&t=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