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 교회가 삶의 언어를 잃었는지’에 대해 한탄하는 그을 분명 어느 책에선가 읽었는데 어느 책인지, 생각이 나지 않는다. 혹시 <복음과 상황> (No. 408)이었나? 싶어 지평너머교회의 정병선 목사의 글이었나? 싶어 뒤졌다. 아니다. 그러나 매우 중요하고 잃어버린 언어와도 관련성이 있다. 그의 글 일부를 요약하면 이렇다.
“이스라엘과 교회의 독특함은 하나님 말씀을 들었다는 데 있다. 이스라엘과 교회는 한 톨의 의문도 없이 들었다고 확신했으나, 성경은 한 톨의 의문도 없이 너희가 듣지 않았다고 탄식한다. 너희가 들었어도 잘못 들었고 잘못 들은 것은 듣지 않은 것이라고 고발한다. 그런데 누구도 이 간극을 주목하지 않는다. 유일하게 성경이 초지일관 말한다. 지금까지 온 생명이 겪은 온갖 어그러짐, 온갖 어리석음, 온갖 파열 온갖 고통이다. 하나님과 그리스도인 사이의 이 간극, 성경과 교회 사이에 이 간극에서 비롯됐다고. 나(정병선 목사)는 이 생태사적 간극에 주목한다. 이스라엘과 교회가 하나님 말씀을 잘못 들음, 듣지 않음에 주목한다. 왜 잘못 들은 것일까? 왜 잘못 듣고도 잘못 들었다는 걸 자각하지 못한 것일까? 생각할수록 기이하다. 어디서도 들려오지 않은 하나님 말씀이 문자 속에 보관되어 있다니. 하나님 말씀은 문자보다 크고 깊고 오묘한데 그런 말씀이 고작 문자로 기록되었다니. 문자는 하나님 말씀을 닮기에 너무나도 부족한 그릇이다. 부족할 뿐 아니라 오독의 위험이 아주 많은 그릇이다. 얄궂게도 하나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최상의 그릇인 문자가 하나님 말씀을 잘못 듣게 하는 최고의 걸림돌이다. 그런데 이스라엘과 교회, 특히 교회는 문자의 한계와 위험성을 경계하지 않았다. 하나님 말씀에 물체에 담겨있다는 사실에만 집중했지. 문자가 하나님 말씀을 담아내기에 턱없이 부족한 그릇이라는 사실은 주의하지 않았다.”<복음과 상황> (No. 408) 132~134
한 마디로 교회는 삶의 언어를 잃었고, 교회는 크고 깊고 오묘한 하나님을 고작 문자 안에 가뒀다. 결과적으로 아직은 여전히 교회 안에 있는 교우들조차 교회의 단조로운 언어에 한계를 느끼고 있는 듯하다. 그러니 교회 밖, 혹은 기독교 밖에 있는 사람이 교회에, 혹은 기독교에 다가갈 수 있을까!
며칠 전 구선우 작가가 내 책 <나이가 하는 일>(비공) 리뷰를 써줬는데, 정작 책을 쓴 나는 그분이 쓴 용어를 알지 못한다. 게오르그 루카치, 미하일 바흐친이 누군지, 그들이 주목한 ‘리얼리즘’이 어떤 것인지 모른다. 오늘 도서관에 가서 게오르그 루카치와 리얼리즘을 검색해 두 권의 책, <잡담의 인문학
게오르그 루카치에서 페데리코 펠리니까지>(토머스W.호지키슨, 휴버트 벤 베르그
마리서사)와 인간을 존중하는 리얼리즘 <다르덴 형제>(장 피에르 다르덴, 뤽 다르덴, 미셸 시망
마음산책)을 대출해왔다. 그리고 뉴욕 식물원 가드너 이성희의 식물과 영성 이야기인 <정원에서 길을 물었다>(선율)를 읽다가 궁금해진 책, <모든 것의 이름으로>(엘리자베스 길버트
민음사)를 상호대차로 도서관에 신청했다.
나는 많은 이들과 아니 어쩌면 누구와도 결이 다른, 유일하게 독특한 기독교인이다. 알고 보면 기독교인 한 사람마다 각자 자기만의 이야기를 갖고 살아가듯, 자기만의 고유한 기독교 신앙이 있을 것이다. 같은 신앙이란 착각이다. 그리고 각기 다른 모든 이의 기독교 신앙이 기독교의 스펙트럼일 테다. 사실 내가 이렇게 생각하게 된 건, <힌두교사 깊이 읽기>(이광수
푸른 역사)를 읽다가 만난 글 때문? 아니 덕분이다. 이 책을 다 읽지 못했고(언제라도 꼭 읽긴 해야겠다는 생각이 여전한데 책꽂이에만 꽂혀있다), 이미 읽은 부분도 이해하기 어려웠지만, 힌두교의 스펙트럼이 다양하며, 우리는 스스로 힌두교도라 생각하는 모두를 힌두교로 여겨야 한다는 글이 생각난다. 그러니 기독교 신앙을 가진 나의 신앙은 힌두교, 철학, 소설과 영화, 그리고 정원사, 극작가, 연출가들의 영향을 받은 언어로 표현되는 셈이다. 나는 은혜, 삼위일체, 예정론 등과 같은 언어를 거의 사용하지 않을 뿐 아니라, 그 용어 안에 내 신앙을 가두고 싶지 않다. 그리고 다른 분도 조금 더 넓은 언어의 세상에서, 문자보다 크고 깊고 오묘한데 하나님의 말씀을 다만 성경 66권의 문자 안에 가두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레미제라블> 5권, 2,489쪽, 그 안에 올바른 사람, 법과 경찰, 억울한 재판, 나폴레옹과 워털루 전쟁, 전쟁의 비참함, 군함, 버림받은 여자와 아이들, 수도원과 교육, 묘지, 파리와 파리의 건달, 부르주아, 불행의 효험, 남녀의 사랑, 지하의 악당들과 가난뱅이, 몇 쪽의 역사, 구원, 곁말, 1815년, 1817년, 1832년 6월 5일의 폭동, 주점, 하수도, 가족 관계, 양심, 왕, 진보, 혁명, 반란 등, 단편, 중편, 장편소설로 된 무려 368개 장이 있다. 한 사람의 생애와 위험한 사랑이 그토록 많은 368개 이상의 소재 혹은 주제 안의 면면히 이어진다. 우리의 삶이 그렇다. 사람이, 사랑이 그렇다. 어머니가 작아지고, 하나님이 작아진 세상에서 우리도 너무 작아졌다. 너무 작은 우리는 삶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있다.” <나이가 하는 일> 292.
1815년~ 1832년, 그리고 그 이후, 고작 17여 년에 걸친 한 사람의 노년에 최소한 368개의 소재와 주제가 담긴다. 우리 삶에도 이런 다양한 많은 이야기가 존재한다. 그러니 교회의 언어 역시 그만큼 풍성해야 하지 않을까!
북 리뷰, 복음과 상황에서 만난 글 일부, 읽고 있는 책 한 권읋 인해, 나는 또 이리 길게 말을 하고 있다.