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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월 Jun 05. 2019

동양은 서양보다 왜 근대 과학 기술에서 뒤졌을까?

미중 무역 분쟁에 대한 단상

최근 미중 무역 분쟁이 심각하다. 관세 폭탄에 이어 환율 보복이 거론되고 있다. 중국 기업 화웨이에 대한 미국의 거친 견제도 대단하다. 이는 궁극적으로는 4차 산업 혁명시대에 중국의 기술 굴기를 용납하지 않겠다는 미국의 입장으로 보인다. 더 나아가 차제에 미국 중심의 세계 질서에 대한 중국의 도전 의지를 꺽어 놓겠다는 의도가 읽힌다. 중국인들은 단순한 무역 갈등을 넘어, 100년 전 서구 제국주의에게 당했던 치욕적인 침탈의 악몽을 떠올리며 반발하고 있다.

이를 보고 있자니 왜 동양은 서양에 비해 과학 기술에 뒤쳐져 지난 백여년 그 치욕을 당해야 했었나 새삼 궁금해진다. 과학사를 연구한다는 학자들의 이야기를 들어보아도 변변한 답을 하는 사람들이 없다. 서양 과학사 중심으로 공부해서 그런지 동양은 애시당초 과학이라고 할 만한 것이 없었다는 무성의한 답변이나 늘어 놓았다. 급한 놈이 우물 판다고 답답한 심정에 내 짧은 역사 지식을 가지고 추론해 보았다. 그리고 그 이유를 세 가지 차원에서 도출했다.

첫째. 학문의 기초인 철학의 출발점이 달랐다. 서양인들은 철학을 자연에 대한 객관적 이해를 중시하는 자연주의 철학으로부터 시작했다. 그리스 이오니아 지방의 자유로운 중상주의 분위기 속에서 서양 철학의 아버지 탈레스는 “만물의 근원은 물”이라는 주장으로 철학을 열었다. 반면 비슷한 시기 중국인들은 정치 철학과 윤리학으로부터 철학을 시작하였다. 동양 철학의 시조인 공자는 춘추 전국시대 혼란한 세상을 바로잡겠다는 구세적 갈망에서 "인과 덕치"를 설파하였다. 플라톤이 세운 아카데미아의 입구에는 “기하학을 모르는 자는 이곳에 들어오지 말라”고 쓰여 있었다고 한다. 이러한 서양의 정신 사조는 과학의 기초인 기하학과 수학의 발전을 뒷받침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철학 사조의 차이 오랫동안 의미 있는 동서양 과학의 차이를 만들지 못했다. 오히려 근대 이전까지는 종이, 나침판, 화약의 발명 등 실용성 면에서 동양의 과학기술은 서양을 앞서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명나라 정화의 아프리카 원정 시기까지만 하여도 원정대가 쓰던 주력 범선의 무게는 수 천 톤에 달했다. 반면 이후 60년 뒤에야 아메리카를 탐사한 콜롬버스의 범선 조차도 150톤에 불과했다.

둘째. 지중해라는 바다가 만든 교역 환경의 차이가 크다. 서양은 동양보다 뒤진 항해 기술에도 불구하고 상대적으로 매우 평온한 지중해라는 바다를 가지고 있었다. 이를 배경으로 일찍이 유럽과 아프리카 북부, 중동을 아우르는 거대 시장이 형성되었다. 지중해 연안에는 상공업에 종사하는 도시국가들이 발전하였고 거대 시장에 힘입어 분업이 발전하였다. 분업의 차이는 생산성을 향상시키고, 모험적이고 자유분방한 도시 문화와 대토지 지주에 대항할 만한 신흥 도시 부르조아 계층을 탄생시켰다. 이들이 후에 대항해 시대를 열어가는 주역들이다. 그리고 이어진 대항해 시대에 남미, 북미, 아프리카 등에서 무자비한 식민지 약탈을 통해 엄청난 경제적 부와 풍부한 천문, 지리, 생물 데이터의 축적을 이루었다. 이것이 근대 과학 혁명의 추동력이 되었다. 이러한 지중해의 중요한 특징에 대해서는 애덤 스미스가 [국부론]에서 이미 명쾌히 분석하고 있다. 이에 반해 중국은 인구는 유럽보다 많았지만 육상 교통위주로 상공업을 하다 보니 실제 교역 가능한 시장의 크기는 유럽에 비해 제한 될 수 밖에 없었다. 지중해 도시 국가에 비해 협소한 시장의 크기는 혁신적인 분업과 기계 과학 기술의 발전을 저해하는 요인이 되었다.

셋째. 아시아 국가간 과학 지식 교류의 부족이다.  아시아에서 16세기 정도에 학문과 문화를 유럽 국가와 견줄 만한 나라는 조선과 중국, 일본 정도였다. 이에 반해 유럽은 상대적으로 작은 여러 나라가 번성하고 있었다. 유럽 국가들은 과학 기술 분야에서 경쟁을 통해 지식의 교류와 축적이 활발하였다.(예: 독일 천문학자인 케플러가 행성 운동 법칙을 밝혀낸 데에는 덴마크 천문학자 튀코 브라헤의 오랜 관측 자료가 있기에 가능했다. 후일 케플러의 법칙을 토대로 영국의 뉴턴은 만유 인력 법칙을 발견하였다) 반면 아시아에서는 중국에 일찍부터 거대한 통일국가가 들어서다 보니 유럽에 비해 상대적 다양성이 부족했다. 또한 중국이 자족적인 경제 체제를 이루면서 국가간 교류는 자유로운 민간보다는 정부 차원의 사절단이나 조공 무역이 주류였다. 더구나 3개국 중 하나인 조선은 임란, 병란을 겪으며 이웃 국가들에 대해서조차 준 쇄국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었다. 이로인해 과학 기술 정보의 생산과 교류에 있어서 아시아는 유럽과 비교되지 못했다. 대체로 1600년 이후 동북아시아의 이러한 국제 관계는 아시아 근대 과학 발전의 큰 걸림돌이 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나마 일찌감치 서양 문명의 변화를 감지하고 정보에 민감하였던 일본만이 가까스로 후일 독자적인 근대화에 성공할 수 있었다.

결론적으로 보면 아시아인들이 유럽에 비해 근대 과학이 뒤쳐진 이유는 사람의 차이가 아니라 과거 아시아의 독특한 국제 정세와 특수한 지리적인 요인의 영향이 컸다. 그러나 현대에 들어 과거에 불리하였던 제약 조건들은 모두 해소되었다. 지금 아시아인들은 과학 기술이 얼마나 중요한지 뼛속 깊이 절감하고 있다. 더구나 중국의 지도자들은 대부분 이공계 출신들이다. 또한 교통•운송과 통신 수단의 발전은 아시아를 세계 무역의 변방이 아니라 중심으로 만들어 주었다. 전 세계가 하나의 시장에서 만나 경쟁하고 있다.  

현재 진행 중인 미중 무역 분쟁은 과학 굴기에 대한 중국인들의 의지를 더욱 자극할 것이다. 아시아 3개국 유교 문화의 특징은 우환의식이다. 중국인들은 이번에 다시 한번 치욕적인 근대사를 떠올리며 절치부심하고 있다. 국제 정세에 있어서도 “사람은 우환에 살고 안락에 죽는다.”는 맹자의 교훈이 다시 생각나는 시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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